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은 인권센터 건립 후원을 위해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가 페이스북에 올린 ‘천리길 일기’를 연재합니다. 인권센터는 최저 생계비도 받지 못하고 활동하는 인권단체들을 위해 최소한의 활동 공간을 지원하자는 취지에서 건립되는 국내 최초의 종합인권상담소로서, 박 이사는 오는 12월 준공을 목표로 10억 원의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습니다. ‘천리길 일기’는 그가 9일부터 23일까지 전국을 돌면서 현장의 인권 실태를 기록한 것입니다.

10. 10월18일 한국DMZ생명평화동산, 을지전망대 

칠흑 같은 밤이 이런 것이리라. 이런 밤을 본 적이 너무 오래 되어 오히려 왈칵 반가움이 밀려온다. 하늘의 별들은 또 얼마나 깊은 맛으로 빛나는지. 따끈따끈한 아랫목에 배 깔고 누워서 바라보는 하늘이 신산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 밖을 보니 가을 풀들 위로 허옇게 서리가 앉았다. 역시 강원도다.

늘 허겁 지겁이지만, 한국DMZ생명평화동산 황호섭 사무국장과 약속한 9시가 넘어서 멋진 한오집 서화재를 나섰다. 어젯밤은 너무도 깜깜한 밤이라서 하나도 볼 수 없었는데, 이제야 이곳의 건물의 배치가 들어온다. 분단을 상징하는 녹슨 철벽과 각각의 건물들을 잇는 소통을 나타내는 통로가 있다. 8동의 건물들은 언덕을 따라 비스듬히 높아지게 만들었다. 내부도 마찬가지다. “생명의 열쇠로 평화의 문을 연다”는 캐치프레이즈가 인상 깊다.

동부산악지대에 형성된 보존가치 높은 식생들은 그동안 민간인 통제구역이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가전리의 습지는 예전에는 논농사를 지었던 평야였는데, 이곳은 자연스레 습지가 되어 자연이 복원력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하고, 주변에는 향로봉, 가칠봉과 같이 금강산의 봉우리들이 있고, 대우산, 대암산과 같은 높은 산들이 있고, 운석이 떨어져 형성된 분지인 양구군 해안면이 위치해 있다.(한국DMZ생명평화동산 홈페이지 www.dmzpeace.com을 참조하시라)

이곳의 활동과 내용을 황호섭 사무국장에게 잘 들었지만, 사실 마음은 해안면과 그 위 철책에 있는 을지전망대로 달려간다. 이곳의 자세한 활동은 나중에 제대로 와서 보고 듣기로 하고 오전 10시 넘어서 그곳을 나와 밥집부터 찾았다. ‘아점’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서화리 음식점을 뒤졌으나 밥이 없단다. 세상에 밥이 없는 밥집이라니. 그러나 마침내 서화리의 맨 끝에서 ‘동해’라는 이름의 음식점을 찾았고, 우리는 거기서 동태찌개 4인분을 시켰는데, 이건 서울에서는 4만 원은 줘야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찌개를 단돈 2만4천 원에 먹었다. 맛도 더없이 좋았다.

최전방에 위치한 을지전망대

   
▲ 최전방 모습. ⓒ박래군
 
그곳에서 북쪽으로 달려서 해안면으로 차가 달린다. 구불구불한 산길, 그리고 주변의 계곡들을 보면서, 울긋불긋 단풍 든 산을 보면서 자꾸 나는 나의 군 생활을 떠올린다. 이곳 해안면 주위는 내가 28년 전 육군 병사로 근무하던 곳이다. 강제징집으로 끌려와 2년 3개월의 군복무 중에 1/3 정도의 시간을 보낸 곳이다. 해안면의 특이한 분지가 아름답게 한눈에 들어온다.

전쟁기념관과 나란히 서 있는 홍보관에서 을지전망대와 제4땅굴 출입증을 끊고는 을지전망대로 달렸다. 민간인 차로 포장된 도로를 달려 최전방 GOP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 을지전망대도 88년 올림픽 때 만들어졌다는 설명을 듣고도 그랬다. 다른 곳은 몰라도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안면만 해도 세 번의 검문을 거치고 허가를 얻어야만 갈 수 있던 곳이었다. 민통선 안에 위치한 마을들 중에는 가장 커서 면 단위로는 유일한 곳이라는 해안면의 주민들도 외부로 나가고 들어오기 위해서는 허가를 얻어야만 했던 곳이다. 주민들은 매일 점호를 받고 인원 파악을 해야 했다. 그렇다. 내 기억 속에 이곳 해안면과 을지전망대가 위치한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하는 그런 곳이었다. 거기가 이렇게 출입증 하나 달랑 끊어서 차를 몰고 올 수 있다니.

고바위 길을 힙들게 올라서니 바로 철책이다. 북녘 땅이 보이고, 멀리 금강산의 촛대봉이라든지 거기까지 보인다. 관측장교의 설명으로는 1년 중 80일밖에 그런 날이 없는데 억수로 운이 좋단다. 너무 청명한 가을 날씨 덕에 북쪽의 매봉이며, 운봉이며 한 눈에 볼 수 있다. 군산분계선과 비무장지대도 내려다보인다. 여기저기에 북한국의 GP가 있다고 관측장교는 설명까지 해준다. 자세하게 망원경으로 보여주기까지 하면서다. 그리고 그의 설명은 의외로 ‘북한군’이란 용어를 쓰지, ‘북괴군’이라고 하지 않는다. 관측장교가 설명하기에 보았더니 군복무 시절에 있었던 그 대형 확성기 자리에 있어야 할 그것들이 없었다. 남북이 서로 철수하기로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반가웠다. 이렇듯이 가장 철저하게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이곳마저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28년 전 군 복무하던 소초가 보이고

을지전망대에서 눈을 들어서 10시 방향으로 보니 산 능선 아래로 군의 보급로가 이어져 있다. 그러다가 가칠봉에 못 미쳐서 희미하게 보이는 소초 건물. 바로 거기다. 지금으로부터 28년여 전에 강제징집 돼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지금의 이곳 을지전망대 옆에 있던 중대 OP거쳐서 자대배치 됐던 소초가 희미하게 보인다.

갑작스레 끌려온 군대, 그것도 철책 바로 앞에서, 북한군의 확성기를 통해 들리는 대남방송이 고막을 두드리는 지척의 거리에서 나는 이등병이 되어 왔었다. 대학 다니다 왔다는 이유로 맞고, 동작이 굼뜨다고 맞고, 복창소리가 작다고 맞고, 기분 나쁘다고 맞고. 폭력 속에 맞고 살았던 그 세월들. 얼마나 맞았던지 팬티가 엉덩이 터진 곳에 달라붙어 화장실에서 일을 보기 위해 억지로 떼어내며 하염없이 울었던 그 푸세식 화장실도 모두 생각났다.

지금이야 추억거리처럼 말할 수 있지만, 그 시절에만 총 쏴서 죽이고 나도 죽고, 아니면 북으로 월북하고라도 나의 뭉개진 자존심을 되찾고 싶었던 그 시절이 크게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거기에 있었다. 얼마나 많은 젊음들이 나의 앞에서도 나의 뒤에서도 이렇게 끌려와 모욕적인 군 생활을 했을까. 철책 앞의 흔적선, 그리고 전방 철책선, 또 그 너머로 수색대라 불리는 민정경찰만이 출입할 수 있는 비무장지대는 그때나 이제나 말이 없다.

을지전망대에서 펀치볼이 훤히 보이고, 그 너머로 대암산이 보인다. 이번에 대암산을 가보고 싶었는데, 양구군을 통해서 허가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한다. 그게 1주일은 걸린다고 하니 깨끗이 포기했다. 해발 1304미터의 대암산은 1983년과 1984년 두해 겨울을 보낸 곳이다. 우리 소대만이 파견 나와서 근무했다. 세계적인 자연습지로 가치가 높다는 용늪을 화목을 해서 질질 끌고 건너다녔다. 겨울이면 영하 10도면 따뜻한 날씨였고, 그래서 얼음을 깨고 냇가에서 목욕도 했던 곳이고, 눈이 죽어라고 내리면 제설 작업을 포기하고 막사와 식당, 근무초소만 연결하는 길을 뚫어놓고 눈 녹기를 기다려야 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만 전쟁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까? 한 전투에서만 몇 백 명씩. 더욱이 이곳은 한국전쟁 3년여 기간 중 2년 동안 밀고 밀리고, 뺏고 빼앗기고를 반복했던 가장 치열한 만큼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 곳이 아니지 않는가. 도솔산 전투, 펀치볼 전투, 피의능선 전투 등등 숱한 전투 속에서 강과 산이 시체로 뒤덮였던 그런 곳이지 않던가. 그런 뒤로 곳곳에 매설된 지뢰 탓에 군인들도 민간인들도 얼마나 많이 죽었던가(내 군 훈련소 동기 중에 6명은 길을 가다가 잠깐 벗어나 같이 오줌 누던 중에 대인지뢰를 밟아 같이 죽기도 했다).

을지전망대에서 내려와 제4땅굴을 찾았다. 땅굴은 이제는 강원도 양구군의 관광수입원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오로지 반공교육용으로 사용하던 것보다는 차라리 좋았다. 북한이 파내려왔다는 곳까지 남한에서 사람이 서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굴을 뚫었다. 굴 안에 들어가는 모노레일로 20명씩 관광객들을 실어 나른다. 30분 기다려서 수준이 매주 후진 모노레일을 1분 정도 타고 들어가 다시 1분 정도 뒤로 빠져 나오면 그것이 끝이다. 거기에는 어떤 긴장도 없다. 이 땅굴을 왜 뚫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이 객관적인 설명에 그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땅굴을 보러 오는데, 그들은 무엇을 보고 가는지, 도통 모르겠다.

을지전망대에서도 느꼈던 것인데, 저들은 설악산이나 지리산이나 여느 산을 관광 가듯이 오는 것 같다. 분단의 아픔, 전쟁의 상흔 이런 것은 먼 기억 속의 일일 뿐이다. 다만 제4땅굴 앞에 전시해놓은 장갑차를 보던 한 관광객이 말한다. “광주 때 저걸로 쓸어버렸어.” 때때로 연세 드신 분들이 나처럼 군대의 기억을 얘기하지만, 대체로 관광 목적 이외에 다른 걸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다.

땅굴 앞에는 소위 계급의 ‘충견’ 동상이 서 있다. 이름은 헌트(Hunt), 4살 먹은 독일산 세퍼드였는데, 1990년 3월 4일 땅굴을 수색하던 중 수색대의 앞에 나가던 이 개가 북한군의 목함지뢰를 밟아서 산화했다고 한다. 이 개의 죽음으로 수색대 여러 명이 목숨을 건졌고, 이에 그의 무덤을 만들고, 계급을 소위로 추서하고, 동상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땅굴이 북에서 파내려왔다면, 베트남의 호치민 루트를 만들려고 했을까? 옛날의 그 발표 때나 지금이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10년 내지는 12년 동안 꾸준히,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정도의 땅굴을 파 내려왔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남이나 북이나 군이란 집단이 갖는 비합리성 탓일까? 암튼 죽어서 장교가 된 희한한 개 동상을 보고 그곳을 물러났다.

나오면서 전쟁기념관도 보고 싶었지만, 공사 중이어서 아쉬웠다. 전쟁의 아픔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다. 과거 전쟁 시기에 이긴 전투를 미화하고, 찬양하고, 상대방을 섬멸해야 하는 적으로 규정하기 위한 선동이 남기는 것은 불행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전쟁의 기억을 평화의 희망으로 바꾸어야 하는가는 우리 사회가 가진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던 분단 현장 기행.

나는 여기에 무엇을 찾아 왔던가. 무엇을 보고 싶었던 것인가. 해안면을 빠져 나오는 풍경은 환장할 정도로 아름답기만 하고, 평화롭기만 한데, 저곳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미확인지뢰지대이듯이 우리 사회 곳곳에 전쟁을 도발하고자 하는 지뢰들이 있음을 자각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곳곳이 전쟁이 이 사회에서 진정한 평화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아 보인다.

전쟁을 어떻게 기억할까?

급히 차를 달려 이제는 충남 아산의 유성기업으로 가야 한다. 이번 천릿길 일정을 짠 사람으로 너무 무리한 일정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벌써 열흘 넘게 돌아다니면서 만났던 인권의 현장,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에게 미안한 따름이다.

유성기업에 도착한 시간은 벌써 해가 떨어졌을 때다. 정문에서 방문증을 받아서 노조 사무실에 가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회사의 1차 징계가 강행됐다고 한다. 영동공장과 합쳐서 1차 징계대상자 106명 중 25명 해고, 출근정지 37명, 정직 28명, 견책 11명 등이었다. 2차로 60명, 3차로 132명에 대한 징계를 강행하겠다고 한다. 파업에 참여했던 모든 조합원을 징계하겠다는 게 회사의 방침이다. 이날 유성기업의 전 지회장, 비상대책위원장, 현 지회장 등을 순차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내일 당장 출근 저지당할 수도 있고, 벌써 용역들이 회사 안에 들어와 있다는 얘기가 들려서 어수선하다. 유성기업의 상황이 유동적이기 때문에 내일 천안으로 내려가기 전에 들러보기로 했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을 만난 얘기는 내일의 일기로 몰아서 써야겠다.

지회장의 안내로 한 식당에서 밥까지 얻어먹고 내일 이른 아침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출근 투쟁에 함께 하기 위해 에바다로 올라와 잠을 잤다. 에바다 기숙사인 해아래집에 들어서니 에바다 정상화 투쟁을 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내일 아침엔 아침 6시 반에 떠나기로 했다. 잠은 자야 하는데, 밀린 일들이 많아서 컴퓨터에 매달리다가 새벽 2시 넘어 잠들었다. 제법 새벽바람이 차다.

인권센터후원 홈페이지 http://hrfund.or.kr/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①] 10월 9일 제주도 강정마을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11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②] 10월 10일 제주 4.3평화공원, 강정마을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13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③] 10월 11일 광주 망월동, 인화학교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24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④] 10월 12일, 소록도 전북고속 천막농성장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25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지-경남 산청 합동 묘역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29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⑥] 원폭피해자협회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32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⑦] 강정보, 달성보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172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⑧] 부산 한진중공업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182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⑨] 상지대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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