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철들자 죽는다. 선인들이 즐겨 쓴 경구다. 청암 송건호는 “오랜 경험을 통해 인생과 사회를 깨달을 땐, 말하자면 이제부터 좀 올바르게 살아보자고 눈을 뜨게 될 땐 이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된다는 뜻”이라며 돈과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태를 개탄했다. 청암이 그 글을 쓴 뒤로 사반세기가 흐른 오늘, 돈과 출세는 무장 지배적 가치관이 되고 있다.

청암이 그 글을 쓸 때 ‘돈과 출세’의 대명사로 불리던 이병철은 폐암 선고를 받았다. 죽음을 앞둔 그가 천주교 신부에게 “24개의 영적 질문”(1면 머리기사를 비롯해 6개면에 걸쳐 보도한 중앙일보의 표현)을 보낸 사실이 최근 공개됐다.

지상에서 천국을 누렸던 그의 질문

중앙일보는 그의 질문에 대해  “돈에 관한 얘기도, 기업에 관한 얘기도, 경영에 관한 얘기도 아니었다. 2년째 폐암과 투병 중이던 이 회장은 인간과 신, 그리고 종교에 대한 물음을 남겼다”며 마치 대단한 영성을 지닌 존재인 듯이 부각해 보도했다. “인간적 고뇌, 실존적 시선이 녹아” 있단다. 하지만 죽음에 직면했을 때 비단 이병철만 실존적 고뇌에 잠기는 것은 전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인생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절박하게 묻는다. 철들자 죽는다는 말은 소박하지만 그래서 더 소중하다.

기실 이병철은 죽음 앞에서도 행복했다. 그는 천주교 신부에게 존대 없이 질문하고 답변을 받을 ‘권능’을 누렸고, 그 편지를 정성들여 쓰는 비서도 고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부가 답변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이병철의 건강이 악화됐다. 결국 그는 신부와 만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인간적 연민이 일어나는 대목이다.

특히 눈길을 끈 질문은 중앙일보가 1면 머리 제목으로 내왔듯이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걸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다.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라는 물음이다. 내겐 그 질문이 중앙일보 기자가 썼듯이 “가슴의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물음”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평범하다는 뜻이 아니다. 정반대다.

기자의 표현보다 훨씬 절실했다고 판단한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직설적 물음 또한 마찬가지다. 찬찬히 짚어보자. 지상에서 이미 ‘천국’을 누린 이병철에게 죽음을 직시하거나 삶을 떠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성경의 근거를 캐묻거나 신은 있는가라고 그가 물은 것은 죽음 뒤 그의 미래가 불안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돈과 출세’의 대명사가 죽음 앞에서 절실하고 절박하게 묻는 질문을 훑어보면 ‘철들자 죽는다’는 선인들의 경고가 얼마나 생생한 교훈인가를 새삼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언론권력은 어떨까. 이병철에 견줄 수 없지만 부자신문과 방송사의 고위 언론인들 연봉은 한국 사회의 상류층에 속한다. 더구나 그들은 이병철과는 다른 ‘명예’도 지니고 있다. 다만 죽음을 앞둔 언론인의 말과 글을 신문과 방송에서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일까. 그들이 써가는 글에는 오만이 뚝뚝 묻어난다.

가령 죽음을 앞둔 이병철이 신부를 찾은 사실을 중앙일보가 보도한 날,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신부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종교가 세속 일 취미 붙이면 세속의 종교 간섭 불러” 제하의 사설에서 이 신문은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신자 후보에게 사회 문제에 관한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을 올바로 알고 실천할 수 있는지 묻기로 한 사실, 2012년 총선과 대선 국면에서 각 지역의 후보자들이 진실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할 수 있는 참된 일꾼인가를 선별하기 위한 기준을 마련하고 후보자들에게 정책에 관한 질의를 하기로 한 사실을 들어 빈정거렸다. “세속의 사람이건 종교의 사람이건 아무 때고 어디에나 몸을 담그면 본인만이 아니라 그가 소속한 조직이 낭패를 보고 창피를 사게 된다”고 무람없이 썼다.

철들자 죽는다, 사람은

어떤가. 한국 천주교가 로마 교황청의 ‘사회교리’에 맞춰 조금이라도 교리가 구현된 사회를 만들려는 움직임에 케케묵은 색깔론으로 접근하며 신부들을 내놓고 훈계하는 모습은 철부지의 전형이다. 종교가 세속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논리를 펴며 자신들은 종교에 편협한 시각으로 개입하는 자가당착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해 없기 바란다. 나는 지금 언론이 감히 천주교의 신부를 비판하다니 따위를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천주교 내부의 새로운 움직임에 언론이 정치적으로 개입하면서 정작 신부들이 정치적이라고 언구럭부리며 매도하는 현실을 지적하고 싶어서도 아니다. 내가 지금 그들을 걱정할 처지인지 모르겠지만, 날마다 오만 가득한 글들을 살천스레 쏟아내는 중년의 언론인들이 언젠가 자신의 죽음에 직면할 때 자신이 쓴 글에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 진심으로 우려해서다.

신부들에게 사실을 비틀며 꾸중하는 언론권력은 죽은 이병철의 산 교훈으로부터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게 분명하다. 아직 건장하고 생활에 윤기가 넘치는 그들에게 너무 순박해 차라리 듣그러울 말을 그럼에도 다시 건네는 이유다. 철들자 죽는다,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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