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의 반대 운동으로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오른 밀양 송전탑 분쟁 만큼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포천막걸리’로 유명한 경기도 포천 일동면에서도 한국전력의 송전탑 분쟁은 10년째 지역 주민들을 괴롭히는 화근이 되고 있다. 
 
“제 목표는 오직 하나에요. 송전탑이 동네로 안 지나가게 하는 거요. 그게 최선이에요. 설령 우리가 재판에서 져서 송전탑이 지나가도 동네 사람들이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최악의 시나리오는 송전탑이 지나가고 동네가 쪼개지는 거에요.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면 최악의 상황으로 가고 있어요”

한국전력공사가 수도권에 안정적인 전기 공급을 목적으로 지난 2003년부터 장장 10년 동안 추진하는 신포천~신가평 345kV 송전선로(65㎞) 건설 사업에 반대했던 한 주민은 이제 동네사람에 대한 신뢰조차 사라졌다고 털어놨다.

   
일동면 가산5리에서 진행되는 한전 송전선로 건설사업 안내 표지판
©강성원 기자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주민들은 한전을 상대로 기나긴 송전탑 반대 투쟁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대법원이 ‘절차적 하자’를 지적하며 사업승인 취소 결정을 했음에도 한전은 이를 무시하고 송전탑 건설을 강행했다. 위법한 사항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보완이 가능하고 충분히 보상해 주면 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한전이 재개한 사업승인 신청 절차 역시 주민들의 의사는 철저히 무시했다. 주민 공청회를 하겠다고 공고를 내놓고 공청회 전에 사업 승인 신청을 먼저 했다. 게다가 주민 반대를 핑계로 공청회도 생략했다. 한전의 밀어붙이기식 공사 강행과 정부의 편법 행정이 마을 주민들을 좌절케 만들었다. 한전의 거액 보상금 제안에 합의한 주민들은 결국 송전탑 건설 반대 주민들과 등지고 말았다. 국민을 위한다는 국책사업이 평화로운 시골마을을 비극으로 이끌고 있다.

일동면 가산5리 주민들은 작년 9월 이후 송전탑 건설을 둘러싸고 찬반으로 쪼개졌다. 송전선로가 직접 지나가는 곳에 살고 있는 일부 주민들은 극렬한 반대 입장이다. 반면 송전탑 예정지에서 조금 떨어져 사는 주민들은 입장이 유보적이거나 찬성 쪽으로 돌아섰다. 몇몇 찬성 주민들은 한전 측에서 수억 원의 보상금으로 마을 경로당 등 주민 편의 시설을 짓자고 노인들을  설득하고 나섰다. 마을 이장 또한 둘 사이를 평화적으로 중재하지 못하고 있어 가산5리 주민 사이에서는 바로 옆에서 시설 하우스를 하는 이웃끼리 서로 인사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근본적인 문제의 발단은 지난 2011년 11월 대법원에서 “일동면을 통과하는 7.8㎞ 구간의 노선을 변경하면서 주민설명회를 통해 의견수렴 절차를 이행하지 않았다”며 “해당 구간에 대한 사업승인 처분은 위법한 것으로 취소한다”고 판결하고 나서다.

한전 측은 대법원의 판결에도 승복하지 않고 당시 지식경제부에 재차 ‘사업 승인’ 신청을 냈다. 한전은 결국 지난해 8월 지경부로부터 사업 승인을 받아냈다. 이 과정에서 환경부 한강유역환경청도 환경영향평가 최종 의견서를 앞서 7월에 지경부에 제출했다.

대법원 판결 이후로 잠잠해질 줄만 알았던 송전선로 건설을 한전이 안정적인 수도권 전력 공급이라는 명분으로 재차 강행하자 마을 주민들은 10년 동안 열심히 싸웠음에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아 심리적으로 지치기 시작했다. 가산5리에서 가장 헌신적으로 반대 운동에 앞장섰던 주민은 ‘박쥐’ 취급을 받게 됐다. 주민들이 찬성과 반대로 갈라져 서로를 헐뜯기 시작하자 마을의 ‘하나 됨’을 바랐던 주민은 양 쪽으로부터 비난 받는 처지가 됐다.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업을 처음부터 반대하며 주민 소송을 이끌었던 한 주민은 “국가가 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국책 사업이라는 미명 하에 법에서 정한 최소한의 절차조차 무시하며 밀어붙이는 이 사업은 동네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라며 “한전이 주민의 삶은 전혀 고려 안 하고 사업 비용과 전력 수급이라는 대의명분, 수도권 전력대란 압박으로 나서고 있어 사법부도 판결에 부담을 느끼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일동면 가산5리 한전 송전선로 건설반대 주민대책위원회가 내 건 현수막
©강성원 기자
 

실제로 주민들을 한전을 상대로 다시 사업승인 취소 소송을 진행 중이지만 이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지난 대법원 판결 때와는 또 다르다. 이명박 정권 말 제주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사업이 환경영향평가가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었더라도 건설 계획은 정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있은 후 일동면 주민들이 낸 집행 정지 소송도 최종 패소했기 때문이다. 사업승인 취소 소송은 아직 1심이 진행 중이지만 주민들이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전을 비롯해 사업승인을 내 준 지경부(현 산업통상자원부), 환경부 관계자들도 절차적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강윤구 산통부 전력산업과 주무관은 23일 미디어오늘과 전화통화에서 “2011년 대법원 취소 판결은 환경영향평가 절차 위반이었기 때문에 절차를 보완하고 다시 사업 신청이 됐다”며 “지경부에서 최종 승인이 날 때는 (절차가)모두 보완 됐고 환경부에서 문제없다고 했다. 승인 나기 전에 공청회 등 주민 의견 수렴도 다 이뤄졌다”고 밝혔다.

김민영 환경부 한강유역환경청 환경평가과 팀장도 “대법원 판결 후 2012년 1월부터 환경평가계획서를 다시 받고 그 해 7월 26일에 최종 의견을 제출했다”며 “동식물성 조사는 이미 2008년에 했던 자료가 있어서 예전 내용에 새로 추가한 부분을 검토 후 일부 빠진 부분에 대해서만 보완 요청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환경영향평가는 절차상 하자만 취소된 거라 전체적으로 조사 내용을 확인한 것은 아니다”며 “작년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공청회 공고를 냈지만 주민이 참여하지 않아 생략공고를 했고 주민 의견 수렴을 다 받을 수 없어서 결과만 요약 제시했다”고 절차적 미흡함을 인정했다.

이에 대해 주민 소송에 참여했던 한 주민은 “대법원 위법 판결이 있었으면 송전 선로를 우회하는 등 이전 노력을 해야 마땅한데 그런 노력도 없고 환경영향평가를 하면서 주민 공청회 제대로 한 번 안 했다”며 “공청회 전에 지경부와 환경부에 모두 참석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지만 바빠서 못 온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그는 “작년 5월 25일 2차 주민공청회 전에 21일 지경부로 사업신청 서류가 이미 들어가 있었다”며 “생략공고는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만 내는 건데 절차적 문제를 지적한 주민반대 때문에 공청회가 안 열렸다는 건 적반하장”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한전 송전선로 사업은 2003년 초부터 수도권 전력 환상망 구축사업으로 추진돼 오다 참여정부 때 대북 중대제안(전력공급)에 따라 대북 송전선로 활용 방침이 결정됐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들어 개성공단 전력 공급 사업이 중단되면서 수도권 전기 공급 사업으로 다시 전환됐다.

   
한국전력공사 송전선로가 지나가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가산5리에서 주민반대대책위원회가 23일 천막 농성을 하고 있다
©강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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