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모두가 외면했던 ‘우리 안의 지옥’
형제복지원, 모두가 외면했던 ‘우리 안의 지옥’
27년 만에 제정된 특별법 1년째 표류… 정부·여당 “공론화 과정 더 필요”

아름다운 단어들에 속았다. ‘형제’, ‘복지’, ‘사회정화’.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은 사회정화사업에 힘쓴 공로로 국가로부터 두 차례나 훈장을 받았다.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 박 원장이 구속되자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 말이다. 

‘형제’라는 말의 이미지가 나빠졌다. ‘느헤미야’(여호와에게 위로받음), ‘실로암’(소경이 눈을 치유 받은 연못). 성서에 나온 이런 고상한 단어들이 가해자들을 위해 사용됐다. 형제복지원은 재육원, 욥의 마을 등으로 이름을 바꿔오다 지난 2014년 ‘실로암의 집’이라는 중증 장애인 시설을 운영하는 느헤미야법인으로 이름을 바꿨다. 박 원장 일가는 지난해 느헤미야를 매각해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형제복지원, 힘 없는 자를 잡아 부랑자를 만든 사건
형제복지원의 후원자는 든든한 권력자?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내무부 훈령 제410호에 근거해 부랑자를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장애인, 고아 뿐 아니라 일반시민 등을 불법으로 납치·감금해 강제노역, 구타, 성폭행, 암매장한 사건이다. 드러난 사망자만 513명, 감금된 사람은 3500여명이었다. 이들은 1987년 형제복지원에서 가진 것 없이 풀려나 진짜 ‘부랑자’가 됐다.

   
▲ 형제복지원 불법감금은 부랑인 선도를 명목으로 역이나 길거리에서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들을 수용하도록 하는 내무부 훈령에 따라 자행된 사건이다. 사진=형제복지원사건진실규명을 위한대책위원회 제공
 

1987년 1월 박 원장 등 형제복지원 직원 5명이 구속되면서 실상이 알려지는 듯 했다. 당시 수사를 시작했던 김용원 검사는 검찰, 부산시, 청와대까지 나서 수사를 압박했다고 밝혔다. 당시 수사를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은 부산지검장은 박희태 새누리당 상임고문이었고, 김주호 당시 부산시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였다. 

구속 당시 박 원장의 변호사는 1986년에 대법관에서 퇴임한 전상석 변호사였다. 그는 훗날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96년 내란죄 등으로 기소됐을 때 변호를 맡아 제5공화국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작업(강제노역)이 부산시장의 승인아래 추진됐고, 야간도주 방지를 위해 수용자들을 철창 안에서 자도록 한 것이라며 박 원장을 특수감금죄에서 건져준 당시 김용준 대법관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 시절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던 인물이다. 

1987년 박 원장이 구속되면서 형제복지원에 감금됐던 이들은 해방됐지만 독립하지 못했다. 일한 대가를 받지 못한 채 사회로 쏟아진 이들은 고아원을 전전하거나 정신병원에 갇혔다. 같은 시기에 있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꿨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억울한 죽음을 알릴 대학생과 각계 인사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을까? 부랑자들은 민주화세력에게도 불편한 존재였을까? 부랑자들의 인권 문제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언론도 도와준 박인근 원장의 부활

박 원장은 여러 은인들(?)의 도움으로 2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친 뒤 다시 사회복지시설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힘 있는 사람의 말은 쉽게 유통됐다. 1991년 3월 12일자 경향신문은 박 원장과 인터뷰 <“파렴치범 지탄엔 가슴아파”>를 보도했다. 박 원장이 잘못은 했지만 진정성은 있었다고 전하는 기사였다. 

경향신문은 당시 “스스로 양아치들을 돌봤던 박씨는 자비로 원사를 지어 본격적으로 양아치 보호 일을 하다…”라거나 “박씨가 구속될 당시 원생들의 자활활동으로 저축된 돈이 4억4000만원에 이르렀으며 퇴원자들에겐 장래의 생활밑천으로 대주기도 했었다”는 박 원장의 주장을 실었다. 박 원장에 대한 미화는 이전에도 있었다. MBC드라마 ‘탄생’(1982), ‘갈채’(1983)와 보건사회부에서 제작한 홍보영상 ‘종점에서 시발점으로’(1981)는 부랑아의 자활을 돕는 단체로 형제복지원을 그렸다. 

   
▲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에 따르면 부랑자들을 잡아서 자활시키는 모습을 외부에 '보여주기'위한 행사들도 많았다. 사진=형제복지원사건진실규명을 위한대책위원회 제공
 

세상은 끔찍한 사건이라고 기억해주지 않았다. 끊임없이 말하는 사람이 있는 일을 기억했다. “(장애인 80여명 등과) 함께 평생을 헌신하고 있는 박인근 장로와 임성순 권사(실로암교회) 부부는 장애아들이 먹고 마시고, 생활하는 모든 것에 아낌이 없다”(2004년 5월 22일자 한국기독신문). “학교 부적응 학생들을 교육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에도 이사장 박인근 장로 및 학교장, 교사들이 열정을 쏟고 있다”(2010년 12월 27일자 교회복음신문). 

27년만에 처음 나온 생존자들의 외침

형제복지원에서는 ‘띵본다’는 표현이 있다. 망본다는 뜻이다. 구타와 감시가 일상인 그곳에서 주체적으로 행동하기 보다는 눈치 보는 게 일상이다. 형제복지원 생존 피해자 한종선씨가 자신의 얘기를 꺼내놓기까지 4반세기가 걸렸다. 한씨는 2008년 광우병 촛불 집회 이후 ‘내 문제해결을 위해 스스로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생존 피해자들이 형제복지원에서 풀려났을 때 검찰 수사와 언론보도가 있었고, 수사과정에 외압이 있었으며 박 원장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여전히 그 가족과 측근들이 사회복지법인을 운영한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되지 않은 일이다. 2012년 5월. 한씨는 국회 앞에 1인 시위를 시작했다. 27년 만에 나온 첫 외침이다.

같은 해 11월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도움으로 피해증언집 ‘살아남은 아이’가 발간됐고, 국회의 도움으로 피해자 증언대회도 열렸다. 지난해 7월에는 새정치민주연합 진선미 의원의 대표발의로 ‘내무부훈령에 의한 형제복지원 강제수용 등 피해사건의 진상 및 국가책임 규명 등에 관한 법률안’(특별법)도 마련됐다.

특별법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 12월부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1년간 신청을 받는 동안에도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은 사회적응을 못하고 있거나 적절한 조력자의 도움을 얻지 못해 신청을 하지 못했다.    

반복되는 형제복지원, 다른 사건에 묻히는 형제복지원

그동안 형제복지원과 비슷한 사건은 반복됐다. 1989년 대전종합복지원에서 입소 3개월이 안 된 원생들이 각종 질환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고, 1991년에는 대전 신생원 원생에 대한 강제노역, 구타, 의문사 사건이 터졌다. 1998년에는 노숙자를 불법감금한 양지마을 사건, 2000년대에는 소설과 영화로도 만들어진 도가니 사건까지 이어졌다. 

세월호 참사처럼 대한민국 사회 한가운데를 잘라낸 듯 들여다 볼 수 있는 사건이 있다. 이를 대하는 지도자들의 태도가 그 사회의 수준이다. 지난해 7월 특별법은 국회 의안과에 의해 보건복지위로 배정됐다. 복지위에서 다루겠다는 것은 사회복지 시설만의 문제로 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내무부(안행부의 전신) 훈령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므로 안행위에서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박인근 원장도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형제복지원이 ‘국가의 지시와 법’대로 진행된 일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형제복지원이 세상에 알려진 직후 해당 내무부 훈령을 삭제했다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 꼴이라는 게 피해자들의 주장이다. 

   
▲ 국가기록원 기록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은 매년 20여억원의 국고 지원을 받는 한편 원생들을 무상으로 노역시키고 부실한 식사를 제공해 막대한 금액을 착복했다. 사진=형제복지원사건진실규명을 위한대책위원회 제공
 

국가책임 전제하지 말자는 안행부

안행부는 국가의 책임을 전제하는 특별법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냈다. 지난해 11월12일 안행부 관계자는 안전행정소위에서 “국가의 불법을 먼저 전제해 보상을 규정하는 것은 수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공론화 과정도 필요하고 법안 수정도 필요하다”며 “진선미 의원실과 협의를 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미 1987년 신민당 조사보고서에서 국가의 책임이 드러났고, 피해자들은 ‘국가가 관리를 소홀하게 한 것을 넘어 국가가 자행한 범죄’라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안행부는 선을 긋는 모습이다. 안행부 관계자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지난해 안전행정소위 이후)구체적으로 논의된 사항은 없고 이제 여야가 국회에서 처리할 문제”라고 말했다. 국회에서는 그간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관심없는 국회 “덜렁 특별법 만드나”

지난해 11월12일 국회 안행위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새누리당 이철우 의원이 이 사건에 대해 묻는다. “형제복지원이 오래된 사건인데, 과거에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이걸 안 다뤘나?” ‘그렇다’는 대답에 다시 물었다. “이 같은 사건이 많을 텐데 덜렁 특별법 만들어 놓으면 다른 사건들도 우후죽순 나올 거 아니냐. 공청회 했나?” 안행부 입장처럼 공론화를 주장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진선미 의원이 설명했다. “특별법안을 피해자와 대책위하고 함께 만들었다. 작년(2013년) 국감 때 언급해 관계부처 회의도 했고.” 이 의원이 다시 물었다. “피해자들 단체나 이런 게 지금 있나? 나는 처음 들으니까 그런데 그동안 숙성 과정을 다 거쳤나?” 

새누리당 윤영석 의원도 질문을 던졌다. “손해배상이나 이런 건 전혀 없었나?” 새누리당 의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대상자가 몇 명이냐”, “생존자는 몇 명이냐”, “유사한 사건은 없느냐” 
새정치민주연합 임수경 의원이 나섰다. “비슷한 사례들은 진실화해위에서 이미 상당부분 조사가 됐는데 형제복지원은 빠져있었다. 만약 비슷한 사례가 또 나오면 진실화해위 2기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윤영석 의원이 다시 물었다. “진실화해위가 이런 거였나?” 야당 의원들이 대답했다. “예” “인권침해사건” 진실화해위에 대해서도 몰랐던 국민의 대표들에게 형제복지원 특별법은 감이 잡히지 않는 얘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난해 12월9일 안행위 회의. 
진선미 의원과 새정치민주연합 정청래 의원이 법을 빨리 통과시켜야 한다며 공청회를 부탁하자 진영 안행위원장(새누리당)은 “기획보도를 다 스크랩해서 보고 있다”며 여당 간사 조원진 의원과 협의해보자고 말했다. 특별법은 해를 넘겼다. 

   
▲ 형제복지원 전경. 사진=형제복지원사건진실규명을 위한대책위원회 제공
 

올해 4월17일 안행위 회의.
진선미 의원이 “지난해 회의들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깊게 공감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데 여러 가지 현안에 밀려 4월로 넘어왔으니 4월안에는 공청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진영 위원장은 “조원진 간사와 잠깐 얘기를 했는데 다음에 하면 좋겠다고 말을 해서…”라며 “그냥 다음 6월쯤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결국 진선미 의원은 4월28일 안행위 회의에서 “6월에는 ‘반드시 처리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해달라”고 말하자 진영 위원장은 “6월 국회에서 공청회도 진행하고 입법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이날 생존 피해자 11명은 형제복지원에 잡혀가던 그날처럼 국회 앞에서 머리를 밀었다.  

우연일까? 형제복지원은 1987년부터 큰 사건들에 밀려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특별법은 피해자들의 보상과 의료지원,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들을 마련한 법이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상반기엔 공무원 연금 개혁 등 여러 현안에 밀려 피해자들은 6월 국회에서 열릴 공청회만 기다리고 있다.

부족한 특별법, 그래도 필요한 특별법.

특별법이 통과되더라도 피해자들의 울분이 온전히 풀리긴 어렵다. 공소시효가 만료돼 박 원장 일가를 처벌할 방법은 없지만 국가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박 원장 일가에 구상권을 청구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사회복지시설에 관한 법률의 개정도 필요하다. 재발방지를 위해서다. 

진선미 의원실 관계자는 “6월에는 꼭 공청회가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조원진 의원실 관계자는 “여야 협의를 통해 진행하겠다”고 했다. 생존 피해자들은 또 어떤 이슈에 형제복지원 사건이 묻힐지 불안하다. 안행위 야당 간사인 정청래 의원의 당직이 정지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혹시 야당의 발언권이 약해지지 않을까 생존피해자들은 또 다시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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