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탕 찬반 논쟁,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보신탕 찬반 논쟁,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서평] 식탁 위의 한국사/ 주영하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조선시대에는 보신탕을 개장이라 불렀다. 한자어로는 구장(狗醬)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 고유의 음식이지만 보신탕은 불행히도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조선시대 양반들 사이에도 개고기를 먹는 일을 두고 찬반이 갈렸었다. 
 
원래 조선시대에는 삼복에 개장을 먹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유득공(1749~1807)은 서울 풍속을 적은 <경도잡지>에서 개장을 먹고 땀을 내면 더위를 물리치고 허한 기운을 보충할 수 있다고 했다. 홍석모(1781~1850)도 <동국세시기>에서 개장을 “시장에서도 많이 판다”고 전했다. 
 
하지만 영조 때 문신이자 경상도 암행어사로 이름을 날린 이종성(1692~1759)은 개장 먹는 습관을 반대했다. 경기도 장단 출신이었던 이종성은 개장을 사람이 먹을 음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선시대에도 개는 한편으로는 애완의 대상이었다. 
 
조선을 찾은 외국인들의 눈에도 개장은 탐탁지 않은 음식이었다. 프랑스 출신 가톨릭 선교사 클로드 샤를 달레(1829~1878)는 “조선에서는 그것이 가장 훌륭한 요리의 하나”라고 했지만 대부분은 야만적으로 봤다. 일본인들 역시 개고기 식용을 못마땅하게 봤다. 식민지 말기엔 1942년 개장 대신 ‘보신탕’이란 말이 본격 등장했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 아래 기독교적 세계관이 온 나라의 주요 기관에 퍼지면서 개장국이란 말이 사라지고 보신탕 일색이 됐다. 여전히 개고기는 법적으로 식품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고 애완과 식용 사이에서 헤매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제 모습 자체를 바꾼 음식들도 있다. 당면과 볶은 고기, 버섯, 각종 야채를 양조간장에 버물려 만드는 잡채엔 원래 당면이 들어가지 않았다.  장계향이 쓴 <음식디미방>에는 “외채(오이채)·무우·댓무우(무의 한 종류)·진이(참버섯)·성이(석이버섯)·표고·송이·녹두기름(숙주나물)은 생으로 하고, 도랏(도라지)·게묵(거여목)·건박고자기(마른 박고지)·나이(냉이)·미나리·파·둘흡(두릅)·고사리·쉬엄초(승검초)·동화(동아)·가지와 생치(날꿩고기)는 삶아 실실이 찢어놓으라…”라고 요리법을 소개하고 있다. 
 
원래 당면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중국이 원산지이다. 만주족이 아닌 한족의 음식이란 의미에서 ‘호(胡)’가 아닌 ‘당(唐)’이 붙었다. 중국에서는 당면을 ‘펀탸오’라고 부른다. 이 펀탸오가 조선으로 들어온 시기는 19세기 말이다. 1900년대 이후 중국요리옥이 형성했는데 이때 조선인 손님들이 즐겨 먹었던 메뉴가 탕수육·양장피·잡채였다고 한다. 이 이후 우리가 먹는 잡채에 당면이 섞이기 시작했다. 방신영의 1921년판 <조선요리제법>에는 “당면을 물에 불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리고 원래 잡채에는 간장이 들어가지 않았다. <음식디미방>에서는 온갖 재료를 밀가루로 만든 즙에 무친 뒤 붉은 색을 들었고, <규곤요람·음식록>에는 갖은 재료를 볶은 다음에 겨자즙으로 무친다고 돼 있다. 하지만 <조선요리제법>에는 간장으로 간을 맞추라고 쓰여 있고, 경성 동덕여고보 가정과 교사인 송금선은 일본장도 좋다고 했다. 즉, 당면잡채는 개화 이후 들어온 중국·일본 음식과 만나 재탄생된 삼국 합작품이다.  
 
당면의 공습은 ‘순대’로도 이어졌다. 원래 돼지 순대는 고급음식이었다. 이 음식의 요리법이 담긴 가장 오래된 문헌 <시의전서·음식방문>에는 “창자를 뒤집어 정히 빨아 숙주·미나리·무우 데쳐 배차김치(배추김치)를 같이 다져 두부 섞어 총(파)·강(생강)·마날(마늘) 많이 다져 넣어 깨소곰·기름·고초가로·호초가로 각색 양념 많이 섞어 피와 한데 주물러 창자에 넣고 부리 동여 삶아 쓰라”고 돼 있다. 
 
상당히 손이 많이 가는 돼지순대는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순대 속 재료가 당면으로 바뀌면서 시장에서 사먹을 수 있는 값싼 음식으로 재탄생했다. 맛이 얼마나 좋았으면 반찬거리 사러 온 주부들이 장은 보지 않고 외상으로 돼지순대를 사먹었다고 한다. 
 
추운 겨울이 되면 찾게 되는 설렁탕은 미국의 원조 정책으로 제 모습을 바꾼 음식이다. 설렁탕은 쇠머리·사골·도가니를 비롯해 뼈·사태고기·양지머리·내장 등을 넣고 10시간 넘게 푹 끓인 음식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설렁탕에는 미국에서 무상으로 들어온 밀가루로 만든 국수가 들어가게 됐다. 
 
그러면서 설렁탕은 원래의 진면목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설렁탕 국물이 진한 유백색이 아니면 제대로 된 설렁탕으로 쳐주지 않았다. 어떤 설렁탕집에서는 생산단가를 낮추기 위해 미국에서 원조로 들어온 분유를 넣기도 했다.  
 
설렁탕에 대해 한 가지 이야기만 더하자면, 설렁탕에는 백정들의 한이 담겨져 있다. 천민었던 백정들은 근대 도시 중심으로 정육점을 운영하면서 정육점에서 나온 부산물로 설렁탕집을 함께 운영했다. 당시 양반들은 설렁탕의 맛에 반해버렸으나, 천민과 섞여 먹는 것을 꺼려해 배달시켜 먹었다고 한다.

당시 설렁탕집은 형평사를 조직해 천민해방운동을 벌인 백정들과 깊은 연관이 있기도 했다. 형평사는 진주 백정 이학찬의 아들이 다른 학부형과 학교 측의 반대로 보통학교 입학이 좌절되자, 이에 격분한 백정들이 1923년 5월 형평, 즉 평등을 실현하고자 각 지방 대표 100여명과 회원 500여 명을 중심으로 조직한 단체이다.  
 
백정들이 운영하던 설렁탕집에서는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천민으로 취급받던 옹기 장인이 만든 뚝배기에 설렁탕을 담아냈다. 뚝배기에 담긴 설렁탕 한 그릇엔 평등을 바란 그들의 묵직한 뜻이 담겨 있다. 
 
   
▲ 식탁 위의 한국사
 
책 <식탁위의 한국사>는 음식을 문화와 인문학, 역사학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음식인문학자 주영하가 거시사와 미시사를 넘나들면서 지난 100년간 한국 음식의 담론을 펼친 연구서다. 주영하는 “이 책에서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음식 메뉴들의 본래 모습과 진화 과정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다”면서 “그것은 한국인들이 20세기를 한반도에서 살면서 경험한 세계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책에 따르면 미국의 원조정책은 한국인들의 밥상을 바꿔놓았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 정부는 한국에 자국의 농부들이 과잉생산한 농산물을 강제로 사도록 강요했다. 원조를 제공받는 국가가 원조액 가운데 일정액을 미국 잉여농산물 구매에 쓰도록 규정한 조항이 상호안전보장법에 추가됐다.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들어오면서 밀가루·설탕·면직물의 삼백산업이 한국 경제의 중심축이 됐다. 1963년 인스턴트 라면이, 69년에는 인스턴트 칼국수가 상품으로 출시됐다. 밀가루 음식이 유행하면서 1980년대 후반에 바지락칼국수라는 새로운 메뉴가 개발됐다. 
 
2013년 3월29일 농촌진흥청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2012년 한국의 밀 자급률은 2% 미만으로 국내 식용 밀 수입량은 연간 240만톤에 달하며, 이중 약 60%는 국수용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현대사의 거센 물결이 우리의 밥상 지도를 완전히 바꿔 놓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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