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것”, “뭔가 고상한 것”,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 등등, 클래식 음악에 대한 편견이 의외로 완강한 것 같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상당히 난감한 일이지. 맛있는 요리가 왜 맛있는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맛을 알려면 먹어보면 되는 거지. 클래식 음악도 일단 들어야 맛을 아는 거지.

이런 편견은, 뒤집어 놓고 보면 “클래식 음악 모르면 무식한 것 아닌가” 하는 자괴감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당혹스럽기도 해. PD로서 이런 편견을 박살내기 위해서 정말 서민 눈높이의 클래식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 왔어. MC는 ‘순악질 여사’ 같은 캐릭터가 맡아도 좋겠지. “그래, 나 클래식 모른다, 어쩔래? 이 곡이 왜 좋은지 나한테 알려줘 봐!” 뭐, 이런 투의 프로그램 어떨까? 고상 떠는 것은 내가 제일 혐오하는 거다. 이 프로그램, 머지않아 꼭 할 거다.

언젠가 후배 한명이 황당한 질문을 한 게 기억나네. “선배는 클래식 음악을 전부 다 알아요?” 헐, 1,000만분의 1도 모르지. 이름 아는 작곡가도 10만분의 1이 안 될 걸. 이탈리아의 작곡가 겸 음악사상가 페루지오 부조니란 분의 말을 기억해 두면 좋을 거야. “이 세상에는 수많은 이류 작곡가가 있고, 소수의 일류 작곡가가 있고, 극소수의 위대한 작곡가가 있고, 그리고... 모차르트가 있다!” 내가 아는 작곡가는 모차르트랑 극소수의 위대한 작곡가들 뿐이야. 정말, 10만분의 1도 안 돼. 그 위대한 작곡가들의 작품 중에서도 내가 아는 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니, 정말 1,000만분의 1도 안 되는 거야.

암튼, 후배의 거창한 질문에 나는 시원하게 대답했지. “그래, 다 알어, 내가 좋아하는 곡들은 다 알어!” 이 대답의 논리적 귀결은? “그래, 너도 다 알어. 네가 좋아하는 곡들은 다 알잖어.”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몰라두 돼. 많이 알면 뭐 해,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게 중요하지.
 
클래식 음악은 경계도 애매해. 훌륭한 곡이니까 오랜 세월 살아남았고, 국경과 언어를 너머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즐겨 듣는 거겠지? 몬테베르디가 400년, 바흐가 300년, 모차르트가 200년 이상 살아남은 건 그만큼 좋은 음악이기 때문이 아닐까. 자꾸 들으면 귀가 열려. 그러려면 마음부터 먼저 열어야겠지.

클래식 음악으로 분류되는 곡을 좀 더 대중적으로 편곡한 이른바 ‘크로스오버’라는 게 있어. 부담 없이 접근하려면 ‘크로스오버’를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 나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때 오스트리아 취재 갔더니 TV에서 ‘모차르트의 정신’ (The Spirit of Mozart)이란 특집을 하더군. 근데 모차르트 음악을 원곡대로 안 하고, 죄다 재즈로 고쳐서 연주하고 있더라구. 모차르트의 ‘자유로운’ 정신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난 별로였어. 좀 과격하게 표현하면, “있는 그대로 최상의 음악인데 굳이 개악해서 놀고 있는 저 꼬락서니라니, 쯧쯧..” 이런 씁쓸한 느낌이 들더군. 암튼, 많은 사람이 부담 없이 즐기는데 도움이 된다면 굳이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클래식’으로 분류되지 않는 음악을 클래식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경우도 있어. 예컨대 비틀즈의 노래를 베를린 필 첼리스트들이 연주한 것, 이게 ‘클래식’인지 아닌지 굳이 따질 필요가 있을까? ‘세미 클래식’이라 해야 할지... 암튼 들어서 좋으면 그만인 거야.

에스터데이(Yesterday) http://www.youtube.com/watch?v=Kqcd7zDZFuk
렛잇비 (Let it be) http://www.youtube.com/watch?v=-2ME0EagyNY

96년, 지휘자 주빈 메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인터뷰한 내용이 기억나네. 단도직입적으로 “음악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나?” 물었더니 이 분, 대가답게 답변을 잘 하더군. “음악에는 많은 사랑이 들어있다"는 거야. 공감이 가더군. 사랑에도 종류가 많겠지. 당시 연주 곡목은 사라 장이 독주를 맡은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바그너 <신들의 황혼> 모음곡이었는데, 멘델스존에는 멜랑콜릭하고 달콤한 사랑이, 바그너에는 관능적이고 비극적인 사랑이 들어있었어.

모차르트의 친구 야크빈이 빈 시절 모차르트 집 방명록에 남긴 말도 기억해 두면 좋을 거야. “가슴이 없는 천재라는 것은 넌센스다. 천재란 위대한 지성이나 탁월한 상상력, 심지어 이 두 가지를 합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천재를 만드는 것은 오직 사랑, 사랑, 사랑 뿐이다.”

정말, 사랑에도 종류가 많아. ‘클래식’으로 여겨지지 않는데 클래식 이상의 감동을 주는 음악도 있어. 뭘까? 누구나 부르는 애국가!!! 나라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는 음악!!! “가장 저급한 종류의 사랑”이라고 비아냥거릴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튼 가장 흔하게, 공공연히 표출되는 게 바로 ‘애국심’이지. 월드컵 경기 때 선수들 입장하고 태극기 휘날리고 애국가 흐르면 대한민국 사람 중 99%는 우리나라가 이기길 바랄거야. 올림픽 때 김연아나 박태환이 금메달을 목에 걸 때 태극기 올라가고 애국가 나오면 가슴 뿌듯해 하는 게 대한민국 ‘보통 사람’이겠지.

한국 ‘애국가’  http://www.youtube.com/watch?v=CceXXXubvdE
김연아 금메달 수상 http://www.youtube.com/watch?v=fs1ZBdGQ1QE&feature=related

‘애국심’이란 건 자칫 개인보다 국가를 위에 두는 ‘국가주의’로 흐르면 위험하니 경계해야 해. 특히나 스포츠와 결부시켜 광적인 애국심을 고취하고 독재체제 유지에 이용하는 건 히틀러, 무솔리니, 피노체트, 전두환 같은 파시스트들이 즐겨 써 먹은 수법이니 즉각 알아채고 배격해야겠지. 일본 극우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고 ‘기미가요’ 제창을 의무화하려는 걸 비판하면서, 우리 자신이 맹목적인 애국심에 휩쓸리도록 스스로 방치한다면 모순이겠지.

일본 ‘기미가요’  http://www.youtube.com/watch?v=8iuYxdXFPbc&feature=related

하지만 ‘애국심’이란 게 본질적으로 ‘고향에 대한 사랑’과 뿌리가 같으므로 자연스런 인간 감정이라 할 수 있어. 그래서 모든 나라에는 국가가 있고, 사람들은 국가를 부르면서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조국’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거겠지.

우리가 보통 ‘북한’이라고 부르는 나라,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고, 언젠가 통일해야 할 상대방이니 ‘북측’ 또는 ‘이북’으로 불러야 타당하게 여겨지는, 그 나라도 애국가가 있어. 신생국가 건설의 벅찬 애국심을 노래한 건 남측 애국가와 마찬가지야. 북측 정권은 남측보다 더 ‘애국’을 강조해 왔지. 북측 주민들이 전쟁 때, 전후 복구 때, 그리고 90년대 고난의 행군을 겪을 때 이 노래에서 ‘조국’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며 허리띠를 졸라맸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어. 같은 민족이 반으로 쪼개져서 제각각 다른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쓰라리네. 흠... 올림픽이나 월드컵 때 우리 방송에서도 전파를 탔으니 이 노래 얘기한다고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갈 일은 없겠지? 이 노래 들어보았다고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을 숭배하게 되는 건 아니니 남쪽 일부 관계자들, 혹시나 ‘쫄지 마시길’. 

조선 ‘아침은 빛나라’ http://www.youtube.com/watch?v=oXWg4EmajW0&feature=related

흠, 동영상에서 이북 국기가 거꾸로 휘날리고 있네. 이북이 ‘철천지 원쑤’로 여기는 ‘미제 승냥이’ 나라, 세계 유일 최강대국, 대다수 세계인이 ‘자유의 나라’로 여기는 미국에도 국가가 있어. 독립전쟁 때 만든 이 노래는 9.11 이후 엄청난 애국주의 열풍과 함께 미국에서 쉴 새 없이 불리웠지. 2002년 ‘미국’ 시리즈 취재하면서 거리마다 넘치는 성조기를 봐야 했고, 이 노래를 들어야 했어. “이렇게 강한 나라가 아프가니스탄이란 작은 나라 침공하면서 ‘뭉쳐야 산다’(United We Stand)를 합창하다니, 참 단순무식한 국민들이다” 느꼈지. 아무튼, 노래의 힘이 참으로 크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어. 이 노래를 부르며 조국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평범한 미국 시민들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어.

미국 ‘성조기여 영원하라’ (Star Spangled Banner)
http://www.youtube.com/watch?v=-4v5lr7CskQ&feature=related

미국 국가와 북측 국가, 애국심 불어넣는 데에 자웅을 가리기 힘들 정도네. 흠, 애국가 얘기가 좀 장황해졌네. 흠, 재미삼아 좀 생소한 중남미 국가 경연대회를 한번 해 볼까? 이쪽 동네 분들, 음악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 국가도 상당히 예술적이야. 그리고 스페인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 주권을 확립할 당시의 기억을 잘 승화시킨 가사도 음미해볼 만한 것 같아. 모두 클래식 음악 비슷하게 들리겠지만 어렵지는 않을 거야.

아르헨티나 http://www.youtube.com/watch?v=CjWOxr3-M4c
브라질 http://www.youtube.com/watch?v=jXzzE52tQhg&feature=related
칠레 http://www.youtube.com/watch?v=tsxQ8n8JLgk
멕시코 http://www.youtube.com/watch?v=QiWGz5SBO1s
니카라구아 http://www.youtube.com/watch?v=W_oppAlORos
페루 http://www.youtube.com/watch?v=rvOEyeeR5Vs
베네수엘라 http://www.youtube.com/watch?v=4drS57s-7os

시간 관계상 다른 나라들 생략. 어느 노래가 젤 맘에 들어? 사람마다 다르겠지. 장엄한 아르헨티나 국가는 예술성이 모차르트 오페라 <황제 티토의 자비> 뺨치는 수준이네. 가사도 한번 볼까.

아르헨티나 국가, ‘애국의 행진’.

인간들이여! 신성한 외침을 들으라!    
자유, 자유, 자유!
끊어진 사슬의 소리를 들으라,
고귀한 평등의 즉위를 보라.
이제 그 명예로운 주권을 이루어냈다.
하나 된 남쪽의 주들에 의해서.

세계의 자유민들은 화답하리라.
오, 위대한 아르헨티나인이여!

영광의 월계관이여 영원하라.
우리는 승리를 알고 있노라,
우리는 승리를 알고 있노라.
영광의 주권이 함께하지 않는 삶이라면
영광스런 죽음을 맹세하자!

전세계 국가 경연대회 한번 해도 참 재밌겠다는 생각이 드네. 애국가 자체를 ‘클래식’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애국심, 좋은 의미에서 ‘고향 사랑하는 마음’이 잘 녹아 있는 어엿한 클래식 음악도 있어. 브라질 국가, 아르헨티나 국가, 베네수엘라 국가를 듣고 ‘좋다’고 느꼈다면 충분히 듣고 이해할 수 있어. 핀란드의 시벨리우스가 작곡한 <핀란디아>, 체코의 스메타나가 작곡한 <블타바> 같은 곡이지. 그 나라 국가 듣는다 생각하고 가볍게 들어봐. <핀란디아> 듣고 핀란드에 대한 사랑을, <블타바> 듣고 체코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면 변태일까?

시벨리우스 교향시 <핀란디아> http://www.youtube.com/watch?v=Fgwr3wrenkQ
스메타나의 교향시 ‘블타바’ http://www.youtube.com/watch?v=FfnGDZG8gSI

내친 김에 우리 대한민국의 ‘애국가’가 나오는 원곡, 안익태 작곡 <한국 환상곡>도 들어보자. 1999년, 정명훈 지휘 KBS교향악단 연주.

안익태 <한국 환상곡> http://www.youtube.com/watch?v=kJxBK9ZaIZc

   
 
 

이 곡을 들을 때 <핀란디아>나 <몰다우>의 경우처럼 이 나라에 대한 사랑이 샘솟지 않는 건 왜 그럴까? 음악 자체가 조금 못한 탓도 있을 거야. 그리고 음악 외적인 사실들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질곡의 우리 현대사, 그 어두운 기억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일 거야.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1906~1965)는 13살의 나이에 3.1운동에 가담한 바 있지만 이후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 10주년을 축하하는 ‘만주 환상곡’을 작곡했고, 스승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일본 탄생 2600년 축전곡’을 세계 최초로 지휘했고, 일본 천황 즉위식에서 쓰이던 일본 전통음악 ‘월천악’(에텐라쿠)을 작곡, 지휘했어. 그는 1930년대부터 유럽에서 활동하며 일본인 행세를 했어. 그 때문에 ‘친일 인명사전’에 오르는 불명예를 얻은 바 있지. 게다가 ‘애국가’의 선율이 만주국 축전음악의 선율과 거의 같다는 지적도 있어 씁쓸한 뒷맛이 오래 남아.

베를린 올림픽 때 마라톤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시절이니 그의 이러한 행적을 눈 감아 주어야 하는 걸까. 이 때문에 ‘애국가’ 교체 논란이 일기도 했어. 우리 민족의 상징 <아리랑>을 새 국가로 하자는 얘기도 있었고, 80년대 많이 불렀던 <그날이 오면>이 어떻겠냐는 얘기도 있었지.

그날이 오면

한밤의 꿈은 아니리 /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 뜨거운 눈물들
한 줄기 강물로 흘러 /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 그 아픈 추억도
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 그날이 오면

굴절된 우리 현대사, 통일이 되어 남북이 함께 부를 가슴 벅찬 새 국가를 갖게 될 그날은 언제일까. 에휴, 지금은 <몰다우>와 <핀란디아>를 한 번 더 듣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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