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체이탈’ ‘물타기’. 최근 한국과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의 언행이 이랬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하며 성완종 수사대상에서 자신은 빼놓는 유체이탈 화법을 선보였다. 그는 성완종 리스트의 쟁점을 ‘정치자금 수수’에서 ‘사면’으로 유도하며 야권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미국을 방문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위안부 문제를 제 3자의 일처럼 묘사했다. 아베 총리는 위안부에 대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지만 가해자인 자국에 대한 책임은 회피했다. 홀로코스트 박물관 방문 때는 일본판 쉰들러를 부각시켰다. 전범 국가의 책임을 덮으려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다음은 29일자 아침신문 1면 머리기사다. 대부분의 신문이 전날 있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메시지를 머리기사로 썼다.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박 대통령의 메시지에 다소 비판적인 제목을 뽑았다.반면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박 대통령의 발언을 그대로 전달했다.

경향신문 <“성완종 사면이 문제”라는 박 대통령>
한겨레 <선거 하루 전날... 박 대통령의 ‘정략적 메시지’>
한국일보 <“성 특사 규명” 박 대통령의 역공>
조선일보 <박 대통령 “성 두차례 사면 진실 밝혀야”>
중앙일보 <“성완종 사면 진실 밝혀라” 박 대통령 역공>
동아일보 <“과거의 부패도 척결 성사면 진실 밝혀야”>
국민일보 <미일 “힘에 의한 일방적 현상 변경 반대”... 중·러 겨냥>
서울신문 <박 대통령 “성 특사 의혹 밝혀라” 정면승부>
세계일보 <“성 특사 진실규명” vs “대통령이 몸통”>

 

참 나쁜 대통령

“참 나쁜 대통령이다. 국민이 불행하다. 대통령 눈에는 선거밖에 안 보이느냐?” 2007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개헌 발언을 하자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선거를 앞두고 정략적인 이벤트를 한다며 비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재보궐선거를 하루 앞둔 지난 28일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했다. 김성우 홍보수석의 입을 통해서다. 대통령은 이번에도 '유체이탈화법'을 구사했다. '사과'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 사면 수사를 가이드라인으로 내세우며 물타기를 시도했다. 선거를 향한 노림수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박 대통령은 “사건의 진위 여부는 엄정한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하고, 검찰이 이번 기회에 반드시 국민들의 의혹 사항을 밝혀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오르내린 인사들은 홍준표 경남도지사를 제외하면 모두 친박 실세들이다. 더욱이 성완종 전 경남그룹 회장이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에게 돈을 줬다고 주장하며 대선자금용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박 대통령도 의혹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황인데도 이를 외면한 것이다.

   
▲ 29일자 한겨레.
 

경향신문은 “누가 뭐래도 이번 사건의 본질은 국무총리와 전현직 비서실장 등 정권실세들이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의혹”이라며 “자신과 자신의 측근들이 연루된 데 대해 국민에게 고개부터 숙였어야 하는데도 입을 다물었다”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은 “성완종씨에 대한 연이은 사면은 국민도 납득하기 어렵고 법치의 훼손과 궁극적으로 나라 경제도 어지럽히면서, 결국 오늘날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어주게 되었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때 이뤄진 성 전 회장의 ‘사면’을 쟁점으로 부각시키며 수사 가이드라인을 그은 것이다. 한겨레는 “이 문제를 파고들면 ‘친박’을 겨냥한 칼날을 ‘친이’와 ‘친노’쪽으로 돌릴 수 있다”면서 “신의 한수에 가깝다”고 보도했다.

이날 박 대통령의 메시지가 발표된 시점을 두고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재보궐선거를 하루 앞두고 메시지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한겨레는 “외부 활동이 어려울 정도로 안정이 필요하다는 박 대통령이 굳이 이날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한 것은 결국 29일 진행되는 재보선을 의식한 탓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대통령으로서 선거중립의무를 위반했다는 비판도 있다. 경향신문은 “사실상 여당을 편들며 다시 ‘선거의 여왕’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박 대통령은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이는 중앙과 동아가 지적할 정도였다. 동아는 사설에서 “국민이 기대한 것은 성완종 파문과 관련해 이완구 국무총리가 사퇴하고 친박 핵심 인사들까지 연루된 데 대한 사과였다”고 밝혔다. 중앙 역시 “(박 대통령이) 보다 직접적으로 국민에게 사과해야 했다”면서 “박 대통령에게 지금 필요한 건 분명한 대국민 사과와 ‘필요하면 나까지 조사하라’는 엄정한 수사의지"라고 밝혔다.

   
▲ 29일자 종합일간지 사설 비교. 조선일보만 여야의 공동책임을 묻고 있다.
 

 

조선의 18번, ‘노무현’

조선은 대통령의 ‘물타기’전략을 이어 받아 성완종 리스트 정국을 여야의 공동책임으로 몰아갔다. 이 신문은 “국민 입장에서는 박 대통령이나 여야 모두가 머리를 조아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도리어 대형 정쟁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조선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지난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캠프의 요구로 3억 원의 선거자금을 건넨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 기사는 기사로서 ‘가치’가 없어 보인다. 10년도 더 지난 2004년 검찰수사에서 밝혀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일로 2002년 대선 당시 민주당 유세연수본부장이었던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이 처벌을 받기도 했다.

노무현 캠프 측에서 2억 원을 요청했는데 요청한 금액보다 액수가 많은 3억 원을 줬다는 점이 새로운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기사 리드에서 부각시킨 사실은 ‘3억 원의 선거자금을 건넨 것으로 밝혀졌다’다. 수사까지 끝난 사안을 두고 마치 뇌물을 받은 사실이 새로 밝혀진 것처럼 왜곡된 인식을 독자에게 심어줄 소지가 있다. 더욱이 재보선 당일에 말이다.

한국일보 역시 해당 사안을 보도했다. 그러나 이 신문은 조선과 달리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캠프에는 이보다 더 많은 금액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면서 당시 한나라당이 성 전 회장에게 더 많은 정치자금을 받았음을 시사했다.

   
▲ 성완종 리스트 관련 언론보도양상. 조선일보의 경우 '참여정부'의 책임을 묻는 물타기 보도가 다른 언론에 비해 유독 많았다. 민주언론시민연합 자료.
 

이 같은 보도양상은 성완종리스트 보도 전반에 걸쳐 나타나기도 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 지난 10일부터 20일까지 조선·중앙·동아·한겨레·경향의 성완종 리스트 보도를 분석한 결과 ‘야당 책임론’을 가장 부각시킨 언론은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는 관련 보도 중 야당 책임론을 거론한 기사가 17건인 반면 박근혜 대통령 대선자금에 초점을 맞춘 기사는 2건 뿐이었다. 민언련은 “(조선이) 동아와 중앙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이번 이슈를 왜곡해서 끌고 갔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 29일자 조선일보 기사.
 

안갯속 재보선, 파장은?

4월 29일 재보궐선거가 오전 6시부터 진행된다. 국회의원 4석을 뽑는 작은 선거지만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정국에 미치는 영향은 작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경향은 “박근혜 정부 국정운영에 대한 심판선거로서의 의미가 커졌다”면서 “야당이 승리할 경우 국정쇄신 요구가 거세지면서 박근혜 정부는 조기 레임덕에 직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중앙은 “(여당이) 선거결과가 좋으면 공무원 연금개혁 등 국정과제 추진이 탄력을 받지만, 그 반대라면 박근혜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이 현실화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이번 선거는 새정치민주연합에게 어려운 선거가 될 가능성이 크다. 국회의원 선거구는 서울 관악을, 인천 서·강화을, 광주 서을, 경기 성남 중원 등 국회의원 선거구 4곳이다. 이 중 3곳이 통합진보당 의원의 지역구였지만 이 자리를 모두 야권이 차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특히 야권강세지역인 서울 관악 을에서 어부지리로 여당에게 의석을 내줄 가능성도 있다.

새정치연합의 심장부인 광주마저도 무소속 천정배 후보에게 내줄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문재인호가 타격을 입을 전망이다. 한겨레는 “광주 서을을 천정배 후보에게 내줄 경우 맞게 되는 호남의 동요와 리더십의 부재는 치명적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천정배의 광주 입성이 야권재편의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한국은 천정배 후보가 광주에서 승리를 거둘 경우 “야권 재편 요구가 터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유체이탈’ ‘물타기’ 누구 꼭 닮은 아베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유체이탈’ 화법과 ‘물타기’를 선보인 때,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역시 같은 식의 언행을 했다.

아베 총리는 27일(현지시간) 미국에서 전범국가였던 과거를 덮는 물타기를 선보였다. 아베 총리는 워싱턴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일본판 쉰들러인 스기하라 지우네의 도움을 받아 나치 치하에서 벗어난 레오 멜라매드와 동행했다. 스기하라는 2차 세계대전 때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 영사대리로 근무하며 유대인 2000여명에게 입국 비자를 내준 인물이다.

아베 총리는 “일본 국민으로서 스기하라의 업적에 자부심을 느낀다”면서 “한 사람의 용기있는 행동이 수천명의 생명을 구했다”고 말했다. 이 발언에 대해 한국은 “전범국가 지도자로서의 자신을 돌아보는 진지한 메시지는 전혀 내놓지 않아, 과거사 물타기 행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루 앞서 아베 총리는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강연에서 “왜 일본 정부는 아직도 위안부 수십만명을 강제 동원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느냐”는 최민우군의 질문에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라면 인신매매에 희생당해, 형용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겪은 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조선은 “인신매매의 주체가 누구였는지는 밝히지 않았다”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나 사과의 표현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 29일자 한국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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