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무제한 토론을 통한 법안 지연(필리버스터)을 잠정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주장과 함께 야권의 패배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엇갈린 전망이 나온다.

47년만에 재현된 필리버스터는 테러방지법안을 막기 위한 고육책에서 나왔다.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전격 제안했고, 비례대표들을 의원을 중심으로 필리버스터에 나서면서 불이 붙었다.

모처럼 무기력한 야당의 모습을 탈피해 다수당의 일방통행을 의회 정치를 통해 저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야권 지지층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시민들에게도 교과서에서나 봤을 필리버스터가 재현되면서 관심을 불러모았다. 민주주의를 학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리버스터 현장인 국회 본회의장엔 학생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결국 더불어민주당은 선거구 미획정에 대한 비판 여론을 넘지 못했다. 향후 총선에서 유불리를 계산한 결과 안보프레임은 보수와 진보의 결집을 가져올 뿐 표 확장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전략 분석에 손을 들었다.

필리버스터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야권 지지층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지만 여론조사에서 필리버스터를 끌고갈 동력으로 볼만한 여론의 지지가 부족했던 건 사실이다.

리얼미터가 야당의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에 대한 국민여론을 전국 성인 53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필리버스터에 찬성한다는 의견은 42.6%, 반대한다는 의견은 46.1%로 나왔다. 오차범위 내에서 반대 의견이 조금 높아 팽팽한 것으로 보이지만 인터넷에서 보였던 반응과는 다른 결과였다.

필리버스터는 정당 지지도와 국정수행 지지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필리버스터 이전인 지난달 19일과 22일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 정당 지지도는 새누리당 42.1% 더민주당 24.3%, 국민의당 13.9%, 정의당 5.4%, 박근혜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는 잘함 43.6%, 잘못함 48.6%로 나왔다. 필리버스터 이후인 지난달 22일부터 26일까지 2월 4주차를 종합집계한 결과에서는 새누리당 43.5%, 더민주당 26.7%, 국민의당 12.1%, 정의당 4.7%, 박근혜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는 잘함 46.1%, 잘못함 48.2%로 나왔다. 더민주당이 소폭 상승하긴 했지만 새누리당과 박 대통령의 지지도도 동반 상승했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장시간 필리버스터를 이어갈 경우 결코 유리한 것만은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는 배경이다.

특히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선거구 획정이 지연되면 여당의 '폭격'이 시작되고 안보이슈가 경제이슈를 삼키면 득보다 실이 많을 것으로 판단한다면서 필리버스터 중단을 강하게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새누리당은 국정원의 금융추적과 감청과 관련해 '국가 안보'라는 말을 넣어 시행 근거를 분명히 하자는 정의화 국회의장의 중재안은 물론 야당의 독소조항 제거 주장에 대해 한글자도 고칠 수 없다고 버텼다. 더불어민주당이 더 이상 필리버스터를 끌고 갈 경우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이유다.

그럼에도 모든 경우의 수를 정치공학적으로 풀면서 백기투항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야성이 비판의 도마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더민주당이 주장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 경제 실패 프레임이 주효하기 위해선 여당에 맞선 대안 정당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 우선인데도 정치공학적 전략만 앞세우면서 유권자의 마음을 돌려세우지 못했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 지난달 24일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필리버스터 무제한토론을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새누리당이 버티는 한 임시회기까지 필리버스터를 지속하더라도 테러방지법은 통과될 것이라는 전망 자체도 패배주의에 근거한 것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100시간 넘게 테러방지법의 부당성을 주장한 내용을 반영하지 않고서는 필리버스터 중단 명분을 찾기 어려웠다는 점도 지적된다. 결국 버티는 청와대와 여당에 맞서 협상의 여지를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재단하고 백기투항을 한 꼴이라는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박원석 정의당 의원은 1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선거법 처리가 안된 상태에서 청와대와 여당이 꿈쩍 안하고 선거 차질에 대한 책임을 묻는 역풍이 불거라는데 이해 안되는 바는 아니다"면서도 "하지만 저쪽도 선거를 치루는 상황에서 피차 곤란하다. 더 중요한 것은 협상의 여지를 만들어 돌파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의원은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해서 임시국회가 끝날 때까지 부당성을 알리고 여론에 호소하고 독소조항을 제거시키는 게 필리버스터의 시작 취지"였다며 "중단 결정을 내리는 것은 사안의 무게로 봤을 때 맞지 않다. 청와대와 여당에게도 ‘버티면 주저 앉는다’라는 학습 효과를 줬다. 이번엔 단호한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또한 안보프레임을 경제 실패 프레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더민주당 지도부의 주장에 대해서도 "경제 프레임이 보편적 관심사이고 박근혜 정부가 실패한 것도 맞다. 그런데 경제에 실패한 것을 가지고 대안으로서 야당이 프레임을 짜고 주도적으로 펼쳐왔느냐라고 물으면 그런 실력이 없었다. 경제 실패 프레임에 끼워맞춰 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킨 것은 오히려 집토끼를 잃을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테러방지법을 안보프레임으로 몰아세운 것은 새누리당의 주장일뿐이고 적극 인권의 문제로 돌려세워 '이념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여론을 바꾸는 책임이 야권에 있었다는 반론도 만만치않다.

테러방지법 처리 문제를 이념전쟁으로 보는 더민주당 지도부의 인식에도 비판이 예상된다. 백찬홍 씨알재단 운영위원은 통화에서 "테러방지법은 국정원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주는 문제인데 이념 논쟁으로 본 것 자체가 문제"라며 "이념전쟁으로 이겨본 적이 없다는 지도부의 인식이 문제이고 김종인 대표의 보수성이 드러난 문제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느냐’라는 유신시대와 새누리당 시각의 맥락에서 개성공단 폐쇄 문제, 대북 발언 등 우클릭 행보를 보인 김 대표를 봤을 때 테러방지법 문제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당장 야권 지지층이 실망해 식어버린 여론을 어떤 의제로 회복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심도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경제 실패 프레임이 작동하려면 이에 대한 여론의 동력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필리버스터 중단 역풍이라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국회 서기관 손가락만 아픈 꼴이다', '자기 밥그릇을 걷어찬 것이다', '보수언론들의 선거쇼라는 비난을 인정한 것이다'라는 야권 지지층의 비아냥도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안보 문제에 대해서 보수적 시각이 짙었던 20~30대가 더민주당의 지지세력이 되고 '열광'했던 것을 상기하면 '이념전쟁'은 불리하다며 필리버스터를 중단한 지도부의 결정이 젊은 지지세력 결집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지적도 나올만하다.

김태환씨(41)는 "필리버스터로 법안을 막겠다는 목적보다는 필리버스터를 통해 야권의 정권교체 가능성을 보면서 희망을 가졌다. 이런 식으로 중단해버리면 과거로의 회귀를 무능한 야당이 만들었다는 비판과 실망을 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진아씨(38)는 "필리버스터를 보면서 정치에서 희망을 가졌던 감정이 오랜만이었다. 아름다운 퇴각까지 기대하진 않았지만 정치공학적인 유불리만 따져 중단을 결정한 것은 더민주당이 필리버스터라는 과실을 따먹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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