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마오는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한반도에 관한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들었다. 스탈린은 “김일성(金日成)이 나에게 남한을 취할 행동을 생각하고 있다. 김은 젊고 용감하다. 그러나 그는 너무 유리한 것만 높이 평가했다”고 마오에게 전했다.

마오는 “우리들은 마땅히 어린 김(小金)을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마오는 이어 “조선은 현재 복잡한 국면에 직면해 있다”고 설명했다. 마오와 스탈린의 통역을 맡은 스저(師哲 사철)는 자신이 쓴 ‘나의 일생-스저 자술(自述)’에서 “기실 마오가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과 회담할 때 스탈린은 이미 김일성이 싸울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김씨는 싸울 의견만 들을 뿐 싸우지 않는 의견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단, 스탈린이 이 말을 할 때 마오쩌둥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은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그 후 스탈린은 마오와 조선 문제에 대해 발전된 토론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석 309)

스탈린이 나중에 생각을 바꿔 김일성의 무력행동을 지지한 것은 미국 정책의 영향이 컸다. 미국 트루만 정부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중국의 타이완과 한국은 미국의 방어권 안에 포함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내 놓았다.

스탈린은 그렇다면 김일성이 한국을 공격하더라도 미국이 간섭하지 않을 것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미소간의 직접적인 충돌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또 소련 정보기관이 더글라스 맥아더가 워싱턴에 보낸 비밀 보고 중에 남북한 간에 충돌이 발생할 경우 미국이 간섭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는 정보를 수집했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해 스탈린은 1950년 1월 30일 북한 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에게 한 통의 비밀서신을 보냈다.

“만약 김일성이 한국을 공격하는 문제로 나를 만나려고 생각한다면 언제라도 회담할 준비가 되어있다. 나의 입장을 김일성에게 전달하고 대사는 내가 김일성을 도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라. 우리들은 매년 2만5천 톤의 납을 얻기를 바란다고 전해라.”

스티코프가 이런 내용을 김일성에게 통보하자 김일성은 대단히 흥분했다. 김일성은 “스탈린 동지가 남한 공격을 동의했는가?”를 다시 스티코프에게 물었다. 김일성은 10~15일 이내로 소련이 요구하는 납을 보내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스탈린은 2월 2일 다시 스티코프에게 전보를 보내 한국을 공격해 무력으로 조선을 통일하겠다는 계획을 절대비밀에 부칠 것을 김일성에게 신신당부하도록 했다. 내용은 이랬다.

“조선의 다른 영도자뿐만 아니라 중국 영도자들도 모두 알 필요가 없다. 이것은 적들에게 비밀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김일성·스탈린·마오 쩌둥(왼쪽부터). ©국방일보
 

이틀 후 김일성은 스티코프를 만나 조선인민군 10개 사단을 늘리는 편제확대를 요구하고, 소련이 1951년(내년)에 공여할 7천만 루불의 차관을 앞당겨 쓸 수 있도록 요청했다. 스탈린은 동의하는 회신전보를 보냈다. 김일성은 곧바로 다시 소련방문 준비에 나섰다.

2차 대전 후 세계는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두 패로 갈라져 ‘냉전(冷戰)’이 시작되면서 각 나라는 양대 진영의 맹주인 미국과 소련을 상전으로 대하며 그들을 추종했다. 미소 간의 쟁패는 유럽이 주 전장이었지만, 동북아 문호를 지키는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도 양대 진영의 뜨거운 각축장이었다.

남과 북은 당시 1945년 2월 미국, 영국, 소련 3국이 체결한 얄타협정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북쪽은 소련, 남쪽은 미군이 진주하고 있었다. 남한이 1948년 8월 15일 단독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세우자, 북한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건립해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들어섰다.

남한은 이승만(李承晩), 북한은 김일성이 국가원수가 됐다. 한 민족이 두 개의 국가로 찢어진 것이다. 이로부터 한국전쟁이 터질 때까지 줄잡아 38선을 경계로 2000건에 이르는 크고 작은 분쟁이 잇따랐다. 양쪽 모두 남북한 통일을 갈망했으나 역량부족으로 북한은 소련, 남한은 미국에 의존한 채 군사충돌이 날로 늘어나고 확대되면서 아슬아슬한 형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은 소련정부에 조선의 정치, 경제, 특히 군사상 전면 원조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조약, 즉 동맹조약을 요구해 체결했다. (주석 310)

조선 내각수상 김일성은 1949년 2월 22일 조선정부 대표단을 이끌고 전용열차로 처음으로 정식 소련 방문길에 나섰다. 대표단은 부수상 겸 외무상(外務相) 박헌영(朴憲永), 민족보위성 부상(副相) 김일(金一) 등이었다. 3월 3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김일성과 박헌영은 곧바로 두 차례 스탈린과 회견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3월 5일 스탈린과 처음으로 한국 침공문제를 놓고 비밀 회담을 했다. (주석 311)

김일성: 남조선(한국)과 미군 반동세력들의 북조선(조선)에 대한 도발이 날이 갈수록 격렬해 지고 있다. 우리들은 비록 육군이 있지만 해군방어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 우리들은 이 방면에 소련의 지원이 필요하다.

스탈린: 미군은 남조선에 얼마나 있나?

김일성: 가장 많을 때 2만 명이다.

스탈린: 남조선에 군대가 있는가?

김일성: 있다. 대략 6만 명 정도다.

스탈린: 이 숫자는 경찰을 포함한 숫자인가?

김일성: 포함되지 않았다. 이것은 정규군의 숫자다.

스탈린: 그들이 겁나나?

김일성: 두렵지 않다. 단 우리는 해군을 보유하려 한다.

스탈린: 누구의 군대가 더 강한가, 당신들 아니면 그들?

박헌영: 우리들의 군대가 더 강하다.

스탈린: 당신들이 해군을 건립하도록 원조하겠다. 군용비행기도 주고. 당신들 사람들이 남조선 군대의 내부에 있는가?

박헌영: 있다. 하지만 모두가 하급 군관이다.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스탈린: 현재 아무 것도 할 수 없더라도 좋은 일이다. 남조선도 당신들의 북쪽에 간첩을 파견하기 때문에 경계를 제고할 수 있다.

스탈린은 38선 부근의 쌍방 간의 공방상황을 들은 뒤 “38선은 마땅히 평화지대다. 이점은 대단히 중요하다”며 한반도의 형세가 악화되는 것을 꺼렸다.

김일성, 박헌영은 3월 7일 2차 비밀 회담을 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두 차례에 걸친 회담에서 소련의 군사원조와 한국에 대한 진공(進攻) 지지를 강렬하게 요구했으나 스탈린은 완곡하게 거부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침은 허락할 수 없다. 첫째, 북조선 인민군이 남조선 군대에 대해 진정한 우세를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병력 수에서 열세다. 둘째, 남조선에는 아직 미군이 있다. 전쟁이 나면 그들이 개입한다. 셋째, 소련과 미국 간의 38선 분할협정은 여전히 유효하다. 만약 우리가 먼저 위반하면 명분과 이치에 맞게 미국의 개입을 막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스탈린은 조선의 군사역량이 강대하지 않아 무턱대고 움직일 경우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으로 미소 쌍방이 직접적인 군사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더욱 우려했다. 다만, 스탈린은 조선쪽의 군사원조와 경제협력 요구에 대해서는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쌍방은 3월 17일 ‘조소(朝蘇)경제문화협력 협정’과 ‘조소(朝蘇)군사비밀 협정’을 체결했다.

조소(朝蘇)군사비밀 협정은 소련이 조선의 무기와 장비원조를 보충하는 것으로 조선 인민군 6개 보병사단과 3개 기계화 부대의 수요를 만족시키고, 조선의 공군력을 증강하고 충분한 훈련을 보증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소련은 조선에 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폭격기 30대를 제공하도록 했다. 또 1949년 5월 20일 전까지 소련이 120명으로 구성된 특별 군사고문단을 조선에 파견하고, 조선에 10만 루불의 물자를 원조하기로 했다.

몇 개월 후 소련 군사요원과 대량의 소련 군사장비가 조선에 도착해 조선의 군사력이 크게 증강됐다. 귀국한 김일성은 스탈린이 완곡하게 거부한 조선의 이른바 민족해방전쟁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1949년 8월 조선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에게 한국 쪽 영역인 옹진반도 공격계획을 제기했으나 스탈린의 재가를 얻지 못했다. 김일성은 마오쩌둥이 영도하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파죽지세로 일로 창장(長江 장강)을 건너 남하해 중국 대부분의 지역을 해방시키고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자 크게 고무됐다.

김일성은 무력통일을 결심하고 5개월 전 자신의 특사로 마오쩌둥을 만난 김일(金一)의 말을 떠올렸다. 당시 마오는 김일에게 “중국 전쟁이 승리하면 조선의 통일행동을 지지한다”고 밝힌바 있었다. 게다가 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미국의 원동(遠東; 태평양지역)지역 방어권에 한반도와 타이완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발표하자 김일성은 한국을 공격하더라도 미국 군대가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주석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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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熱血1950’ 何楚舞 著 大衆文藝出版社出版

310) 彭德懷與朝鮮戰爭 楊鳳安 王天成 著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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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1950年斯 大林因何決心支持金日成攻打韓國? 文史參考 人民網 文;秋風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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