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5월의 옌안(延安 연안). 이미 얼음과 눈이 녹아 살풍경한 황토고원에도 신록이 파릇파릇 돋기 시작했다. 중공중앙은 5월 중순에 고급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마오는 5월 19일 고급 간부회의에서 ‘우리들의 학습을 개조하자’는 강연을 했다. 마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론과 혁명의 실제를 서로 결합하는 것이 중국공산당의 근본 지도사상이라고 말했다. 마오는 또 “우리는 역사를 단절시킬 수 없다. 외국의 혁명사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중국의 혁명사를 알아야 한다. 중국의 오늘 뿐만 아니라 중국의 어제, 그제(과거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인재를 결집해 중국의 경제사, 정치사, 군사사(軍事史)  등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오는 자기의 역사를 모르고 자기의 역사를 중시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경향이라고 비판했다. 이 강연은 옌안 정풍운동(整風運動)의 신호탄이 됐다.

항일 전쟁이 시작된 뒤 옌안에 소재한 공산당 근거지 ‘싼간닝(싼시-간쑤-닝샤)’ 변계지구의 당 조직은 크게 발전했다. 일단의 소자산계급 사상영향이 주입되어 농민의식과 혼재했다. 또한 변계지구 당내에 존재하는 역사, 노선시비 문제가 일부 간부들 사이에 여전히 존재했다. 사상과 이론상의 통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단결된 영도체제를 구축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마오는 당 조직과 영도체제를 정비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마오의 당내 권위와 권력도 한결 굳건해 지고 있었다. 자신감의 발로였다. 마오는 ‘당의 작풍(作風)을 정비하자’고 전당에 호소하면서 “주관주의에 반대하여 학풍(學風)을 정돈하고, 종파주의에 반대하여 당풍(黨風)을 정비하고, 당 8고(八股; 명청 때 과거의 답안형식 문체, 즉 현학적이고 형식적인 문투)에 반대하여 문풍(文風)을 정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석 203)

1941년 9월에 소집된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토지혁명투쟁 후기의 ‘좌경’ 과오와 항전 초기의 ‘우경’ 과오를 둘러싸고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마오는 오랜 동안 당의 통치를 지배하고 있던 주관주의 사상노선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보구(博古 박고)와 장원톈(張聞天 장문천), 왕자샹 등은 자신들이 범했던 과오에 대해 자아비판을 했다. 왕밍(王明 왕명)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며 변명하다 참석자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마오는 이처럼 차근차근 군불을 때가며 준비를 하다 분위기가 숙성되었다고 판단해 1942년 2월 중앙당교(中央黨校) 개학식 및 중앙 선전부, 중앙 출판국 연합 선전공작회의에서 ‘정돈(整頓) 학풍, 당풍, 문풍’과 ‘반대 당8고(黨八股)’ 강연을 했다.

마오는 이 강연에서 전면적이고 체계적으로 주관주의에 반대해 학풍을 바로잡고, 종파(파벌)주의에 반대해 당풍을 바로잡고, 당8고에 반대해 문풍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오는 정풍의 주지(主旨)와 방침은 “징전비후 치병구인(惩前毖後 治病救人; 과거의 잘못을 후일의 거울로 삼고 병을 고쳐 사람을 구한다)이라고 밝혔다. 지난날 소련과 코민테른을 믿고 거들먹거린 사람들이 저지른 과오를 반성케 해(병을 치료해) 새롭게 태어나도록 돕는 구제 프로그램이란 뜻이다. 이는 곧 마오의 노선을 따르라는 함의를 담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옌안 정풍운동은 정식 막이 올려 장장 3년 동안 계속됐다. 마오쩌둥이 발동한 옌안 정풍운동은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라는 곡절의 역사적 배경이 깔려있다.

옌안 정풍운동 전 공산당은 취치우바이(瞿秋白 구추백), 리리산(李立山 이립산), 왕밍(王明 왕명) 등의 3차례 좌경노선 정책을 시행한 바 있다. 그중 1931년 1월에 열린 6기4중전회의에서 실권을 잡은 왕밍의 좌경 교조주의가 가장 맹위를 떨쳤다. 무려 4년이나 지속된 왕밍의 전횡은 당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폐해 또한 심대했다. 이 기간 동안 마오는 실권(失權)해 권토중래를 기약하며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왕밍(왼쪽), 마오쩌둥.
 
왕밍은 군사적으로는 대도시 공격을 감행하는 군사 모험주의를 폈다. 정치상으로는 코민테른 지시에 따른 폐쇄주의로 일관했다. 이런 일련의 좌경 모험주의는 장제스의 5차에 걸친 공산당 포위공격 소탕전에 대한 대응실패로 최대 위기에 몰렸다. 홍군은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장정(長征)에 나서는 간난신고의 혹독한 길을 걸었다. 이에 따라 남방 근거지를 잇따라 빼앗기고 30만에 이르던 전국의 홍군은 3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30만 명의 당원도 4만 명으로 줄어들고 장제스 통치지구(白區 백구)의 당 조직은 궤멸되다시피 했다.

1935년 1월, 준이회의(遵義會議 준의회의)에서 보구의 좌경 중앙통치가 종식됐다. 하지만 당시의 절박한 군사와 조직문제로 사상과 정치상의 노선문제는 정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미뤄져 왔다. 마오는 1940년 12월 정치국 회의에서 6기4중전회이래 형성된 좌경노선의 뿌리를 뽑으려했다. 그러나 교조주의가 당내의 사상적 기반에 완고하게 버티고 있어 실패했다. 마오는 전당 범위에서 광범위하게 정풍운동을 벌여 사상노선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또 항일전쟁 초기 왕밍의 우경 기회주의가 당내 사상혼란을 일으켜 국공합작에 많은 어려움을 초래하고 있다고 여겼다.

마오는 왕밍이 1937년 11월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뒤 코민테른의 지시를 교조적으로 끌어다 써 ‘통일전선에 일체 복종’, ‘모든 것은 통일전선을 통해서’라는 우경 구호를 만들어 결과적으로 국민당에 양보하는 꼴이 됐다고 불만스러워 했다. 왕밍은 1937년 12월, 1938년 3월 정치국 회의에서 통일전선의 독립 자주노선을 결의한 뤄촨(洛川 낙천)회의의 방침과 결정을 다시 반대했다.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마오를 비판한 것이다.

마오는 당시 왕밍이 당을 쥐락펴락하는 코민테른의 ‘상방보검’을 갖고 있어 대놓고 반격을 하지 못했다. 마오는 왕밍의 우경 기회주의의 득세로 사상혼란이 일어나 항전 초기공작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판단했다. 왕밍의 교조주의 영향을 제거해야만 원활한 공작을 펼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1941년 1월에 완난사변(皖南事變 환남사변)이 발생했을 때 마오는 국민당 정부에 보복하기 위해 15만 정병으로 국민당의 후방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반대로 이 계획이 무산됐다. 마오는 당에 사사건건 개입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코민테른과의 새로운 관계정립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풍을 통해 코민테른 지시의 신성화와 교조적 분위기를 깨 코민테른의 속박에서 벗어날 때 당의 발전, 즉 독립 자주적인 마르크스의 중국화를 담보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주석 204)

시기도 마오의 결단을 촉구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면서 세계2차 대전이 발발했다. 또한 일본이 12월 7일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해 미일전쟁이 본격화해 중일전쟁은 세계대전의 한 부분이 되었다. 미국의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지원과 영향력이 늘어나게 됐다. 이에 따라 중국 내에서 중일전쟁은 버티기 단계로 소강국면에 들어갔다. 당 중앙이 있는 ‘싼간닝’ 변계지구는 비교적 평온한 상태였다. 또 교착상태의 전선에서 많은 공산당 간부들이 옌안으로 돌아와 정풍운동을 확대할 수 있었다. 소련은 독일의 침공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느라 중국공산당에 대한 장악력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1943년 5월에는 코민테른이 해체돼 마오로서는 공산당 내의 코민테른파를 제거하고 자신의 입지를 굳힐 절호의 기회였다. 마오는 1941년 1월에 발표한 ‘신민주주의론’으로 압축된 ‘마오쩌둥 사상’의 싹을 틔우면서 당내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신민주주의론의 기조는 제국주의와 봉건주의, 일본세력과 지주 및 그 지지 세력에 대한 투쟁을 공산당과 4개 계급이 결합해 한꺼번에 혁명을 전개하는 것을 뼈대로 하고 있다. 혁명의 주체세력은 당을 중심으로 노동계급, 빈농과 중농, 소자산가와 지식분자, 민족자본가 등 4개 계급으로 무산자계급의 독재가 아닌 이들 계급의 연합 전제독재로 규정했다. 서구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나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민주주의와 구분된다.

이 또한 마오의 자신감의 발로였다. 1938년 9월, 6기6중전회 때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왕자샹이 들고 온코민테른 총서기 디미토로프의 구두전달, 즉 마오의 영수 지위를 인정하는 코민테른 측의 승인으로 마오의 영도자 위치가 한층 공고해졌기 때문이다. 한편 국민당의 소극적 항일에 항의하는 많은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이 옌안을 찾아와 정풍운동은 공산당의 기반을 넓히고, 이들에 대한 이데올로기 교육으로도 안성맞춤이었다.    

정풍운동은 이처럼 여러 목적이 있으나 크게는 두 가지다. 하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화, 즉 민족주의적 마오노선의 확립이다. 또 하나는 마오 1인지배 구축을 위한 정적(政敵) 제거였다.

준비도 치밀했다. 마오는 당사(黨史)를 학습시키기 위해 ‘당서(黨書)’를 편찬했다. 이 책은 장장 280여 만자에 이른다. 1928년에서 1941년까지 당의 중요 문건과 영도자들의 중요 발언, 문장 등 모두 518편으로 구성됐다. ‘당서’와 관련해 전 국가주석 양상쿤(楊尙昆 양상곤)은 이렇게 회상했다.(주석 205)

“우리들은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공부할 때 많은 마르크스-레닌의 서적을 읽고 혁명사를 배웠다. 그러나 선생들은 모두 러시아나 영국의 역사와 혁명사례를 가르쳤다. 나는 4년 동안 교실에서 마오쩌둥이나 농민운동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당의 6대 (1931년 상하이에서 열린 6기4중전회) 대표들이 중산대학에 와 연설할 때 중국 인구의 100분의 90이상이 농민이라도 농민은 단지 노동자 계급의 동맹자일 뿐 혁명의 기본 세력은 아니라고 했다. 또 마오쩌둥이 징강산에서 벌인 혁명투쟁이나 그런 것이 장래의 희망이라는 것들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혁명 실패 후 이론이 부족한 노 간부들이 혁명을 단절시키고 있다고 책망했다. 왕밍은 방자하게 중국혁명은 우리 같은 신지식인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다며 자신을 내세웠다. 그런데 ‘당서’를 체계적으로 읽다보니 선명하게 비교가 돼 어떤 것이 정확한 노선인지를 알게 됐다. 또 어떤 것이 창조적인 마르크스 주의고, 무엇이 교조주의인지를 이해하게 됐다. 당서는 옌안 정풍운동 때 큰 작용을 했다. 날카로운 무기였다.”

203)毛澤東生平全紀錄  柯延  編著 北京  中央文獻出版社
    黨史知識大講堂 第4講 ; 延安整風運動與馬克思主義中國化  盧毅  新華網
    延安整風 ;康生讓衆人寫名單追究敎條宗派幕後組織   楊尙昆  人民網  文史頻道
204) 延安整風 ; 康生讓衆人寫名單追究敎條宗派幕後組織   楊尙昆  人民網 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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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延安整風 ; 康生讓衆人寫名單追究敎條宗派幕後組織   楊尙昆  人民網  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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