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년간의 이명박 오세훈의 서울시 문화예술정책은 이제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때다. 내용보다는 ‘개발형 사업’과 ‘전시성 사업’에 주력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을 위해 홍보효과의 극대화에 몰두했던 전임 두 시장의 시정(市政)은 위선(僞善)을 넘어 차라리 위악적이었다. 나는 이번 서울시향의 ‘정명훈 문제’를 거론하면서 ‘전시성 사업’과 ‘개발형 사업’의 실체인 ‘토목공사식 성과주의’에 매몰된 시정의 폐단이 서울시 문화예술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된 현실의 그르침을 지적했다. 이는 정명훈 한 사람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이명박식 발상’이 바로 ‘토목공사식 성과주의’이고 한 사람에게 많은 기대와 예산을 들여 지난 7년의 시간에서 드러난 결과는 과연 그 성과가 얼마나 서울시민들에게 가치가 있었던가를 질문했다.

서울시향의 7년 성과에 대한 의문

서울시향은 앞글에서 언급했듯이 지난 7년간 정명훈을 통해서 단원들의 경쟁체제를 도입, KBS 심포니를 뛰어넘는 연주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주장도 있고, 서울시향을 찾는 관객이 늘었다는 측면에서 정명훈의 역할을 큰 성과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르다. 지난 주 중앙일보의 기사에서 “정 감독이 영입되기 전인 2004년 서울시향의 정기공연 1회당 유료 관객수는 466명. 지난해엔 1274명이다. 올해는 1800명을 내다보고 있다.” 고 썼는데, 아니? 정명훈이 예술감독이자 상임지휘자로 부임한 이후 무려 7년간 회당 유료관객이 겨우 이 수치인데, 어떻게 재단법인화하면서 정명훈 영입의 성과라고 들이댈 수 있을까? 갖가지 정명훈의 요구사항을 충실하게 서울시가 들어줬는데도 불구하고 회당 유료입장 숫자가 1200명대? 거기에 “올해는 1800명을 내다보는” 수준이란?

나는 반드시 돈을 따져서 예술의 효용성을 강변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더구나 서울시립의 예술단체란 기본적으로 서울시민들에게 문화예술의 수용을 확대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회당 유료관객의 증가라는 의미에서도 성장은 부족했고 서울시민의 시향 오케스트라음악의 수용의 측면에서도 보다 성장하지 못했다. 이런 필자의 문제 지적에 서울시향의 정명훈 영입 이전과 이후의 여러 성과를 비교하라는 주문이 있다. 그러나 정명훈 영입이후 법인화를 꾀하면서 파격적인 재정지원을 한 서울시의 예산지출 과정을 본다면 오늘의 성과를 크게 내세우면서 강변할 내용은 아니다.

서울시 6개 예술단체 총 예산 103억, 교향악단 1개 단체 131억

서울시 산하 전문예술단체인 -극단, 국악관현악단, 무용단, 뮤지컬단, 합창단, 오페라단- 6개 단체의 올해 총예산이 103억 안팎이었다. 이 예산에 비추어 서울시 1개 산하단체로 법인화한 서울시향 예산은 6개 단체를 다 합한 예산보다 훨씬 많은 131억 원의 지원을 예산으로 서울시로부터 지급받았다. 정명훈 영입이전에 서울시립교향악단은 연 예산에서 정명훈 영입이후 연간 평균 4.3배 넘는 예산을 지난 7년 투입한 것에 비해, 오늘의 서울시향의 관객수익의 증가란 일부 기득권신문의 주장처럼 그렇게 큰 수치가 아니다. 예산으로 7년 간 사용했던 그 많은 돈을 지출하고도 회당 유료관객이 7년 동안 그 수준이란? 또 내용적으로도 서울시향 전체 운영을 정명훈에게 내맡기다시피 한 특권적 지위를 부여했음에도 이 같은 수준의 유료입장이라면? 이건 정상적인 운영체제라 할 수 없으며 경영평가로는 어떤 시뮬레이션을 동원해도 정상경영이라 할 수 없다.

 

예술의 경영은 반드시 혹자를 기대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예산의 투입비례 경영의 효율성을 질문하는 태도는 사기업뿐 아니라 공공부분의 예산집행에서도 요청된다. 정명훈 영입이전과 비교해 영입이후 예산 증액의 파격적인 투입에도 회당 유료관객은 3배에 미치지 못한다. 예산증액투입 산출모형에서 파급효과분석, 연관분석, 장기예측 등에서의 유용성으로 보자면 서울시향 운영은 보다 경제적이고 보다 효울적이어야했다. 이건 초보경제학자의 의견을 들어도 금방 판별되는 수치다. 따라서 좀 더 적극적으로 예산투입의 효율성을 높일 수는 없었는지, 여러 가지 경영측면에서 따져봐야 하는 시점이다.

상임지휘자와 예술감독이란 자리는

상임(常任)이란, 주어진 임무를 도맡아 책임지고 처리한다는 의미다. 어떤 일을 할 때 주어진 일을 하기위해 거의 매일같이 출근하는 경우를 상근(常勤), 이따금 출근하면서 일을 하는 경우를 비상근(非常勤)이라고 통상적으로 역할을 나눈다. 예술과 음악을 하는 일의 특성이 매일같이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 출근하여 상근을 하는 일과 같을 수는 없다. 꼭 일정한 시간에 출근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임할 수 있는 게 예술이란 업(業)에 종사하는 사람들 일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예술업의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정명훈의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의 근무 일수를 가리켜 상임이나 예술감독이라고 얘기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예술감독은 오케스트라의 예술적 측면 전부를 책임지는 자리다. 오케스트라의 전체비전과 경영의 균형을 위한 기획과 레퍼토리 선정부터 단원을 연습시키고 기량을 점검하고 또 지휘자를 선정하고 단원들의 수준을 지속적으로 끌어올릴 책임이 주어진다. 계약서에 명시한 오케스트라의 “공연연주 및 연습계획 수립”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연습과 연마를 통해 서울시향 오케스트라의 성격과 특색을 창의적으로 이끄는 책임을 진 예술감독과 또 상임지휘자로 “연간 10회 이상의 (재)서울시립교향악단의 자체 기획공연 및 연습지휘” 까지 정명훈이 겸임한다는 것은, 그만큼 정명훈이 서울시 오케스트라에 헌신하는 조건임이 계약으로 서울시향 측과 정명훈이 약속한 거다. 그러나 예술감독과 상임지휘자 책임을 맡은 그가 서울시향에 들이는 시간은 1년 중 평균 두 달 내외이고 경우에 따라서 들쑥날쑥이다. 그것도 음악회 연주일정에 맞춰서 서울로 들어와 음악회 연주 지휘만 몰아치다가 다시 나라밖으로 나가는 식이다.

해외의 경우 교향악단 중에서는 상임지휘자(chief conductor)와 예술감독(music director) 또는 음악감독(Intendant)은 별도의 직으로 사람을 구분해서 따로 두고 있는 경우가 있다. 상임지휘자는 계약에 의해 연간 맡겨진 연주만 지휘하고 통상 연봉 일괄계약으로 10회 또는 15회 이상의 정기공연 및 특별공연 지휘를 맡긴다. 연주를 앞둔 연습기간도 계약에서 명시하기 마련이다. 그 이외 연주 기획이나 협연자, 객원지휘자 섭외 등은 상임지휘자 역할이 아닌, 예술감독이나 음악감독이 임무를 맡는다. 단원의 해고나 기존 단원을 새로 뽑는 오디션은 상임지휘자는 관여하지 않을뿐더러 참견할 수도 없다. 물론 큰 교향악단의 소위 스타급 지휘자들은 연주와 관련된 많은 것을 맡기도 한다. 종합예술감독(General music Director)이란 지위인데, 이는 상임지휘자(Chief Conductor) 보다 상위 개념의 계약이다. 좀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연주곡목이나 협연자 등을 찾는 공연기획업무 전반을 지휘하는 경우다. 그러나 이 경우는 오히려 자신의 역할에 한정적으로 집중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대개이기 때문에 책임과 의무와 시간의 투입에 따르는 넓은 활동과 모든 일의 결재권을 가지려하지는 않는 게 일반적이고 국제적인 범례다. 서울시향의 정명훈이 예술감독과 상임지휘자를 같이 맡는 경우란 책임이 너무 한 사람에게 과도하게 주어진 것이다.

그럼? 서울시향은 유독 정명훈에게 겸직을 맡겨 전제적(專制的)인 전권(全權)을 허용한 이유는 뭐 때문일까? 서울시는 그가 대단히 유능한 지휘자이자 기획자이고 예술전반의 판단과 실행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일까? 바로 정명훈을 영입한 사람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오케스트라 운영원리에 대한 일반적인 무지(無知)에 기인한 것이고, 서울시 공무원들의 예술행정의 안목의 한계와 음악계 양식 있는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거나 상의 없이 일방으로 밀어부친 인사(人事) 때문이다.

전제군주적 무소불위의 예술권력

정명훈은 앞에서도 언급했듯, 서울시와의 계약에서 “단원 선정, 단원의 위·해촉, 단원평가를 포함한 고과, 상벌에 관한 사항의 인사위원회 심의 요구, 오케스트라 부지휘자 임명, 객원지휘자 및 협연자 초청계획 수립, 연주곡목 선정, 서울시와 합의되지 않은 사항에 대한 거부 등, 어떤 나라 어디 예술단체나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나 지휘자도 누릴 수 없는 절대 권력을 지니고 서울시향 전체를 이끌어 왔다. 외국의 경우 이런 경우란 현재 없다. 불가능하다. 20년도 더 이전에 베를린 필하모니를 35년간(1955-1989) 지휘했던 ‘음악독재자’ 카라얀(Heribert Ritter von Karajan)이 이끌던 베를린 필하모니도 이정도의 전권을 그에게 허락하진 않았다.

정명훈은 자신이 활동했던 프랑스에서도 마음대로 단원을 해고할 수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스티유 오폐라단(Bastille Opéra) 이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Orchestre Philharmonique de Radio France)에서 일한바 있는 정명훈이 프랑스에서도 한국의 서울시향처럼 "오케스트라도 이제 세계적 차원에서 경쟁해야"(조선일보 인터뷰) 한다고 단원을 막 해고할 수 있었을까? 좋은 오케스트라 소리를 내겠다고 자신이 지휘를 할 때는 자기 마음대로 체재비 항공비 와 높은 출연료를 지급하면서 외국인을 데려다가 연주를 시킬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있는 권한 자체가 프랑스에서는 주어지지 않았고, 프랑스 오케스트라 운영의 상식에 비추어 불가능하다.

기량이 좋은 단원을 선발하는 건 오케스트라 운영의 기본이다. 좋은 음질은 오케스트라 조건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1인 전횡의 방식이 아니라, 베를린 필하모니의 운영방식 등, 보다 합리적인 운영방식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오케스트라의 앙상블, 지속적인 발전의 중요성에서

앞글에서도 이미 지적했고, 이번 ‘정명훈 공론’의 기회에서 해당 기사에 댓글이나 개인적으로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 서울시향의 문제를 지적한 의견 중에는, 지금의 서울시향은 정명훈 지휘연주 때만 일시 서울로 정명훈과 같이 들어와 연주를 하는 악장, 수석 등, 주요 단원들 중에 많게는 15% 정도의 외국인 멤버가 현재의 서울시향 연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는 점을 많이들 지적했다.

시립오케스트라와 시민의 상관성

베를린 필은 베를린시가 운영하는 시립교향악단은 아니다. “시의 후원을 받으면서 단원들이 공무원 신분이었으나, 2002년에 최종적으로 재단법인이 되면서 지금 단원들은 공무원 신분이 아니다. 그러나 베를린 필하모니는 베를린 시를 상징하는 오케스트라로 상주하는 도시 베를린의 시민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카라얀 임기 말기인 1983년에는 여성 클라리네티스트 자비네 마이어의 입단을 놓고 단원들과 심한 불화를 빚었으며, 공연 수익 분배 문제로 인한 갈등도 심화되었다. 카라얀은 타계 직전이었던 1989년에 직책을 사임했으며, 사후 악단 내부의 의견을 종합해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새 상임 지휘자로 맞이했다. 아바도는 각종 이색 기획 공연이나 현대 작품의 적극적인 공연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나, 위암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보수적인 운영진 사이의 불화로 2002년에 사임했다. 아바도의 후임으로는 영국 출신의 사이먼 래틀이 같은 해 예술감독으로 취임해 현재까지 재직 중이다.”(위키 백과)

사이먼 래틀(Simon Rattle)과 Rhythm is it!

영국인으로는 최초로 베를린 필하모닉 음악감독이 된 사이먼 래틀. 그는 버밍엄 심포니 음악감독으로 있을 때부터 청소년 음악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영국 전역에서 온 청소년들로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연주하기도 했다. 으로 이름붙여진 래틀의 야심찬 교육프로그램은 래틀이 안무가 로이스톤 말둠(Royston Maldoom)과 함께 기획하였으며 다양한 종족적, 연령적 배경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클래식 음악이나 현대무용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250여 명의 베를린 시내 학교 이민자 가정의 청소년 학생들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음악에 맞추어 무용을 완성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되었고 필자도 감동적으로 봤다.

"Lead children into music without their knowing they're being led."(이끌려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청소년들을 음악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래틀의 음악교육관은 주입식으로 가르치려드는 우리의 청소년 음악교육과 비교된다. 필자가 본 타큐멘타리 영화 은 단계적인 연습과정과 함께 래틀과 말둠이 청소년들에게 예술의 방법으로 대화하는 방식이 잘 드러나고 있으며, 처음에는 낯선 클래식 음악과 무용동작으로 갈팡질팡하던 청소년들이 스트라빈스키 음악의 원초적인 리듬에 맞추어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화면에 옮겼다.

다큐멘터리 ㅣ 독일 ㅣ 100분감독 토머스 그루베, 엔리크 산체즈 랜쉬출연 ㅣ 사이먼 래틀(Simon Rattle), 로이스톤 맬둠(Royston Maldoom)이 타큐멘타리 영화를 보면서 필자는, 사회 양극화가 극심한 우리의 처지에 비추어도 한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계층 간의 차별과 불이익, 사회적 불평등, 그로 인한 문제가정의 양산과 청소년의 방황과 고립, 이런 현실을 깨트리고 ‘인간의 연대’를 향한 음악의 도정(道程)을 통한 ‘하모니’가 바로 이었고, 오케스트라와 오케스트라 상주 지역 시민들과의 오케스트라의 상관성, 그리고 시립오케스트라와 시민의 공존의 방법에서 우리 사회현실에서도 시사(示唆) 받는바가 컸다.

“음악은 사치가 아니라 공기, 물 같은 필수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첫 번째 대규모 교육 프로젝트를 담은 이 영화는,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250명의 이민자 계층의 청소년들을 데리고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는 미션에 도전했다. 클래식 음악은 접해 본 사실이 전혀 없었던 가난한 계층의 청소년들이 3개월의 연습기간을 거쳐 음악과 예술의 세계에 점점 다가가면서 “음악은 사치가 아니라 공기, 물 같은 필수품”이란 놀라운 체험을 공유하게 된다. 처음 학생들은 낯선 클래식 음악과 무용동작이 당황스럽게 다가오고, 과연 스트라빈스키 무용극을 완성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 과연 이 청소년들이 함께 무용을 완성할 수 있을까, 서로 싸우고 스스로 자신에게 실망하고, 그러면서 또 상처를 극복하고, 결국은 자기 자신과 대면하면서 무용, 그리고 베를린 필과의 협동 공연을 완성시켜가는 과정은, 사이먼 래틀 베를린 필의 예술감독과 안무가 로이스터 말둠의 헌신성에서 비롯된다.

은 예술의 힘이 사회적 양극화나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행동할 것을 말하고 있었다. 더욱이 서울시립교향악단처럼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시립교향악단의 역할에서는 사회적 문제에 오케스트라의 음악성으로 대책을 세우고 행동한다는 건, 시립교향악단의 비전일 수 있다. 물론 사회문제에 대한 해답을 오케스트라 음악이 전적으로 답할 수는 없을 뿐더러 그것에 서울시향 오케스트라 소임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서울의 시립교향악단으로의 존재방식에서는 능동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임엔 틀림없다. (계속)

(편집자 주. 기사 본문에 인용됐던 멀더라는 아이디의 누리꾼 의견은 원 작성자의 허락 없이 부분 무단 전재됐으며 원문의 의도와 다르게 인용됐기에 삭제합니다. 이에 대해 미디어오늘과 김상수는 원 작성자 멀더님께 정중하게 사과드립니다. 12월15일 오전 10시20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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