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은 인권센터 건립 후원을 위해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가 페이스북에 올린 ‘천리길 일기’를 연재합니다. 인권센터는 최저 생계비도 받지 못하고 활동하는 인권단체들을 위해 최소한의 활동 공간을 지원하자는 취지에서 건립되는 국내 최초의 종합인권상담소로서, 박 이사는 오는 12월 준공을 목표로 10억 원의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습니다. ‘천리길 일기’는 그가 9일부터 23일까지 전국을 돌면서 현장의 인권 실태를 기록한 것입니다.

5. 10월 13일 경남 산청 합동 묘역

나는 무엇을 찾아서 길을 떠났을까? 인권센터를 알리는 것? 우리 사회 인권의 현장을 찾아가서 우리 사회 인권문제를 알리는 것? 그리고 인권과제를 고민하는 것? 어느 것이나 길을 떠난 이유일 것이다. 오늘의 주제는 학살이다. 한국 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진 곳들을 찾아 나섰다.

전주에서 콩나물 국밥으로 맛나게 아침을 먹고 전북평화와인권연대의 두 활동가와 이별, 그리고 산청으로 넘어와서 거창평화인권예술제를 준비하고 있는 한대수 씨를 만났다. 그의 차에 분승하여 처음 찾은 곳은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214-1번지 소정골 일대의 학살지다. 길을 안내한 이는 이 지역에서 군의원을 두 차례 역임했던 서봉석 씨였다. 그가 아니었으면 학살지를 제대로 둘러보지 못할 뻔했다. 도로에서 학살장소였던 곳까지 500m를 단감, 밤나무 과수원 길을 따라 올라갔다. 길바닥에는 밤들이 지천으로 널렸고, 곳곳에 홍시가 풀에 떨어져 있었다. 물들기 시작한 단풍들과 풍성하게 열린 감과 수확철이 지나 풀밭에 나뒹구는 밤들을 보면 너무도 평온하기만 한 풍경이다. 그냥 지나친다면 이곳에 그토록 끔찍한 학살이 있었을 것이라고 누가 알까. 그것도 60년도 넘은 그 시절에.

소정골에서 죽어간 이들은 누구인가?

   
▲ 학살 장면을 묘사한 작품. 박래군은 "전쟁의 위협도 없었고, 빨치산도 없었던 이곳 지리산 산간마을에서 집이 불타고, 사람이 죽는 대형 학살이 일어났다. 주민들을 보무 통비문자로 몰아서 학살한 것"이라고 밝혔다. ⓒ박래군
 
1951년 2월 하순에 군인들이 버스에 탄 이들을 이 소정골로 끌고 올라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어디서 끌려왔는지 지금까지 아무도 모른다. 이 동네 어르신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 지역 운동가들이 MBC와 함께 가장 큰 매장지를 발굴하여 세상에 알리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경남대 사학과 이상길 교수팀과 함께 유해를 발굴하였던 게 2008년 7월에서 10월 사이였다.

이곳에서 6개의 대형 매장지에서 유해를 발굴하였는데, 제대로 발굴된 숫자만 200구가 넘었다. 학술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유해가 이 정도이지 발굴 과정에서 훼손된 유해까지 합하면 아마도 5백구가 넘을 것이라는 게 서씨의 설명이었다. 6개의 대형무덤은 밤나무 아래 가장 큰 무덤이 있고, 그리고 건너편 인근 산등성이에 흩어져 있었다. 지금은 평탄 작업을 해놓은 밤나무 밑 가장 큰 매장지에서는 아마도 200명 정도가 한꺼번에 묻혔을 거라고 한다. 발굴한 뼈가 수북이 쌓였다고 하니 말이다.

다른 5곳의 매장지에는 움푹 패인 구덩이마다 보랏빛 쑥부쟁이가 한 가득 피었다. 좀 떨어진 매장지 앞에는 예전에는 다랑치 논으로 쓰였던 조그만 늪지가 있고, 그 늪지에는 멧돼지 가족들이 뒹굴고 놀다간 흔적이 역력하다. 이곳까지 끌려온 이들은 누구일까? 유해 발굴 때 탄피와 탄두만이 아니라 옷가지와 비녀, 숟가락 등이 같이 나왔다고 하니 어디 피난 가는 것으로 알고 군인들에게 끌려나왔다가 죽임을 당했던 것 같은데, 아직도 이곳에서 죽어간 이들을 알 수가 없다니….

주민들이 해동이 되어 그해 봄에 이곳에 올라왔을 때 매장지가 짐승들에게 파헤쳐져 시신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짐승들에게 물어 뜯겼던 시신들을 수습하여 매장지에 봉분을 올렸지만, 감히 누구도 이곳에 학살돼 매장된 이들을 찾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런 억울한 죽음들이 이 산하에 곳곳에 얼마나 많을까? 2005년 말에 확인된 전쟁 학살지만 669건, 남한 땅 곳곳에서 학살이 자행되었을 것인데 말이다.

‘견벽청야’ 작전과 산청․함양, 거창학살

   
▲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214-1번지 소정골의 쑥부쟁이 가득한 구덩이 모습. 박래군은 "이곳에서 1951년 2월 하순에 5백명도 넘는 이들이 학살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여기 누가 끌려와 죽었는지를 모른다. 그리고 학살을 자행한 군부대는 어디인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런 죽음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이 땅 속에 묻혀 있을까"라고 밝혔다. ⓒ박래군
 
1951년 2월 7일, 국군 제11사단 제9연대는 산청과 함양에서 학살 행진을 했다. 하루 동안에 705명을 학살했고, 이 부대는 2월 9일에서 11일 사이에 거창으로 이동해서 719명을 학살했다. 제9연대의 1대대, 2대대는 외곽 경비를 맡아서 학살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다시 죽였고, 3대대가 직접 학살의 임무를 수행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지리산의 빨치산과 내통한다는 통비분자로 몰려서 죽임을 당했다.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이라 이름 붙여진 그 학살은 이미 그해 봄 국회에서 논란이 되어 진상조사가 진행되었는데, 국회 진상조사단의 조사마저 군인들이 공비로 가장하여 위협하는 바람에 현장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심지어는 학살 장소에 계엄령을 내려서 주민들이 접근조차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 3년 동안 그 골짜기에 주검들이 나뒹굴었는데, 거창의 박산골에서 죽임 당한 517명의 유골이 누구의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어서 뼈가 큰 것을 남자, 중간 것은 여자, 작은 뼈는 아이들, 이런 식으로 구분하여 합묘를 썼다고 한다.

사람들을 몰아서 골짜기로 끌고 가 기관총을 설치하고는 죽이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고, 심지어는 “살아 있는 사람은 일어나라. 죽이지 않겠다”는 군 지휘관의 말을 듣고 일어난 이를 사살하였다고 하니…. 어느 유족은 한 곳에서 아버지와 세 형과 함께 구덩이에 들어갔다가 살아났고, 다시 한 번 더 마을 전체가 불타고 죽는 와중에도 살아났는데, 어렵게 성장하고도 연좌제로 인해 직장 취직도 못하고 수십 년 한스러운 세월을 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산청과 거창을 들르시는 분들은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http://schhumo.sancheong.ne.kr/)과 거창사건추모공원(http://case.geochang.go.kr/)을 꼭 들러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이 두 곳 중에 한 곳을 들르면 이들 학살 사건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골로 간다”는 말의 의미

이런 비극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시대의 비극이라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참혹한 기억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사람들은 학살지의 주민들만이 아니었다. 유족들도 말을 하지 못했다. 산청 지역의 유족회는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뒤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을 살아야 했고, 유족들이 만들어 세웠던 비를 정권이 깨버리기까지 했다. 추모공원에 진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당시를 살았던 이들의 기억 속에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방치된 진실을 파헤치고 그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해왔던 많은 이들의 노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노력 덕에 수십 년 땅속에 묻혔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 게 1980년 말부터였다. 지역의 이런 운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그나마 결실을 맺어 진상규명 작업이 정부 차원에서 지난 정부까지 진행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정권에 들어와서 이 모든 상황은 바뀌었다.

이승만이 찬양받고, 박정희가 존경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그들이 저질렀던 수많은 학살들을 그대로 묻고, 역사를 다시 왜곡하려 발버둥치는 그들은 누구인가. 이제 겨우 햇빛을 보기 시작한 학살의 진실을 그대로 묻으려는 이들은 누구이며, 그들의 목적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또 묻자. 당시 학살을 자행한 제11사단의 연대장 등은 그나마 법정에서 죄를 받기도 했지만, 11사단장 최덕신은 이후 화려하게 공직을 수행하다가 1986년 북으로 넘어가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 북한이 인민의 공화국이라면 인민을 학살한 그를 환대하고, 고위직을 부여한 일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쩌다 보니 천리길이 역사의 죽음을 따라가는 길이 되었다. 제주에서 4.3의 비극을 마주했고, 그 비극이 지금 강정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 비슷한 시기의 이곳 지리산 자락에서 벌어졌던 전쟁학살을 보았다. “골로 간다”는 말은 곧 죽음을 말한다. 골로 가서 죽은 이들의 원혼이 떠도는 이 강산에서 다시 1980년 군인들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다.

그리고 지금은? 1년이면 1만5천명이 자살하는 OECD 국가 제1위의 자살률의 나라에서 우리는 산다. 현재의 이 죽음의 구조와 과거 학살의 구조는 다른 것인가? 그때 학살을 자행했던 세력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결국은 그 죽음의 구조 위에서 신음하다가 죽어가는 것은 아닌가? 이런 역사적인 경험을 외면한 채 우리는 어떤 인권을 말할 수 있을까?

천리길, 가는 길마다 서려 있는 이 원한을 난 외면할 수 없다.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지금까지 너무도 강고한 이 반인권의 구조를 깨뜨리기 위해 아마도 난 이 길을 가는지 모른다. 지금은 비록 다섯 명이 승합차를 타고 도는 길이지만, 내년에는, 그 다음 내년에는 더 많은 사람들과 길을 떠나고 싶다.

하지만, 천리길이 슬픔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를 가나 세상이 외면할 때 진실을 밝히기 위한 선배 인권운동가들의 노력이 배어 있지 않은가. 그들의 길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한 천리길, 다시 길을 떠나보자.

인권센터후원 홈페이지 http://hrfund.or.kr/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①] 10월 9일 제주도 강정마을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11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②] 10월 10일 제주 4.3평화공원, 강정마을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13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③] 10월 11일 광주 망월동, 인화학교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24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④] 10월 12일, 소록도 전북고속 천막농성장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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