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끝나면 정권에 부역한 언론인들을 평가해야 한다.”

언론노조, 민언련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3년 간 휴업’이라는 형벌을 견딘 김진혁 EBS PD다. 그는 2008년 광우병에 대한 5분짜리 영상 ‘17년 후’를 연출했다가 자신이 원치 않던 책상에 앉게 됐다. 기륭전자 파업을 다룬 ‘3년’을 끝으로 그는 제작부서를 떠났다. 그런지 3년. 김진혁 PD는 제작부서인 교양다큐부 다큐프라임팀 연출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시대의 언론인들에게 날 선 비판을 꺼내들었다. “부역 언론인, 당신을 평가하겠다”.

그가 다시 복귀할 날을 기다리는 만큼 그의 존재는 사라졌다. 일반인들이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트위터에서뿐이었다. 그동안 연출을 아예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김 PD는 민주노총, 언론노조가 부탁한 영상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을 “아르바이트 PD였다”고 평했다. 그리고 돈과 거리를 따지지 않고 자신을 부르는 곳에 가 강연을 했다. 그 와중에 책 ‘지식의 권유’도 펴냈다. 그는 “스스로 지식채널이 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음으로 양으로 지식채널e 제작진을 도왔다. 트위터나 강연에서 들은 반응과 평가를 고스란히 전달했고, 새로운 트렌드나 주제를 제안하기도 했다. 직접 연출하지 못한 아쉬움도 컸지만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을 했다”고 자평했다. 주제도 내용도 약해진 것 아니냐는 세간의 평가가 신경 쓰였지만 프로그램이 유지되고 있고 주제도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지식채널e PD의 습관을 간직하고 있었다. “지식채널을 할 때 고민이 있으면 정리될 때까지 잠들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인터뷰 당일에도 새벽 5시가 넘어 잠이 들었다. 시작할 다큐를 그는 ‘다큐영화’라고 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 취재하기에도 부족할 시간인데 그가 요즘 하는 고민은 ‘연출’에서 시작해 ‘정치’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그 끝은 항상 ‘저널리즘’이다.

저널리즘에 대한 고민은 EBS부터 시작됐다. 김진혁 PD는 그가 속한 공간을 “진보도 보수도 꺼리는 이상한 곳”이라고 소개했다. 사실 EBS에서 노동, 빈곤, 장애를 다루거나 ‘PD수첩’과 같은 시사프로그램을 찾긴 힘들다. 몇 년 전에 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EBS는 김진혁 PD의 작품을 ‘비교육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친일파와 그 후손들과 대비되는 삶을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이야기를 다루겠다고 제출한 기획안도 두 차례 퇴짜를 맞았다. 고민 끝에 수정한 기획안이 결국 통과됐다. 그는 “회사의 입맛을 고려했다”며 웃으며 얘기했다. 김진혁 PD는 직접적으로 친일파와 대비하지 않고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에 집중할 생각이다. 그는 ‘타협’이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를 잘 드러낼 수 있는 전략이라고 했다. 저널리즘은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담론이 아니라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삶을 보여줘야 한다는 말 또한 덧붙였다. '기계적 중립에 집착하는' EBS에서 그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지난 3년 동안 저널리즘을 어떻게 바라봤느냐는 질문에 김진혁 PD는 “노종면 선배를 생각하면 아직도 미안하다”는 고백을 되풀이했다. 그는 지식채널e를 시작한 2005년부터 ‘언론운동이 이대로 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KBS, MBC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출입처만 뱅뱅 돌며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언론 현실을 언론인 스스로 깨야한다고 했다.

“더 이상 썩기 전에 스스로 도려내야 가장 덜 아프다.”

그는 “동아투위의 정신은 사라진지 오래”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권력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힘을 휘두르며 ‘사람’과 ‘노동’을 외면하는 보수언론은 물론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간 주인행세하다 갑자기 이명박 정부에 고개를 숙인 언론들을 ‘부역 언론’이라고 질타했다. 특히 KBS와 MBC를 두고 “전두환 정권 때 언론사통폐합으로 정권에 충성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망가질 거라 생각 못했다”고 말했다. 한숨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빠르면 총선이 끝나고 이들에 대한 평가, 아니 처벌이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그는 “반성을 하려면 지금이 마지막”이라며 언론인들의 각성을 요구했다.

김진혁 PD는 가장 가까운 예를 들었다. 한진중공업과 김진숙이다. 언론은 ‘희망버스’ 아니면 ‘불법’만 보도했다. 정작 김진숙이 크레인에 올라간 까닭, 8년 전 끝내 내려오지 못한 또 다른 김진숙, 김주익의 이야기, 김진숙의 김주익 추도사, 평범한 여성노동자 김진숙이 운동권이 된 이유를 얘기하지 않았다. 진보언론과 트위터에서만 회자될 뿐이었다. 김진숙을 소금꽃나무라 불렀지만 언론은 그 나무가 본디 씨앗이었던 사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김진혁 PD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김진숙이 왜 크레인에 설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는 “맥락을 복원해야 한다”고 했다. 이제 그가 다시 짊어진, 3년 전보다 무거워진 짐이기도 하다.

드라마 연출자가 꿈이었던 청년은 어느새 자신이 인정하든 안 하든 ‘비판적 저널리스트’가 됐다. 그는 지식채널e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저항'을 했고, 보편타당한 상식에 반하는 현실을 고발했다. 그가 온몸을 비틀어 쥐어 짜낸 5분은 현실의 편린들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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