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적장자가 아니면 온갖 멸시를 받았던 조선시대에 무수리의 서자 출신으로 왕이 됐다. 영조의 생모인 최숙빈(숙빈 최씨)의 출신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무수리(임금의 우물에서 물을 긷는 하인) 출신 혹은 궁녀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영조는 형인 경종을 독살하고 왕이 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왕이 되었지만 권력의 정당성은 인정받지 못했던 셈이다.

개천에서 난 용은 자신의 출생이 개천이라는 것에 콤플렉스를 품는다. 영조는 자신의 출생과 함께 경종의 일까지 두 가지 약점을 지녔다. 이는 용이 되었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콤플렉스를 가진 부모는 자기 자식만큼은 이를 겪지 않았으면 한다. 자신은 비록 ‘개천’에서 난 용이지만 태생부터 용으로 태어난 자식이 자신의 약점을 풀어줄 만큼 훌륭한 왕으로 자라주길 바란다.

영조가 늦게 얻은 자식인 이선(사도세자)은 어릴 적부터 총명함을 보여 영조의 사랑을 받는다. 2살이 채 되지 않았지만 세자에 책봉된다. 영화 ‘사도’의 이선(유아인 역)이 3세에 신하들 앞에서 글씨를 쓰고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광좌에게 자신의 글을 주는 장면, ‘사치할 사’자를 배운 이선이 비단옷을 벗고 무명옷을 입는 장면은 모두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실제 이선의 모습이다. 이선은 영조의 ‘꿈의 대리인’으로 성장해야 했다.

하지만 자식은 커가며 부모가 기대한 용의 역할을 해주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선은 15세부터 공부보다 무술을 가까이했다. 이선은 심지어 대리청정을 하는 기간에도 12가지 기예를 담은 무예서 편찬을 지시하기도 했다. 영조의 기대는 무너진다. 영화 속 영조(송강호 역)가 이선에게 “너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니?”라고 꾸짖는 장면은 이런 답답함에서 나온다.

   
영화 '사도' 포스터. 사진=영화 '사도' 스틸컷
 

권력의 정당성에 자신이 없었던 영조는 자식이 기대에 못 미친다면 자신이 쥔 권력까지 모조리 비웃음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미친다. 그는 부자(父子)의 삶을 전쟁터로 만든다. 이 상황에서 자식이 공부를 잘하는 것은 곧 자신의 전투력이 올라감을 의미한다.

18세기 조선은 21세기 한국과 다르지 않았다. 책 ‘교육 불가능의 시대’에서 이계삼 오늘의교육 편집위원은 “한국 교육의 근원적인 불행이란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 외에는 다른 삶을 향한 출구가 이 사회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고 말했다. 영조는, 그의 근원적인 불행이 이선을 통한 인정 외에는 다른 출구가 없었던 삶을 살고 있던 것이다. 그야말로 ‘헬조선’이다.

부자간의 갈등은 대리청정을 하며 정점에 이른다. 사도세자는 15세부터 대리청정을 시작해 약 14년 동안(1749~1762) 대리청정을 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영화에서는 극단적인 몇 장면만으로 대리청정을 겪은 이선의 분노를 나타내지만, 실제로는 1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영조와 이선의 골이 깊어진 것이다.

이선은 미쳐버린다. 이선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가 기록한 ‘한중록’은 이선이 의대증(衣帶症)을 앓고 있었다고 말한다. 한중록에 따르면 이선은 옷이 살에 닿으면 발작과 함께 옷을 입힌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옷을 입으면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선은 옷을 입혀준 후궁 빙애를 죽도로 때려죽이고 빙애가 낳은 자신의 아들까지 때려 기절시키고 연못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옷을 입혀주는 신하 하나를 죽인 장면으로 끝나지만 한중록은 이선이 죽인 사람의 수는 100여명이라고 주장한다.

한중록이 혜경 궁씨 개인의 입장이며 혹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가해자의 입장이라 왜곡됐다는 지적도 있다. 영화 '사도'의 검수에 참여한 서울대 국문과 정병설 교수에 따르면 한중록 외에도 사도세자가 정신질환이 있다는 것이 기록돼있다고 주장한다. 영조실록 1762년 5월 24일의 기록과 여러 기록은 이선에 대해 '광증', '울화증', '병'이라는 단어로 묘사하고 있다.

이들이 평범한 집안이었다면 이렇게 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부모와 의절하거나 가출하는 선택지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조선왕조라는 집안은 선택지가 없는 집안이었다. 영화 속 영조의 대사, “이것은 국가의 일이 아니라 집안일이다”는 그래서 틀렸다. 집안일이 국가의 일이 되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선택지가 없는 자식은 미쳐버렸다.

   
영화 '사도'의 장면. 한중록에는 사도세자가 옷입기를 어려워하는 일종의 정신질환을 갖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진=영화 '사도' 스틸컷 
 

이선의 미침은 ‘개천에서 난 용’, 영조의 기회비용이다. 강준만 교수는 책 ‘개천에서 용나면 안 된다’에서 “중요한 것은 개천에서 용나는 모델의 사회적 기회비용이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책에서 “이 모델은 개천의 모든 자원, 특히 심리적 자원을 탕진하게 한다”며 “우리가 사는 곳은 외로운 분자들의 나라로 전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선이 더 뛰어난 용이 돼 자신의 개천 출신까지 지워주길 바랬던 영조는 자식이 바랐던 ‘따듯한 눈길 한 번’주지 않은 채 스스로와 자식을 외로운 분자로 만들었다.

미치게 만든 자와 미쳐버린 자. 전자의 잘못이 더 큰 것은 명백하다. 물론 누군가는 부모에게 과도한 기대를 받았다고, 혹은 미움을 받았다고 이상행동을 벌인 이선을 탓할 수도 있겠다. 부모에게 미움 받았다고 해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런 반론을 막기 위해 영화 ‘사도’는 더 적극적으로 이선의 광기를 보여줄 수 있는 한중록의 기록을 드러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용이 돼 부모세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 그 외의 선택지는 없음. 지금 한국 사회는 18세기 왕조에서 젊은이가 강요받았던 환경과 같을 지도 모른다. 남은 선택지가 ‘미침’ 뿐인 환경 말이다. 영화 ‘사도’에서 실제 이선보다 영화 속 이선의 광기를 절제되게 그린 것은 이선으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의 마음에 많은 이가 공감이 갈 수 있도록 만든 장치는 아니었을까.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悼). ‘헬조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생각하면 슬퍼지는 청년세대에게 모두 부여된 호칭은 아닐까.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