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등록번호제도는 문제가 많다. 생년월일, 성별, 출신지역 등 불필요한 정보가 과도하게 담겼다. 규칙성이 있다 보니 간단한 계산만으로 쉽게 주민번호를 생성할 수 있다. 여러차례 대규모 유출이 이어져 ‘공공재’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지난달 개인정보 유출 이후에도 주민등록번호를 바꾸지 못하는 현행 주민등록법이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았다. 주민번호를 변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게 골자인데, 단순히 몇사람 주민번호 바꾸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임의번호로 주민등록번호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정부가 소극적이며 여론도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행정마비” “사회혼란”을 이유로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치부된다. 28일 국회에서 열린 ‘주민등록번호제, 어떻게 개편할 것인가’ 토론회에서 신훈민 진보네트워크센터 변호사는 “우려가 많은 게 사실이지만 주민번호 변경에 따른 혼란은 과장됐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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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훈민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주민등록번호를 행정 전반에 쓰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번호를 한 번에 바꾸면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단계적으로 번호체계를 변경하면 혼란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특정지역을 시범지역으로 지정하고 우선적으로 변경하거나, 새로 태어나는 신생아에 개인정보가 없는 임의번호로 구성된 주민번호를 부여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정부는 이 같은 개선방안에도 동의하지 않고 있다. “개인자격으로 왔다면 할 말 많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며 운을 뗀 김군호 행정자치부 주민과 과장은 “주민번호 변경은 비용과 혼란이 생기고 범죄자 신분세탁 등에 악용될 우려도 있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그는 이어 “따라서 재산상의 피해나 성폭력, 가정폭력 등의 피해를 입거나 피해를 입을 우려가 있는 사람에 한해 주민번호변경을 신청하도록 하고, 심의를 거쳐 변경 가능하도록 하는 게 정부의 주민등록법 개정안”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그동안의 정부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아 당황스럽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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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인권연구소 등 시민사회단체는 28일 국회에서 '주민등록번호제, 어떻게 개편할 것인가' 토론회를 열었다. 사진=금준경 기자.

신훈민 변호사는 이 같은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이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첫째, 쉽게 2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주민번호 마지막 두자리를 바꾸는 방안이 유력한데, 바뀐 번호를 알아내려고 시도하면 경우의 수는 100가지도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성폭행 등 피해자로 주민등록번호 변경 요건을 한정할 경우 ‘낙인’이 될 우려가 있다. 셋째, 현재 제도를 어차피 개선해야 한다. 지금의 주민등록번호 체계는 2100년 이후 출생자부터는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주민등록번호를 바꾸는 게 ‘범죄세탁’ 등에 악용될 수 있다는 주장 역시 충분히 검증되거나 조사된 게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신훈민 변호사는 “정부 주장을 보면 마치 지금까지 주민번호를 바꿔준 적 없는 것처럼 말하는데 지난 16년간 정부는 행정착오로 잘못부여된 주민번호 24만 건을 바꿨다. 이들에 대한 범죄세탁, 채무면탈 사례가 얼마나 있었는지 먼저 조사를 하고 설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범죄에 대한 건 법무부가 형법으로 판단할 일이지 주민등록법의 영역과는 무관하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주민번호를 쓰는 목적은 국가안보와 주민관리다. 신분세탁이나 범죄은닉 등은 주민등록법에 규정된 개념이 아닌데, 법에 규정되지 않은 이유를 들며 개선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지금의 주민등록번호가 ‘성차별적 요소’가 있다는 점도 문제다. 류민희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 소수자인권위원회 변호사는 “통장을 개설하거나 핸드폰을 개통할 때 트랜스젠더들은 주민등록번호에 쓰인 성 구분 숫자 때문에 ‘정말 본인이 맞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이 경우 간단한 사적거래도 포기하게 되는 등 기본권이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27일 진보네트워크 등 시민사회단체는 현행 주민등록번호 체계가 성차별적 요소가 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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