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26일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국회 영결식이 열렸다. 1970~1980년대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에 맞선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각계 인사들이 모였다.

황교안 국무총리, 김수한 전 국회의장 등은 추도사를 낭독하며 김 전 대통령을 기렸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박정희’라는 이름은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았다.

유신정권 말기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의원직 제명이 부마항쟁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면, 이날 영결식은 고인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반쪽짜리였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였을 것이다.

영결식장에서 상영된 고인의 생전 영상에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등장한 장면은 찾기 어려웠다. 

다만 ‘하나회 척결’, ‘5·18특별법 제정’ 등 YS의 업적을 조명하면서, 수의를 입은 전두환·노태우의 모습은 영상을 통해 전달됐다. ‘전두환은 되고 박정희는 안 되고.’ 이 문장을 되뇌며 영결식 취재를 마친 기억이 있다.

지난 2일 방영된 KBS ‘시사기획 창’의 ‘훈장’ 편을 보면서도 그때 그 문장이 떠올랐다. ‘전두환은 되고 박정희는 안 되고.’

이날 방송은 무고한 사람을 고문해 간첩 자백을 받아내고 그 대가로 훈장을 받은 보안사 인사들의 만행을 고발했다.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 ‘납북 어민 간첩 사건’ 등 주로 1980년대 발생했던 간첩 조작 사건을 재조명했다.

대표적으로 이병규씨는 1985년 5월 자신의 일터에서 보안사 수사관들에 의해 강제 연행됐다. 수사관들은 이씨가 납북돼 있는 동안 간첩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고정간첩으로 암약했다고 추궁했다. 담당 수사관 3명은 ‘간첩 이병규 검거’라는 명목으로 훈장을 받았다. 이씨는 2012년 재심에서 간첩 누명을 벗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KBS가 박정희가 집권한 시기는 ‘1970년대’라고 표현하고 전두환이 집권한 시기는 ‘전두환 정권’이라고 표현한 대목이다. 

아이템 자체가 간첩 조작 사건에 맞춰졌고 그 사건들이 전두환 정권 때 급증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데스킹 권한을 쥔 KBS 간부들의 ‘대통령 눈치보기’라는 심증을 지울 수 없다.

▲ KBS ‘시사기획 창’이 지난 2일 방영한 ‘훈장’ 편. ⓒKBS
2일자 방송도 ‘간첩과 훈장’이 아닌 ‘훈장’이라는 이름으로 전파를 탔다. 이 때문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 행적자와 일제 식민 통치를 주도한 일본인에게 대거 훈장을 수여했다는 내용이 담긴 2부 ‘친일과 훈장’ 편이 불방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언론노조 KBS본부는 방송 직후인 3일 성명을 통해 “사측이 제목을 ‘훈장’으로 바꾼 이유가 무엇인가”라며 “1편과 2편으로 나뉘어 방송돼야할 훈장 시리즈를 이번 한 번으로 때우려는 것이라고 우리는 의심한다”고 했다. 

‘훈장’ 편은 우여곡절 끝에 방송을 탄 것이다. 당초에는 ‘간첩과 훈장’, ‘친일과 훈장’ 2부작 아이템이었다. ‘훈장’ 2부작은 각각 지난해 6월과 7월로 프로그램 방송 날짜가 잡혔으나 계속 연기됐다. 예정됐던 날짜보다 8개월이 지나서야 방영될 수 있었다.

훈장 제작팀은 고초를 겪었다. 팀장급 인사에서 ‘훈장’ 아이템 편성을 요구하던 안모 탐사보도팀장이 네트워크부로 인사 조치되는 등 제작진 3명이 자리를 옮겼다. 

이런 제작진의 노고가 없었다면 ‘훈장’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기약 없는 후속편이다. ‘전두환도 되고, 박정희도 되는’ 성역 없는 비판을 기대할 수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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