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자본연구-식민지시대편] 일제 통치도구로 태어난 ‘민족지’
[신문자본연구-식민지시대편] 일제 통치도구로 태어난 ‘민족지’
친일자본·자치주의자 등에만 허용 …저항성격 싹부터 잘려

[글 싣는 순서]
1. 식민지시대편
① 민간지 창간

지난 3월5일 조선일보는 서울시내 모호텔에서 창간 75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이날 조선일보는 코리아나호텔 건물 북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동화상 스크린을 통해 기념식을 생중계 하기도 했다.

이어 4월1일 동아일보도 같은 호텔에서 창간 75주년을 자축하는 기념식을 가졌다. 일제 강점기인 1920년에 약 한달간격으로 창간된 두 신문사가 이번 75주년에도 어김없이 들고 나온 상징어는 ‘한국 최고, 최대의 민족지’였다.

조선, 동아일보의 민족지 주장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신문자본연구팀은 그러나 익히 들어온 ‘민족지’라는 용어에 주목했다. 연구팀은 스스로 민족지라고 자기 규정하고 있는 이 두 신문의 탄생배경을 알아보고 여기에서부터 한국신문자본의 성격 분석을 시작하기로 했다.

식민지 통치사상 가장 악랄했다는 일제 치하에서 일제가 왜 민족지를 자처하는 민간 언론 창간을 허락했을까. 먼저 1919년 당시 민간지 창간 허가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총독부 정무총감 미즈노의 회고를 살펴보자.

“…조선어 신문을 허용함으로써 조선 총독부의 젊은 관리와 젊은 조선인들이 흉금을 터놓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고 이는 분명 조선인의 사상을 완화하는데 유효했다고 확신하는 바 입니다”

이같은 미즈노의 발언에서도 비춰지 듯 조선총독부의 민간지 허가배경은 언론자유 창달이라든지 조선인들의 언로개방 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일제의 민간지 창간허가는 ‘굴뚝론’에 비유되기도 한다. 아궁이가 터지기 전에 굴뚝을 만들어 열기를 빼내려는 의도라는 것과 굴뚝에서 나는 연기를 보고 동향을 파악하려는 의도라는 두 비유가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는 3·1만세운동에 혼쭐이 난 일제가 무단통치의 한계를 절감, 문화통치를 도입하면서 조선인들의 저항의식을 누그러 뜨리고 또 한편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민간지 창간을 허가했다는 사실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한마디로 민간지 창간허가는 일제의 통치구도속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신문이 시사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였다. 시사신문은 극우 친일단체인 국민협회 기관지 성격으로 탄생됐고 조선일보는 대정친목회라는 친일 기업인단체에 의해, 동아일보는 매일신보 사회부장인 이상협과 인촌 김성수의 자금으로 각각 창간됐다.

그런데 이들 창간주체들의 면면을 보면 일제가 왜 이들에게 민간지 창간을 허가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시사신문을 창간한 민원식은 상해임시정부가 처단해야 할 친일파 1호로 지목하던 인물로 조선은 일본을 따라가야 한다는 소위 일본 동화주의자로 분류된다. 시사신문은 철저히 친일논조를 펼치다 사주인 민원식이 암살당하면서 1921년 폐간된다.

조선일보를 창간한 대정실업친목회는 일본거주 유력자와 조선인 갑부들의 친목사교 단체로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인정하는 선에서 자치를 허용해 달라는 자치론자 집단이었다. 동아일보는 이른바 민족주의자를 자처하면서 민족개량주의를 역설해 온 김성수를 비롯,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회부장이었던 이상협과 일제 문화통치의 거간꾼 노릇을 한 진학문 등이 포진해 있었다. 초대사장에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던 박영효를 앉힌데서도 그 면면이 드러난다.

이상협이 동아일보 허가를 따내기 위해 총독부를 설득하면서 한 말은 일제가 민간지를 왜 허가했으며 어떤 인물들에게 창간을 허가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사회가 움직이는 것을 나타내게 하는 길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움직이는 꼴을 알고서 당신네들도 무슨 통치를 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일제가 민간지를 조선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수단으로서 역할하기만을 원했고 철저히 친일적이거나 민족개량주의적인 세력에게만 신문 창간을 허용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일제가 제대로 언론자유를 보장했던 것도 아니었다. 일제는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정책의 기본방향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어느정도 언론자유를 허용할 것을 표방했지만 저항적인 성격을 보일 땐 가차없이 칼을 뽑아 들었다. 일부 저항의식이 있는 젊은 기자들의 반일기사가 지면에 실릴 때 곧바로 정간조치 등을 취한데서도 일제 언론정책의 기만성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일제는 적절히 당근정책도 구사했다. 동아일보에서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긴 이상협에게 중외일보를 만들도록 총독부가 권유한 사실이나 동아일보에 대해 같은 계열인 경성방직에 보조금을 지급, 간접지원을 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총독부는 ‘민족개조론’으로 민족개량주의 확산을 주창한 소설가 이광수를 동아일보에 파격적인 대우로 모셔가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일제는 한쪽에서는 통제의 칼을, 다른 한쪽에서는 당근정책을 구사하면서 민간지와 기자들을 길들여 나갔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진정한 민족지가 자랄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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