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고지도자와 친인척들의 개인사는 비밀에 싸여있다. 최근 차기 최고지도자 시진핑(習近平,59) 부주석 일가의 재산 내역이 보도됐다. 이와함께 시 부주석의 친인척관계도 관심을 끌고 있다. 아래의 글은 시 부주석의 친인척에 대한 기록을 모은 것이다. 중국은 고위층들의 개인 정보가 극비에 부쳐진다. 언론 통제 등 제한때문에 극히 한정된 정보만 접할 수 있다. 다만 퍼즐 놀이처럼 조각 정보들을 짜맞춘 뒤 진실을 유추해 볼 뿐이다.
아래의 글은 <시진핑 평전>(우밍 지음, 지식의숲 출판) 등 국내외 자료를 참고해 작성했다.<편집자주>

시중쉰은 첫 부인과의 사이에 1남2녀… 두 가족이 베이징에서 함께 자랐고 사이 좋아

시진핑 부주석의 부친 시중쉰(習仲勳,1913-2002)은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전처에 대해서는 개인 정보가 없다. 시중쉰은 전처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뒀다.

이들은 시진핑의 배다른 형 시푸핑(習富平)과 누나 시허핑(習和平) 시첸핑(習乾平)이다. 시진핑은 이들과 함께 베이징에서 자랐고 사이가 좋았다. 시중쉰의 고향이 산시(陝西)성 푸핑(富平)이다. 그래서 첫 아들의 이름을 고향명으로 지었다. 시푸핑은 뒤에 시정닝(習正寧)으로 개명했다. 그뒤 하이난(海南)성 사법청장(司法廳長)을 지냈으나 1998년 사망했다.

시진핑의 큰 누나 시허핑은 문화대혁명(문혁) 기간중 세상을 떴다. 당시 30살이 안된 나이였다. 당시 시진핑은 옌안(延安)에서 생산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방공호를 파다가 편지를 받고는 대성통곡을 했다. 둘째 누나 시첸핑은 어린 시절 고위 간부 자제들을 위한 육영학교(育英學校)에 다녔고 지금도 생존해 있다.

시중쉰은 자녀들이 특권 누리는 것을 경계… 시푸핑의 베이징 전근을 직접 취소시켜

시진핑의 배다른 형 시푸핑(시정닝)은 베이징에서 고위간부 자제들의 학교인 101중학교에 다녔다. 뒤에 중국과학기술대학에 입학해 자동제어를 전공했다. 졸업뒤 산시(陝西) 후현(戶縣) 산골짜기 안에 있는 국방과학연구 부서에 배치돼 13년간 일했다.

시중쉰은 딸아들이 고위간부의 자제라는 이유로 특권을 누리는 것으로 비쳐지는 것을 극히 꺼렸다. 여기에 일화가 있다.

1979년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후 인민해방군 병참학원을 복구하게 되면서 기술전공 인원이 급히 필요했다. 마침 시정닝의 전공이 딱 들어맞았다. 상사가 시중쉰을 의식해 시정닝을 병참학원에 추천하고 전근 수속을 했다. 그러나 시정닝이 예정된 일시에 베이징에 나타나지 않았다. 알고보니 시중쉰이 미리 알고 병참학원이 전근명령을 취소하게 했다. 물론 아들과는 전혀 상의하지 않았다. 시중쉰은 간부의 자제는 솔선해 힘든 곳에서 일해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시정닝은 부친을 이해못했다. 이번은 정상적인 전근으로 특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시중쉰은 산시성 고위층에게 아들을 설득토록 요청했다. 시중쉰은 “내가 업무에 복귀하자마자 아들을 베이징으로 전근시켰다는 말이 나오면 안된다. 그러면 인민들에 대한 당의 위신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시정닝은 뒤에 산시성 조직부 부부장, 청년간부처 처장을 지냈다. 이후 하이난(海南)성 사법청장을 역임했다. 시중쉰은 1978-1980년때 광둥(廣東)성 서기를 지낸 바 있다. 하이난성은 광둥성의 세력범위 안에 있었다. 시정닝은 품격이 시중쉰을 닮았고 사람 됨됨이가 너그러웠다. 그러나 1998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시중쉰 사망보다 4년 전이었다.

두번째 부인 치신은 팔로군 여전사 출신… 시중쉰의 13살 연하로 열렬한 구애끝에 결혼

시중쉰의 두번째 부인은 치신(齊心,1926-)이다. 항일전쟁 기간때 15살의 치신은 베이핑(北平)시 제1여중학교를 다니면서 베이핑이 함락되는 것을 보고 언니 치윈(齊雲)을 따라 산시(陝西) 타이항산(太行山)으로 가서 팔로군(八路軍) 여전사가 됐다.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후에는 옌안(延安) 중앙당교(中央黨校)에서 공부했다.
 

젊고 예쁜 치신은 산시(陝西) 쑤이더사범학교(綏德)와 미즈(米脂)중학교에서 학생신분으로 업무를 봤다. 당시 중국공산당 쑤이더지구위원회 서기이던 시중쉰의 관심을 끌었다. 시중쉰은 자신보다 13살 연하인 이 여학생에게 편지를 써 열렬히 구애했다. 두 사람은 1944년에 결혼했다. 옌안시절에는 시중쉰처럼 ‘혁명의 필요’에 따라 전처를 버리고 젊고 예쁜 여학생과 재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중쉰은 치신과의 사이에 차오차오(橋橋)와 안안(安安) 등 두 딸을 뒀다. 다음으로 두 아들 시진핑(習近平)과 시위안핑(習遠平)을 낳았다.

차오차오는 1949년 3월 1일 옌안 차오얼거우(橋兒溝) 중앙의원에서 태어나 이름을 차오차오(橋橋)로 지었다. 안안은 고도(古都) 시안(西安)에서 태어나 안안(安安)으로 정했다. 당시 시중쉰은 중국공산당 시베이국(西北局) 제2서기를 맡고 있었다.

1953년 시진핑이 태어나고 3개월 뒤 시중쉰은 정무원 비서장으로 승진해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대집사가 됐다. 3년뒤 시진핑의 동생인 시위안핑(習遠平,56)이 태어났다. 베이징을 당시는 베이핑(北平)으로 불렀다. 시진핑 형제는 모두 베이핑(北平)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이름에 모두 핑(平)자가 들어간다.

시중쉰은 딸 차오차오 가장 예뻐해… 1992년부터 부친따라 광둥성 선전에서 생활

시진핑의 누나 차오차오는 시중쉰이 가장 예뻐하던 딸로 1949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중학교에 다니기 전까지 계속 성이 시(習)씨였고 시진핑과 같이 고위 간부 자제들을 위한 81학교에 다녔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는 101중학교의 합격선에 약간 점수가 모자랐다. 시중쉰은 특별히 장남인 시푸핑을 시켜 그녀를 만나 대화를 나눠보도록 했다. 시중쉰은 넌지시 ‘허베이 베이징 중학교’를 가도록 설득했다.
 

차오차오는 101 중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점수 때문에 포기했다. 부친의 뜻에 따라 일반인들이 다니는 ‘허베이 베이징 중학교’를 나왔다.

차오차오는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아버지는 부총리직을 맡고 있었고 신문에 늘 그의 소식이 실렸다. 그리고 ‘시(習)’는 매우 드문 성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가 쉬웠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나의 성을 치(齊)로 바꾸게 했다. 또 집안출신도 ‘혁명간부’에서 ‘직원’으로 바꿨다. “ 그래서 차오차오는 이때부터 치차오차오(齊橋橋)로 불리게 됐다.

문혁중 치차오차오는 내몽고의 생산건설병단(生産建設兵端)에서 생산대 생활을 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다. 시중쉰이 복권되어 광둥(廣東)성에서 서기로 정무를 주관할 때 차오차오를 데리고 가 해방군 제1군의대학(軍醫大學)에 들어가도록 했다. 그녀는 졸업후 무장경찰부대 계통에서 일하다가 1980년대 후반에 홍콩으로 이주했다. 초반에는 홍콩에서 신분을 낮추어 노동자가 되기도 했다. 시중쉰이 만년인 1992년부터 선전에서 장기간 거주할 때 치차오차오는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아버지가 2002년 병으로 세상을 뜨자 그녀는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치차오차오는 그때까지 선전과 홍콩에서 10여년을 보냈다.
그가 벌인 사업에서 부친 시중쉰의 배경이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차오차오 부동산사업가로 베이징에 호화아파트 건설… 남편은 선전지하철과 합자 건설

치차오차오는 이후 홍콩기업가로 변신해 베이징과 선전 등지에서 엄청난 고수익을 올리는 부동산을 개발했다.

치차오차오는 베이징 중민신부동산개발유한공사(北京中民信房地山開發有限公社)를 설립해 이사장이 됐다. 남편 덩자구이(鄧家貴)는 총경리가 되어 부부동업자가 됐다. 그들은 베이징의 서쪽 중심지인 처궁좡대로(車公莊大路)에 호화건물을 세워 ‘관위안’(觀緣)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관위안은 진관위안(錦官苑)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중에는 고급 아파트인 징차오공관(京橋公館)도 들어있었다.

총 대지가 4만6천㎡, 총 건축면적은 18만 5천㎡이다. 동쪽으로는 서부 제2순환도로에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처궁좡대로에 맞닿으며, 서쪽으로는 궈이호텔(國誼賓館)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시즈먼(西直門) 밖의 대로에 인접해 있다. 지하철역과 가까우며 교통이 편리하다. 주변에 12개부처와 당 위원회가 있어 중앙 정치, 경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 부동산업자라면 이런 금싸라기땅을 차지할 수 없을 것임이 분명하다. 치차오차오는 “관위안(觀緣)으로 이름을 지은 이유는 ‘관위안차오(官園橋)’에 따른 것이고, 또다른 이유는 불교의 연(緣)이라는 말에 따른 것이다”라고 해명한 바 있다. 그녀는 스스로 “부동산 학과 출신이 아닌데도 부동산업에 뛰어들었는데 이는 모두 ‘연’(緣)이라는 글자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전 ‘무산 계급 혁명가’의 딸이 ‘연’(緣)을 반복해 강조하는 것을 보면 불교에 귀의한 것으로 보인다.

‘관위안’은 위치가 대단히 좋아 불티나게 팔렸다. 이곳에 사는 사람은 부자 아니면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다. 집값은 최고 ㎡당 인민폐 3만위안(약 540만원)이었다고 한다.

 관위안 부동산을 건설할 당시 사고가 발생했다. 공구 제3현장에서 직경 70㎝, 깊이 4m의 파일 구덩이가 붕괴돼 노동자 한명이 매몰됐다. 이 노동자는 4시간이 지나서 구출됐으나 숨진 뒤였다.

치차오차오의 부동산 사업은 광둥성 선전에서도 가장 좋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2005년 1월 28일 선전지하철위안웨이부동산개발유한공사(深圳市地鐵遠爲房地産開發有限公社)를 정식설립해 제막식을 거행했다. 선전 지하철공사 이사장 천위밍(陳玉明)과 선전시위안웨이실업공사(深圳市遠爲實業公社) 총경리 덩자구이가 개막식에 참석해 연설을 했다. 덩자구이는 치차오차오의 남편으로 선전 지하철과 합작으로 지하철 둥먼(東門) 라오제역(老街驛)을 개발해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은 둥먼 라오제 시다먼(西大門)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치차오차오는 또 칭화대학교 최고경영자(EMBA) 과정을 전공했고, 칭화대학교 최고 경영자 광둥,홍콩,마카오 동창회 현직 명예회장을 맡았다. 동생 시진핑과 같은 칭화대학(淸華大學)출신과 인맥이 닿아 있는 셈이다.

시중쉰이 딸 안안의 특채를 면전에서 거절… 안안은 조용한 성격으로 남편과 사업

치차오차오에 비하면 시진핑의 또다른 누나인 치안안(齊安安)은 비교적 조용하다. 치안안은 외교학원(外交學院)을 졸업해 불어에 능하다. 1983년 왕광잉(王光英)이 광다공사(廣大公司)를 설립할 목적으로 많은 고위 간부의 자제를 영입하면서 의도적으로 치안안을 받아들였다. 시중쉰은 이 말을 듣고는 면전에서 왕광잉의 호의를 거절하고 치안안에게 “너는 시중쉰의 딸이니 조심하고 근신해야 한다”고 훈계했다.

치안안은 이후 국제상보사(國際商報社)에서 일했다. 치안안은 사업에 투신해 베이징친촨전파공사(北京秦川傳播公司)의 부총경리를 맡았다. 이미 호주로 이주했다는 소문도 있다.

시위안핑은 문혁 때문에 정상교육 못받아… ‘논란많은 부호’ 자윈과 호형호제하는 사이

시진핑의 동생 시위안핑은 1956년 11월생이다. 베이징 81초등을 다녔고 문혁때 모친을 따라 허난(河南)성 시화(西華) 황판(黃泛)구 농장의 ‘57간부학교’를 다녔다. 16살에 베이징에 돌아와 기계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시위안핑은 문혁기간동안 고등학교 진학의 권리를 박탈당해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

1977년 인민해방군 뤄양(洛陽)외국어학원에 입학했으며 졸업뒤 군대, 무역방면과 정부부처에서 일했다. 현재 국제에너지절약환경보장협회 회장으로 있다. 홍콩으로 이민을 갔으며 마카오 영주권이 있다.

시위안핑은 저장(浙江)의 부호 자윈(賈雲)과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하다. 자윈은 시위안핑의 초청으로 시중쉰의 집을 방문했을 정도로 관계가 막역했다. 시위안핑은 자윈의 방문당시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보라”는 내용의 사업적인 대화를 나눈 것으로 전해진다. 시진핑은 2002-2007년에 절강성 서기를 지냈다.

자윈이 이사장 겸 총재를 맡고 있는 피카왕국제지주그룹(皮卡王國際控股集團)은 1993년에 설립됐다. 그룹은 영화 텔레비전, 부동산, 상업유통 및 공업을 4대 주요사업으로 하고 휘하에 21개 회사를 보유하고 있으며 자산은 17억위안(약 3060억원)이 넘고 1만3천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피카왕은 <포청천>(包靑天) <신곽원갑>(新霍元甲) <정무영웅>(精武英雄) <천전>(陳眞) 등 뛰어난 TV 드라마의 촬영에 투자해 자윈을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했다. 자윈의 이름도 자주 신문과 텔레비전 오락프로그램에 등장해 ‘스타 사장’으로 불렸다. 2007년 9월 그는 영화 <제1군규>(第一軍規)에서 남자 주인공인 마오쩌둥(毛澤東)의 역을 맡았다.

그는 2007년 3월 둥양(東陽)시 난산(南山)에 건립중이던 문화산업단지 입찰과정에서 담합에 연루돼 지명수배되기도 했다. 또 자윈은 인민대표대회 뇌물선거에 연루돼 둥양시 기율위원회의 조사를 받기도 하는 등 논란속의 인물이다.
 

블룸버그 통신 최근 시진핑 일가 재산공개… 시 부주석이 관여한 흔적은 없어

미국의 블룸버그(彭博) 통신은 2012년 6월 29일 시진핑 국가 부주석 일가가 3억7,600만달러(약 4,300억원)규모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통신은 시 부주석의 누나 치차오차오와 남편 덩자구이가 엄청난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보도했다.

시진핑 일가는 홍콩에서 자산 가치 5,560만 달러(약 636억원)로 추정되는 건물 7개를 소유하고 있으며, 17억달러(약 1조9400억원) 이상의 자산가치가 있는 희토류 취급 회사의 주식 18%와 또다른 기술관련 기업의 지분 2,000만달러(약 228억원)를 보유하고 있다고 통신은 덧붙였다.

베이징의 한 컨설팅 업체에 따르면 시 부주석의 또다른 누나인 치안안의 남편 우룽(吳龍)이 운영하는 통신업체 신유퉁(新郵通)공사는 국유 이동통신사로부터 수억위안 어치의 계약을 따냈다.

블룸버그 통신은 시 부주석이 당 고위층으로 올라가면서 가족들의 사업 영역이 광물 부동산 휴대폰장비업 등으로 크게 확산됐다고 분석했다. 통신은 그러나 시진핑 부주석 자신이 친족의 사업에 유리하도록 관여하거나 친족들이 부정 축재를 한 흔적은 없다고 보도했다.

시 부주석 개인과 부인의 재산 상황은 아직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시 부주석은 틈 날때마다 공직자의 청렴성을 강조하고 유명 민족음악 가수인 부인 펑리위안(彭麗媛)에게도 공식 공연외의 개별행사 참가를 철저히 금지할 정도로 돈과 담을 쌓아왔다. 그는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임명된 2007년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촌티나는 양말이 서방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돼 소개될 정도로 검소한 습관이 몸에 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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