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7월 어느 날 시안(西安 서안) 치시옌좡(七賢庄 칠현장)에 있는 8로군 사무실. 20대로 보이는 두 여성이 사무실에 들어섰다. 장제스 통치구역인 시안에는 국공합작 이후 저우언라이, 보구,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鄧潁超 등영초) 등이 중공 대표단으로 머물면서 국민당과 업무를 조율하고 있었다.

이 두 여성은 공산당원 쉬밍칭(徐明淸 서명청)과 상하이에서 온 영화배우 란핑(藍苹 남평)이었다. 쉬밍칭은 일을 보고 있던 덩잉차오와 인사를 나눈 뒤 란핑을 소개했다. 란핑은 공손하게 덩잉차오에게 인사를 하고 가죽 가방을 열어 자신이 출연한 영화집을 건넸다. 덩잉차오는 란핑을 훑어본 뒤 "당신이 바로 상하이 영화계의 인기스타 란핑이구먼!"이라고 했다.

덩잉차오는 이어 "이 일은 보구 동지의 업무분야다. 마침 자리를 비웠다. 당신들은 영화집을 여기에 놓고 이틀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 란핑은 이틀 뒤 혼자 8로군 사무실을 찾아갔다. 저녁 무렵 돌아온 란핑은 쉬밍칭에게 "보구 동지와 긴 얘기를 나눴다. 내 상황을 자세히 말했다. 샤오위(小兪; 黃敬 황경을 말함) 얘기를 했다. 그가 승낙했다"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얼마 뒤 란핑은 8로군 시안 사무실로 이사했다. 7월 하순 어느 날 란핑은 쉬밍칭을 찾아와 "내가 내일 옌안에 가게 됐다. 보구 동지가 알려줬다"며 기뻐했다. (주석 170)

   
마오쩌둥의 네번째 부인이자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장칭이 란핑이라는 이름으로 영화배우 활동하던 시절의 사진.
 
란핑은 쌀을 실은 트럭을 타고 시안을 출발했다. 도중에 큰 비가 내려 도로가 끊기는 바람에 며칠을 기다렸다. 차량통행이 계속 미뤄졌다. 란핑은 할 수 없이 말로 갈아타고 노정에 나서 힘들게 옌안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뤄촨(洛川 낙천)에 저녁 무렵 도착했다. 이때는 마침 중공중앙 정치국회의가 뤄촨에서 열려 끝난 날이었다. 이 지역 사령관 샤오진광(肖勁光 소경광)과 부인 주중즈(朱仲芷 주중지)가 란핑을 마오의 비서인 예즈룽(葉子龍 엽자룡)에게 인사시켰다. 예즈룽은 이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171)

"중앙과 군사위원회 영도들이 회의가 끝나 각각 차를 나눠 타고 옌안에 갈 때 란핑은 마오쩌둥이 타고 있던 트럭을 타고 갔다. 마오는 운전석 옆에 앉고 란핑은 트럭 뒤 칸에 타고 옌안에 갔다."

옌안에 도착한 란핑은 옌안의 제3초대소에서 잠시 거주했다. 란핑은 신원확인 등의 심사를 받을 때 기록할 이름 난에 예명인 란핑이나 원래의 이름 리윈허(李雲鶴 이운학) 대신에 '장칭(江靑 강청)'이란 새로운 이름을 써넣었다. 어떤 사람들은 '장칭'이라는 이름은 두 가지의 뜻을 품고 있다고 했다. '장칭'은 구절양장처럼 험난했던 자신의 기구한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밝고 맑은 삶을 염원하는 뜻의 개명이라는 것이다. 하나는 '푸르름은 쪽에서 우러나오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靑出於藍而勝於藍 청출어람이승어람)'에서 예명인 란핑(藍苹)의 쪽인 '란(藍)'을 딛고 푸르름의 '칭(靑)'으로 거듭난다는 소망을 내포하고 있다.

두 번째는 당나라 때의 고시에서 한 구절을 따온 '강물 위에 두드러진 푸른 봉우리(江上數峰靑 강상수봉청)'에서 '장(江)'과 '칭(靑)'을 따와 합자했다는 얘기다. '장칭'으로 개명한 '란핑'은 옌안에 온 다음날에 샤오진광의 부인 주중즈의 안내로 마오의 거처를 찾아가 때마침 마당에서 산책하던 마오를 만나 인사를 나눴다. 마오와 장칭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장칭은 이듬해 마오와 결혼해 40년 해로한 가장 오래 함께한 부인이었다. 21살의 나이 차였다. 마오는 만년에 네 번째 부인인 장칭을 '짐보따리(包보; 바오푸)'로 여길 정도로 평생 정치적 부담을 안고 살았다. 이들은 영욕(榮辱)을 함께 한 '영욕 부부'라 할 수 있다.

장칭은 1914년 산둥성(山東省 산동성) 주청(諸城 제성)현 둥관(東關 동관)의 목공 수공업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장칭이 소학교에 다닐 때 교장 선생이 키가 크고 몸매가 호리호리한데다 두 다리가 학처럼 가늘고 길어 '리윈허(李雲鶴 이운학)'라고 지어주자 '진하이(進孩 진해)' 대신에 이 이름을 썼다. 장칭의 아버지는 두 부인을 취했는데  장칭은 서출이다. 아버지는 성격이 거칠어 툭하면 장칭의 어머니를 손찌검했다. 폭언과 폭행을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12살의 장칭을 데리고 집을 나왔고 모녀는 친척에 의탁했다. 장칭은 친척을 따라 톈진(天津 천진)으로 갔다가 지난(濟南 제남)으로 옮겨 다녔다.

장칭은 그곳에서 극단에 들어가 연극과 고전음악 등을 배웠다. 장칭은 극단 원장이자 칭다오(靑島 청도)대학 교무처장인 사회적 유력인사인 자오타이모우(趙太모)의 도움으로 칭다오대학 도서관 직원으로 일하면서 중문과 청강생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장칭은 이때 물리학과에 다니던 19살의 위치웨이(兪啓威 유계위)를 만났다. 위치웨이는 자오타이모우의 처남으로, 그의 누나 위산(兪珊 유산)은 당시 중국 연극계의 유명한 배우였다. 장칭은 위산을 선망했고, 그를 찾아가 연극수업을 받았다. 그러다 위치웨이와 눈이 맞아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주석 172)

1931년 '9.18 만주사변'이후 장제스의 일본침략에 대한 소극적 대응에 반발해 전국 각지에서 '일본침략 분쇄', '장제스의 부저항주의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명문가 출신인 위치웨이는 이때 칭다오대학 학생들을 이끌며 동맹휴학을 일으키는 등 학생운동의 우두머리였다. 위치웨이는 그해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장칭은 칭다오 좌익 연극원동맹 극단인 '하이오우쥐서(海鷗劇社 해구극사)'에 들어갔다.

   
마오쩌둥과 장칭.
 
열애에 빠진 위치웨이와 장칭은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장칭은 1933년 2월 위치웨이의 소개로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해 7월 중공 칭다오시위원회 선전부장인 위치웨이는 배반자의 밀고로 체포되고, 장칭은 상하이로 도망갔다. 장칭은 위치웨이 누나 위산의 부탁으로 상하이 좌익 작가연맹, 희곡 작가연맹의 창시자이자 영도자로 위명을 떨치고 있는 톈한(田漢 전한)의 문하에 들어갔다. 톈한의 동생 톈위안(田沅 전원)은 형의 부탁을 받고 장칭을 ‘선껑공쉐퇀(晨更工學團 신경공학단)에서 교원으로 일하도록 했다.

이즈음 위치웨이는 장칭에게 편지를 보낼 때 말미에 ’샤오위(小兪 소유)‘라고 썼는데 이후 ’황징(黃敬 황경)‘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는 신중국 건국 초기 톈진시장, 중공 톈진시위원회 서기가 되었다가 이후 철도부장을 역임했다. 선껑공쉐퇀은 비정규학교로 월급은 없고 숙식만 제공받았다. 장칭은 주로 톈한이 편극한 ‘너의 채찍을 놓아라’ 등의 연극을 인근 농촌에 돌아다니며 공연하면서 구국항일운동을 선전하는 일을 맡았다.

당시 공쉐퇀은 여성들이 적어 쉬밍칭, 장칭, 리수전(李素貞 이소정) 등 3명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다락방에서 황소바람이 술술 들어오는 공간에 침대도 없어 맨바닥에 거적을 깔고 잠을 자는 등 고단한 생활을 해야 했다. 장칭은 같이 생활을 하던 3살 위인 쉬밍칭을 따랐다.

당시 장칭은 단발머리에 쪽빛 치파오(旗袍 기포; 중국 여성의 전통 옷으로 다리 옆이 터졌음)를 즐겨 입었으며 화장을 하지 않았다. 활발한 성격으로 노래, 연기를 했고 극단원들과 잘 어울렸다. 1933년 겨울, 위치웨이가 보석으로 풀려난 뒤 극단으로 찾아와 1934년 초 항일운동으로 또 다시 체포위기에 몰리자 함께 베이핑(北平 북평; 베이징)으로 달아날 때 까지 장칭과 위치웨이는 봄날과도 같은 짧은 달콤한 사랑을 나눴다.

170) 江靑嫁毛澤東之前坎坷人生 港澳臺 新華網
171) 江靑和毛澤東第一次見面的眞實情況 王凡 人民網-文史頻道
172)江靑嫁毛澤東之前的坎坷人生 港澳臺 新華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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