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한 괴담과 선동이 민주주의를 뿌리째 흔든다”고, 동아일보가 지적하고 나섰다. 중앙일보도 “‘교통사고 날까 두려우니 운전하지 말자’는 식의 괴담”이라고 깎아내렸다. 조선일보도 “오해가 인터넷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한탄했다. 한미 FTA의 쟁점으로 떠오른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를 둘러싸고 ‘광우병 수준의 괴담’이 떠돌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2008년 당시의 광우병 논란이 ‘괴담’이었는지 여부는 일단 제쳐두고라도, 보수신문들의 이 같은 주장이야말로 오해와 왜곡에 불과하다. 누가 사실을 가리고 국민들을 선동하고 있는지 똑바로 봐야 한다는 뜻이다.

조선일보는 양자간투자협정(BIT)에서의 ISD와 FTA의 ISD에는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다는 정부의 주장을 받아쓰고 있다. 3일자 4면에 실린 기사에서 조선은 “정부는 BIT의 ISD든 FTA의 ISD든 외국기업이 국제기구에 한국정부를 제소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틀에 큰 차이가 없다고 반박한다”고 썼다.

   
▲ 조선일보 3일자 4면.
 

중앙일보도 거들었다. 중앙은 3일자 <터무니없는 ISD 괴담으로 국민 현혹 말라>는 사설에서 “ISD는 한미 FTA에만 있는 별종이 아니”라며 “글로벌스탠더드다. 외국에 투자한 기업이 현지에서 불이익을 당할 때 국제기구의 중재로 분쟁을 해결토록 한 제도다”라고 썼다. “우리나라도 이미 40여 년 전에 이 시스템을 받아들였다”며 “(우리나라와) FTA를 체결하지 않은 일본과 중국 등 81개국의 투자협정에도 포함돼 있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두 신문의 주장만 보면 ISD는 ‘글로벌스탠더드’이자 그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제도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나라도 한미 FTA 이전에 이미 여타 국가들과 ISD가 포함된 비슷한 투자협정(BIT)을 맺고 있는데, 그동안 문제된 적이 없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사실 왜곡이자 호도이다. 투자협정(BIT)와 자유무역협정(FTA)은 같지 않다. BIT에서의 ISD와 FTA에서의 ISD 역시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지금까지 여타 국가들과 맺었던 협정의 ISD 조항에서 문제가 없었다고 안심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의 주장대로 ‘기본적인 틀에서 차이가 없다’는 논리라면, ‘전면 무상급식과 단계적 무상급식은 무상급식을 하겠다는 기본적인 틀에서 차이가 없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BIT는 ‘투자의 설립 후 단계’에서 적용되는 협정이다. 관계 법령에 의해 정부의 인허가를 거쳐 이뤄진 외국인 투자가 그 적용 대상이다. 국내에 투자한 외국 기업이 차별대우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그들이 국내에 투자한 자산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장한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외국 기업에 파견되는 인력에 대한 체류 및 노동허가 보장, 세금 징수 및 자본 조달에 있어서의 차별대우 금지 등의 조치가 여기에 속한다. 상식적인 이야기다. 그런 최소한의 보장마저 없다면 어떤 외국기업도 섣불리 해외투자를 결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미 FTA는 잠재적 투자 가능성에 대해서도 외국 기업의 권리 보장을 요구한다. ‘투자의 설립 전 단계’에서 완전한 투자자유화 조치를 의무화 한다는 게 핵심이다. 단순한 ‘보장’이 아니라 ‘자유화’를 요구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에 따르면 국가는 자국의 국가 안보나 특정산업 지원을 위해 외국인 투자를 제한하거나 지분율을 제한하는 등의 정책을 펼 수 없게 된다. 외국인 투자자에 대해 현지인원 고용 의무나 기술이전 의무, 현지부품 사용 의무 등을 강제할 수도 없다. 아직 투자도 하지 않은 외국기업들이 ‘우리의 권리가 침해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기업이 실제로 투자를 할 것인지 아닌지는 여기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잠재적 투자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그만이고, 그들에게도 ‘완전한 투자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게 한미 FTA 협정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자국의 어떤 정책이 그 수많은 ‘잠재적 투자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늘 방어적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 중앙일보 3일자 사설.
 

또 한미 FTA는 관세 철폐 등의 무역 자유화 협정일 뿐만 아니라 투자 자유화 협정이기도 하다. 애초 관세 완화를 의미하는 무역협정에 불과했던 FTA에 미국이 새로 고안한 BIT를 더한 게 ‘미국식 FTA’라는 의미다. 미국은 2004년 11월에 발표한 개정된 BIT모델(BIT2004)에서 ‘투자’의 개념을 “모든 자산(every asset)”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는 주식이나 채권, 파생상품 등의 금융투자도 포함된다. 외국인직접투자(FDI)만을 ‘투자’로 봤던 기존의 BIT에서 한 발 더 나간 셈이다. 이러한 미국의 BIT모델은 이후 미국이 추진하는 FTA에 그대로 이식됐다. 상품에 대한 관세에 그치지 않고 ‘무역 관련’ 투자와 지적재산권, 농산물, 제약 등을 포괄하는 미국식 FTA를 두고 사실상 ‘경제통합 협정’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첫 사례가 바로 1992년 체결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다.

따라서 보편적 BIT에서의 ISD와 한미 FTA에서의 ISD에는 마찬가지로 질적인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권리 보호의 범위가 다르고, 보호 대상이 되는 기업의 규모가 다르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지식경제부와 외교통상부는 기업형 슈퍼마켓(SSM) 규제를 논의하던 국회에 한EU FTA를 위반할 가능성이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한EU FTA 협정에서 유통업을 개방하기로 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인데,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잠재적 투자자’들의 권리보호 요구 가능성만으로도 국내의 법과 체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한국이 칠레 싱가포르 인도 페루 등과 맺은 FTA 6개와 일본 중국 등과 맺은 81개 투자협정에 ISD 조항이 있다. 한EU FTA에는 ISD가 없지만 대신 한국은 EU 27개 회원국 중 22개국과 ISD와 유사한 투자보호협정(BIT)을 맺었다”고 뻔뻔하게 강변하고 있다.(11월 2일자 4면)  중앙일보도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비슷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누가 누구를 호도하고 있다는 건지 알 수 없는 대목이다. 과연 ‘1등 신문’ 조선일보와 ‘일류 신문’ 중앙일보는 이 사실을 몰랐을까.

   
▲ 조선일보 2일자 4면.
 

앞서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도 “BIT상의 ISD와 FTA 에서의 ISD는 전혀 다른데 교묘하게 FTA의 ISD의 폐해를 우리나 야권의 전문가들이 얘기를 하면 외통부나 한나라당에서 BIT의 ISD로 호도해서 왜곡시켜서 답을 하고 있다”면서 “기사에 나온 것을 보면 알고도 그렇게 썼는지, 모르고 그렇게 썼는지 또 내용이 뒤바뀐 경우가 많다”고 정부여당과 언론을 비판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한 술 더 떴다. 동아는 3일자 1면과 4면에서 민주당 정동영 의원이 제기한 ‘과테말라 철도 논란’을 반박하고 나섰다. 앞서 정동영 의원은 “과테말라 철도운영 사업권을 딴 미국 회사가 철로 위 불법 거주자들을 쫓아내지 않는다고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서 제소한 사건들이 수십, 수백 건”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동아는 과테말라 철도 논란은 1997년 과테말라 정부가 미국 자본이 중심이 된 철도개발공사(RDC)에 철도 및 부속시설 운영권을 넘기면서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1단계 공사를 마친 RDC가 자금난으로 공사를 중단했고, 이에 과테말라 정부는 2004년 철도 운영권을 회수해 자국 투자자에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RDC는 이에 강력히 반발했고, 과테말라 정부는 ‘더 이상 국가가 손해를 볼 수 없다’며 자국 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자 RDC는 과테말라 정부의 조치가 중미자유무역협정(CAFTA)에서 금지하고 있는 ‘간접수용’에 해당한다며 2007년 ISD를 활용해 과테말라 정부를 대상으로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중재를 신청했다. 여기까지가 동아일보의 설명이다.

동아일보는 정동영 의원의 주장대로 원주민 퇴거 문제를 둘러싼 논쟁 때문에 ISD 제도가 악용된 게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는 “철도 운영권 다툼에서 불거진 부차적인 논란일 뿐 ISD 분쟁의 핵심 내용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 동아일보 3일자 1면.
 

그러나 동아의 말대로 원주민 퇴거를 둘러싼 논란이 아니라 과테말라 정부와 미국 자본인 RDC 간의 단순한 철도 운영권 다툼이라고 하더라도 문제의 핵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해당 국가의 법률이 관장하는 영토에서 투자활동을 하면서도, 투자자는 그 나라 법의 통제를 벗어나 얼마든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문제 말이다. 이유를 불문하고 애초 RDC가 과테말라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CAFTA에 포함된 ISD 제도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투자자가 ‘간접수용’의 원칙을 적용해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하면, 투자자는 해당 국가의 법원이 아니라 제3의 중재기구에 소송을 낼 수 있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동아가 얘기하는 “ISD 분쟁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동아는 ‘ISD 제도의 핵심 문제점’을 정말 몰랐던 걸까.

같은 기사에 등장하는 볼리비아 벡텔 사건에 대한 동아의 반박도 마찬가지다. 과연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는 있는 건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다시 한 번 동아의 설명을 그대로 따라가 보자. 볼리비아 정부는 1999년 볼리비아 제3의 도시인 코차밤바시(市)의 수도사업체인 ‘세마파’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IMF의 권고(?)로 한 해 전 발표한 공공기관 민영화 조치의 일환이었다. 미국계 건설사인 벡텔이 주도한 컨소시엄 업체가 입찰에 참여했다. 이들은 입찰 조건으로 볼리비아 정부에 법 개정을 요구했다. 기존 상수도를 모두 불법으로 규정하고, 일반 시민이 지붕에 빗물통을 설치해 빗물을 받으려면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등의 ‘황당한’ 내용이었다. 볼리비아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고, 2만 달러도 안 되는 헐값에 40년간 독점적으로 물을 공급하고 관리하는 권한을 넘겨줬다. 그러나 영업개시 1주 만에 수돗물 값은 4배 가까이 올랐고, 지붕에 설치한 빗물받이 통에는 벌금이 매겨졌다. 참다못한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고, 계엄령이 선포되는 등 혼란을 겪은 끝에 정부는 민영화 방침을 취소했다. 그러자 벡텔은 즉각 볼리비아 정부를 ICSID에 제소했다.

동아일보는 이를 두고 “무능하거나 부패한 정부와 해외 사업자 간의 결탁에 가까운 계약으로 발생한 사건을 마치 ISD 제도 자체의 문제인 것처럼 호도한 것”이라고 ‘호도’하고 나섰다. 극단적 민영화의 교훈으로 삼을 만한 하나의 사례일 뿐, 이를 ISD 제도 자체의 문제로 오해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주장이자 오해이고, 왜곡이다.

   
▲ 동아일보 3일자 4면.
 

벡텔이 볼리비아 정부를 상대로 국제소송을 낼 수 있었던 건 ISD 제도의 존재 때문이다. ISD 제도 자체의 문제라는 뜻이다. 그러나 ISD가 없었다면, 볼리비아 정부가 시민들에 반발에 못 이겨 민영화를 취소한다고 해서 벡텔이 볼리비아 정부를 상대로 무려 2600만 달러짜리 ‘국제 소송’을 걸 수는 없다. 경향신문 4일자 4면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이 금액은 당시 볼리비아 공립학교 교사 1만2000여명의 1년 치 봉급 총액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경향은 같은 기사에서 “공공재인 물을 매각하고 정부가 이를 규제하지 못한 데에는 투자자국가소송제가 뒤에서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며 동아의 ‘헛발질’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동아는 해당 기사의 제목(3일자 4면)을 로 뽑았다. 민영화로 인한 시민들이 반발이 있어도 ISD 제도 때문에 국가가 마음대로 민영화를 철회할 수 없다는 게 문제의 핵심인데, 이게 어떻게 무관하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놓고 동아는 4일자 사설에서 “인터넷 공간을 점령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괴담’” 운운하고 있다. “그야말로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데, 과연 누가 혹세무민으로 시민들을 우롱하고 있는지 의아한 대목이다.

동아의 사설 마지막 단락은 가히 명문이라 할 만 하다. 이쯤에서 다른 누구보다 먼저 동아일보에게 그 말을 되돌려 줘야 하는 게 아닐까.

“왜곡된 메시지라도 목적만 이루면 그만이라는 행태는 공론 민주주의의 뿌리를 흔드는 죄악이다. 민주주의를 발전 정착시키려면 모든 국민 사이에 진실이 통해야 한다. 거짓이 진실을 압도하는 상황에서는 국민이 올바른 판단과 선택을 하기 어렵다.”

   
▲ 동아일보 4일자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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