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스페셜 <13억 대륙을 흔들다 – 음악가 정율성> 편은 결국 방송이 나갔다. 방송 전에 제작후기를 부탁받고 사실 난감했다. 이념적인 논란에 휩싸이며 8.15 광복절 특집으로 나갔어야할 프로그램이 두 번의 방송 불발을 거치면서 5개월 만에 방송이 되니, 외부에서 보면 당연히 담당 제작자인 내가 할 말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내가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다. 하지만 방송전날 더빙을 마치고 나니 나에게는 이상하게 할 말이 남아있지 않음을 알게 됐다. 경과야 어찌 됐건 내가 할 말은 1시간짜리 프로그램에 온전히 담겨있고, 그것이 방송나간다면 내가 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미진하고 아쉬웠던 부분이야 당연히 있겠지만, 내가 정율성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하고 싶었던 말은 온전히 그 프로그램에 다 담겨있다.

나머지 이야기도 사실 하고 싶진 않다. 이미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사내 게시판에 두 번에 걸쳐서, 또 개인적으로 여러 동료들에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방송이 나갈 수 있게 된 건 KBS의 양대 노조와 PD협회의 물러서지 않은 싸움 덕분이었다. 그리고 동료 PD들의 응원과 격려 덕분이었고, 보직을 걸고 방송을 촉구한 선배들의 저항 덕분이었다. 그러니 이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보답하는 길은, 또한 미래의 후배들을 위해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하는 길은 부끄러운 과거를 기록하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그래서 쓴다.

프로그램은 6월초에 기획됐다. 방송시점 2개월을 앞두고 있어서 제작자 입장에선 그리 여유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길지 않은 그 기간에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6월 하순에 중국출장을 이틀 앞두고 있을 때 이례적으로 당시 콘텐츠 본부장님이 요구해서 기획방향과 취재내용을 중간간부로부터 직접 보고받았고, 8월 초순에 한창 마무리 촬영과 편집중일땐 또 이례적으로 사장님이 요구해서 기획방향과 취재내용을 본부장님으로부터 직접 보고받았다. 하지만 제작을 중단하라는 지시는 없었다. 다만 잘 마무리하라는 언급만 있었다. 그리고 방송 4일전이면서 프로그램 시사를 하루 앞둔 날, 전격적으로 방송 불발이 결정됐다. 내가 들은 이유는 이승만, 백선엽 등의 인물프로그램들의 방송여부를 두고 그 논란이 한창인 시점에서 정율성 편이 방송된다면 KBS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인다는 것이었다. 그 뒤에는 KBS 이사회의 이사장과 이사가 보직을 걸고 버티고 있었다.

이례적으로 사장과 본부장까지 검토하고 승인한 개별 프로그램을, 이례적으로 이사회가 막아서서 방송이 되지 않았다. 나중엔 감사까지 이례적으로 막았다고 한다. 더더욱 공영방송인가하는 노조까지 때마다 앵무새처럼 떠벌이며 방송을 반대했다. 노조까지 막아선 이례적인 프로그램이었다. 두 번까지 방송이 불발되자, 사실 내가 15년 넘게 몸담고 있던 방송국이 낯설게 느껴졌고, 내가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방송제작의 원칙과 상식이 애초에 그 존재가 없었던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내가 PD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것도 참 낯설었고, 더더구나 15년 넘게 PD로 근무했다는 것도 우스웠다.

개인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을 때 그 위기에서 구해준건 동료 피디들이었다. 넘어져서 바닥에 주저앉은 심정이었을 때, 다가와 팔을 내밀진 않았지만, 동료들은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내가 스스로 일어나길 바랬고, 내가 계속 주저앉아있기 민망해서 엉거주춤 일어났을 때에야 그들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조용히 다독여줬다. 어떻게든 싸우자고, 어떻게든 방송을 내보내자고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이건 내가 몸소 겪은 정말 귀한 경험이다.

한마디만 더 하고 싶다. 한 두 마디 문장을 앵무새처럼 외워서 떠들며 이념공세를 펼치는 분들에게. 지금의 북한 사회를 보면 참 재미있다. 3대 세습을 해도 북한은 꿈쩍하지 않는다. 체제에 대한 불만이 없어서이겠는가? 절대 아니다. 대다수 민중의 불만과 분노는 있겠지만, 북한 체제를 옹호하며 남한을 절대악처럼 여기며 3대 세습을 떠받치는 앵무새 떠벌이들의 과잉충성과 그 충성으로 얻는 떡고물이 어떻게든 이 괴상한 북한체제를 이어가고 있다고 난 생각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친일을 밥 먹듯이 하고, 세상의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길 때, 그 험난한 항일운동의 길에 들어선 인물에게 이념공세를 앵무새처럼 떠벌이는 사람들을 보면 북한의 앵무새를 떠올리곤 한다. 묘하게 이들의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서 별 어려움 없이 오버랩 된다. 어떻게든 체제수호란 명분으로 떠들어 대며, 기존의 체제를 옹호하고, 자기에게 떨어질 떡고물을 목내밀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도 체제수호에 앞장서고 싶다. 하지만 내가 수호하고 싶은 체제는 친일파의 후손들과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이 때마다 냉전이데올로기를 교묘히 이용해 여전히 잘 먹고 잘사는 그런 체제가 아니다. ‘과거 일제부역을 청산하고, 박정희 독재 하에 비명조차 못 지른 민주화, 노동 운동가들의 희생을 제대로 역사적 사실로 알리고, 광주학살을 제대로 규명하고, 최근 MB의 부도덕한 집권행위까지 제대로 규명하는, 그래서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알리고 반성하는’ 그런 체제다. 케케묵은 냉전이데올로기를 지금까지 끌어와 때마다 앵무새처럼 떠들어 대며, 부도덕한 정권으로부터의 떡고물을 목 늘어뜨리며 기다리는 분들은 이상하게 내가 방금 말한 사실들엔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 모르는 걸까, 부끄럽지 않은 걸까. 진정으로 치욕적인 역사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걸 보면 새가 맞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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