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위원회(위원장 최시중)가 29일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열린 업무보고 자리에서 인터넷 실명제를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인 관련 법 조항 폐지 및 개정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인터넷 실명제 폐지에 대한 의지가 약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또한 주민번호를 수집, 이용하는 것을 전면 금지하는 법 개정에 나서기로 했지만 주민번호의 대체 수단으로 '아이핀 제도'를 들고 있어 개인정보 유출 방지 대안으로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다.

방통위 인터넷 실명제 폐지 의지 있나?

일명 인터넷 실명제로 불리는 제한적본인확인제도는 일일 평균 10만 명 이상이 이용하는 사이트의 경우 게시판을 설치 운영하려면 본인 확인을 위한 방법과 절차를 강제하는 제도다.

정부는 악성댓글 등 인터넷 폐해를 막기 위한 조치로 지난 2007년 7월 인터넷 포털을 중심으로 이 제도를 도입했지만 표현의 자유를 막는 대표적인 제도로 지목돼 왔다.

이날 방통위가 인터넷 본인확인제도를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사실상 폐지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졌다. 하지만 방통위는 정작 '폐지'라는 말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방통위가 밝힌 입장은 "관계부처간 합동 테스크포스팀을 구성해 본인확인제도의 장단점과 인터넷 환경변화, 기술발전 등 제반 사항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향후 제도개선 방향 및 보완방안을 검토"하겠다는 것이 전부다. 제도 폐지 의지가 약한다는 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특히 인터넷 실명제 폐지 여부의 핵심은 관련 법 조항의 폐지 또는 개정에 있는데 방통위의 발표에는 이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본인확인제를 규정한 법 조항은 정보통신망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44조5(게시판 이용자의 본인 확인)이다. 해당 조항이 살아있는 한 인터넷 포털 사업자들은 본인확인제를 의무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방통위 네크워크정책국 관계자는 이날 발표의 의미에 대해 "지금 단계에서는 종합적으로 검토하겠다는 것이고 미리 결론(법 조항 최종 폐지)을 예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법을 개정하기 위해서는 행정안전부와 법무부와의 협의 단계를 거치고, 최종적으로는 국회가 나서야 하지만 최종 법 개정까지 윤곽을 보여주는 로드맵도 나오지 않았다. 관련 법 조항을 개정하지 않고 제도를 개선하는 쪽으로 방향으로 잡을 가능성도 남아있는 셈이다.

장여경 진보네크워크 활동가는 "재검토가 아니라 완전 폐지를 주장하고 천명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방통위의 발표는 의지가 안 보인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인터넷 실명제 폐지에 대한 방통위의 인식도 문제다.

방통위는 본인확인제 재검토 배경에 대해 "트위터 등 해외 SNS가 급속하게 확산되는 등 인터넷 소통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제도개선 요구가 제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터넷 실명제의 근본적인 폐혜인 표현의 자유 문제로 폐지를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외 인터넷 환경이 급속히 변하면서 제도 폐지가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개인의 의사 표현과 소통을 가로막는 인터넷 실명제를 재검토하겠다면서 인터넷 사업자에게 자율적 심의 권한을 주는 조치를 발표한 것도 모순이라는 지적이다.

방통위는 기업의 자정 역할을 확대하겠다면서 방통위와 인터넷서비스 사업자 간에 불법유해정보자율심의 협력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 방통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인터넷사업자들에게 자율심의권한을 주게 되면 그만큼 심의가 강화될 수 있다.

아이핀 제도 도입한다고?...개인정보 유출 위험 더 커

방통위는 또한 개인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인터넷상 주민번호의 수집, 이용을 전면 제한하는 정책을 발표하면서 대안으로 아이핀 제도를 제시해 되려 개인정보 유출의 위험을 키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방통위는 개인정보 수집, 이용을 제한하기 위해 정보통신망법 제23조2(주민등록번호 외의 회원가입 방법)를 폐기하고 새로운 내용의 조항을 신설한다는 계획이다.

‘주민등록번호 사용 제한’이라는 새로운 법 조항은 원칙적으로는 주민등록번호 사용을 금지하면서 단서조항을 달아 예외를 뒀다.

법 조항에는 '본인확인기관으로 지정받은 기관'에 대해서는 주민번호 이용과 수집을 허용했다. 본인확인기관이란 아이핀 발급기관(신용평가사)을 말한다.

아이핀은 쉽게 말해 주민번호를 대신한 인터넷 상의 가상 주민번호이다. 아이핀을 이용해 인터넷을 이용하려면 아이핀 발급 기관(신용 평가사)에 주민번호 등의 정보를 건네주고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받아야 한다.

방통위는 주민번호 대체 방안으로 아이핀 제도와 휴대폰 전화번호 입력 등의 방안을 인터넷 서비스업체에 제안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아이핀 제도가 활성화되면 방대한 주민등록번호가 소수의 민간 기업(신용평가사)에 집중돼 오히려 대규모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한 아이핀 발급 기관에는 개인 사이트 방문 경로까지 저장이 돼 주민번호 이외의 또다른 개인정보까지 유출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녹색소비자연대 전응휘 상임이사는 "아이핀 제도는 통신 서비스 실명제를 기초로 하고 있다"면서 "최근 스마트폰에는 단말 위치와 같은 민감한 정보가 들어가 있는데 통신 서비스 실명제를 기반으로 하는 아이핀 제도는 프라이버시 침해의 최대 해악 요소"라고 비판했다.

전응휘 상임이사는 "예를 들어 3개월 동안 통신비를 안내면 신용불량자로 등록하는데 통신사를 거쳐 주민번호를 입수한 신용평가사들이 하는 것"이라며 "통신서비스 실명제는 법적 근거도 없고 채권 추심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이런 제도는 개인정보 유출에 더 큰 위험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여경 활동가도 “본인확인제 제고한 이유가 개인정보 유출이라고 한다면 아이핀도 마찬가지다. 아이핀 제도는 개인의 신용정보를 집중시키는 것”이라며 “개인정보 유출 걱정한다면 아이핀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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