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대한민국에 영상관련 학과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그 졸업생들의 미래를 근심하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사회는 그 근심을 넘어 왜 그들에게 봉준호, 박찬호가 되지 못하느나며 비판하는가 하면, 섣불리 그들이 가져올 미디어 시장의 장밋빛 미래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몇몇 시나리오 작가, 연출부 등 스탭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거나, 혹은 그런 상황에 내몰렸다. 그리고 종편이 개국했다. 이 정체불명의, 아니 오히려 정체가 너무 분명해서 당황스럽다는게 맞을지도 모르는 거대 매체의 등장은 2012년을 몇주 안남겨 놓은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사실 만들어지지 말았어야 하는게 맞다. 하지만 결국에는 현실화됐고, 그에 대한 책임은 역시나 <뿌리깊은 나무>에서 강채윤(장혁)이 말하듯, 국민들이 지게 될 것이다. 억울하다 할지 모르겠지만, 한나라당에 다수당의 위치를 부여한 이들은 바로 우리, 국민들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종편행을 선택한 연예인, 제작인력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나 비판의 대상이 잘못됐다. 나의 정치적인 태도를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문제는, 현재 종편에 몸담고 있는 이들은 종편에 대한 그 어떤 입장도 (공개적으로) 취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종편행 연예인을 비판하는 유명인과 그 연예인을 좋아하는 팬들의 대립을 통해 희희낙락하는 쪽은 바로 ‘의도하지 않은’ 노이즈 마케팅 수혜를 받는 종편이다.
 

종편행 연예인 비판, 뒤에서 웃는 종편?

현재 종편이 가장 공들이고 있는 것은 국민들의 종편에 대한 거부감을 어떻게 희석시킬 것인가이다. 채널A에서 개국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것이나, jTBC에서 지상파가 시청률 지상주의에 빠져 외면한 ‘작가주의적인’ 드라마작가의 드라마를 방송하는 것은 ‘개국특집’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종편이라는 시스템에서 지속적인 ‘명품’ 다큐멘터리의 송출이 가능할 것이며, 시청률이 담보되지 못하는 작가주의 드라마가 꾸준히 방송될 수 있을까? 불가능에 가깝지만 만약 그렇다면, 종편의 저열한 보도 행태와는 별개로 그 자체만큼은 지지받아 마땅한 것이다.

종편을 만든 미디어법의 탄생에서 알수 있듯, 그 과정은 공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의무재송신, 채널연번제, 중간광고허용 등 그 자체로 특혜인 조항들 또한 지상파, 기존PP(Program Provider, 채널사업자)들과의 형평성에 어긋난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시장상황에 대한 충분한 고려, 공평한 룰 적용이 있었다면 현재의 종편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탄생하지 못했을 종편은 앞으로의 특혜가 없다면 살아남기 힘든 구조라는 것. 자매언론들의 극단적 홍보에도 0%대 시청률을 기록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그를 반증한다.

과연 0%대의 시청률이 지속되도 개국 당시와 같은(그조차도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편성을 견지할까. ‘출연자 털기’나 종편 참여 방송노동자 비판과 같은 미시적인 부분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추가적인 특혜를 막는 제도적 장치 마련과 이후 시청률 압박과 채산성 악화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선정성, 지상파에서도 흔히 발생하는 연기자, 노동자 처우와 같은 자본/노동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종편은 과거의 향수 혹은 현재의 스타, 외면 받아왔던 컨텐츠 뒤에 웅크려 시청자들의 삶 속으로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종편들이 일시에 내보낸 ‘박근혜 인터뷰’에서 알 수 있듯 그 덩치가 너무 커서 뻔히 보이는 게 사실이다. 종편을 ‘만들어낸’ 거대한 힘과 그 속에서 드라마 등의 컨텐츠를 만들어 시청자들에게 선보이려 하는 사람들의 욕망은 그 간극이 크다. 종편이 가지고 있는 지극히 정치적인 목표와 정체성은, 외면받은 다양성의 통로로 생각하는 이들과 충돌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종편이 우리에게 주는 심리적 아이러니가 상당한 것과 비례해, 종편 내부의 이율배반적 요소들 또한 구조적으로 내재될 수 밖에 없는 갈등이다. 

종편, 좋은 방송 만들 수 있을것인가?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좋은 드라마와 재밌는 프로그램은 시청자가 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드라마의 시청률과 그를 통해 만들어지는 광고 수익이 종편 보도국의 월급과 뉴스 제작비로 쓰인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제는 무조건적인 찬사와 비난이 가능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jTBC <빠담빠담>의 정우성이 아무리 좋아도 ‘형광등 100개 아우라’는 불편하다. 채널A의 다큐멘터리 <오래된 인력거>가 좋아도 채널A의 ‘강호동 야쿠자 연루설’ 뉴스는 짜증난다. 지금은 노골적으로는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2012년 총선과 대선, 그들의 보도가 ‘예상대로’ 흐를 때, 우리는 그 드라마, 예능들을 보면서 마냥 감동받고 웃을 수 있을까. 시청자들의 이율배반적 욕망과 종편 내부의 역설, 광고 등 미디어시장 상황 등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시점이 생길 것이다. 그때, 진짜 판단과 비판을 위해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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