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은 인권센터 건립 후원을 위해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가 페이스북에 올린 ‘천리길 일기’를 연재합니다. 인권센터는 최저 생계비도 받지 못하고 활동하는 인권단체들을 위해 최소한의 활동 공간을 지원하자는 취지에서 건립되는 국내 최초의 종합인권상담소로서, 박 이사는 오는 12월 준공을 목표로 10억 원의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습니다. ‘천리길 일기’는 그가 9일부터 23일까지 전국을 돌면서 현장의 인권 실태를 기록한 것입니다.

4. 10월12일 소록도, 전북고속 천막농성장

광주에서 소록도로, 다시 소록도에서 전주로. 코스가 이상하게 꼬여서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위로, 300km 넘는 거리를 이동했다. 지금은 전주시외버스터미널 옆에 마련된 전북고속 파업 농성장. 바로 옆이 터미널이고, 앞의 대로를 버스와 승용차를 대신해 오토바이들이 굉음을 울리며 점령했다. 천막 옆으로는 취객들이 게걸음으로 혼잣소리를 하고 지나가고. 오랜만에 길거리 농성장에서 잠을 청한다. 길거리 천막농성장은 너무도 익숙한 곳이 아니었던가. 오늘도 새벽 1시 넘게 술자리와 대화, 이제 일기를 쓰고 자야 하는데 너무 졸립다.

인간이 존재할 수 없었던 소록도의 슬픈 역사

   
▲ 검시실 안쪽에 있는 단종대 모습. 박래군은 "일제가 한센인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사용한 기구다. 남성을 이 대 위에 묶어놓고 메스로 거세했다. 한편으로 기울어 있는 이 대 위의 양끝에 홈이 패어 있고, 아래 쪽 가운데에 핏물이 흐르도록 구멍이 뚫려 있다. 잔인했던 한센인 수난의 증인이다"라고 밝혔다. ⓒ박래군
 
소록도, 작은 사슴의 섬 입구에 있는 보리피리 휴게소에서부터 시작이다. 이름하여 수탄장(受嘆場), 휴게소 앞에 철조망이 쳐져서 한센인 환자와 미감염인들의 구역을 갈랐다. 1950년에서 70년 사이에는 감염된 부모와 미감염된 아이들을 분리하여 수용했고, 한 달에 한번 월례만남을 갖게 했단다. 손도 잡지 못하고, 2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양쪽에 일렬로 늘어서서 얼굴만 보고 헤어져야 했던 그 부모와 자식들, 서로 돌아서며 눈물과 탄식을 쏟았다고 해서 수탄장이라고 불렸다. 소록도는 섬 전체가 이런 기가 막힌 수탄장의 역사를 안고 있었다.

김명호 원생자치회장은 20년 전에 감염인이 되어 이곳에 들어왔다. 겉 보기에는 한센인임을 모른다. 그는 아직도 녹동 근처의 음식점에서는 한센인들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한다. 한센병이 전염병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차별하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원망을 살짝 비쳤다. 그는 자치회장으로 원생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들을 많이 해왔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피해배상 소송도 그가 발 벗고 나서서 성사됐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중앙정부의 복지부 장관과 담판을 지어서 예산을 확보해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580명 소록도 한센인 원생들의 대표답게 병원 측이 자치회를 인정하지 않고, 자치회 규정조차 의논조차 없이 맘대로 고치는 태도에 불만이 많았다. 그와 가진 대담은 아래에 김정아 씨(인권재단 사람 사무처장)이 정리한 글로 대신한다.

지금은 외지인들의 방문이 제법 많은 곳이 됐지만, 소록도는 1916년 이후 80년 넘게 외지인들이 들어가면 안 되는 금지구역이었다. 그런 탓에 자연훼손이 안 된 채로 섬이 유지되고, 일제 때 원생들을 동원해 가꾼 수목과 공원이 제법 근사하게 보존돼 이제는 관광객도 많이 찾는 곳이 돼 버렸다. 그 관광객들이 고립과 차별에 울던 고통스러운 한센인의 역사를 얼마나 알고 갈지 모르지만.

병원에서 중앙공원 올라가는 길에 있는 두 동의 붉은 벽돌집은 겉보기에는 담쟁이 덩굴이 벽을 덮고 있는 어찌 보면 정겹기까지 한 건물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들어가는 순간 큰 충격에 휩싸이는 곳, 거기 한센인들의 수난의 역사 단면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꼭 유심히 그곳을 둘러보시라. 일제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게 가했던 짓을 보시라.

검시실은 두 칸으로 나눠져 있다, 검시실은 한센인이 죽으면 가는 곳이다. 중앙에 해부대가 놓여 있고, 벽에는 장기를 떼어 보관하던 수납장이 있으며, 그 옆에는 일제 때 사용했던 것인지 들것이 천이 상한 채로 놓여져 있다. 일제는 한센인들이 사망하면 그들의 시신을 해부하고, 실험용으로 사용하거나 곧바로 화장터로 보냈다. 만령탑은 그 유골들을 보관하던 곳이라고 한다. 당시의 소록도 한센인들을 세 번 죽는다고 했다. 첫 번째는 한센병이 발병한 것이다. 동네에 살 수 없어서 움막이나 다리 밑에서 지내야 했고, 가족들이 밥을 날라다 주어서 연맹했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영구장애를 얻고, 후유증에 실려야 했던 이유도 이런 차별에 있었다. 두 번째는 죽은 뒤에 시신이 해부되는 것이다. 가족의 동의? 물론 없다. 곧바로 이 검시실로 끌려와서는 시신이 난자된다. 세 번째는 화장되는 것.

검시실에 안쪽으로 붙어 있는 곳이 단종대다. 일제는 한센인의 씨를 말린다고 남자 한센인들을 거세했다. 그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비스듬히 경사진 나무로 만든 대 위에 대상자를 묶어 놓고 불알에 메스를 대서 거세했다. 사진을 보시면 알겠지만, 그 나무 대의 양 옆에는 홈이 패어 있고, 아랫부분 중간 지점에 구멍이 하나 뚫려서 핏물이 흘러내릴 수 있게 했다. 생으로 거세당하는 남자들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벽면에 걸린 단종대란 시는 그 자체가 절규였다. 이 부당한 짓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었겠는가.

   
▲ 박래군은 "소록도 병원이 원생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감금실 복도에 섰다. 수탄의 역사 소록도 감금실'이라고 썼다. 일제에 수난을 당했던 한센인들은 해방 이후에도 수난을 당했다. 소록도 입구는 수탄장이라고 불렸던 곳이 있었다. 부모와 아동들을 격리해놓고 한 달에 한번 멀찍이 월례면회를 하도록 했다. 탄식의 장소, 소록도는 한센인들의 탄식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래군
 
소록도에서 저항은 곧바로 감금실 행이었다. 두 동의 건물이 H자 형으로 배치된 감금실. 그곳에서 매타작을 받다가 죽고, 소록도 병원장이 제멋대로 내리는 징벌을 감내해야 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 속에서 신경통으로 무지한 고통을 당할 때/ 하도 괴로워서 이불껍질을 뜯어/ 목매달아 죽으려고 했지만/…저희들은 반성문을 쓰라고 날마다 요구받았어도/ 양심을 속이는 반성문을 쓸 수가 없었노라.” 얼마나 괴로웠으면 이불을 물고 자살할 생각을 했을까.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중앙공원을 일군 이는 4대 원장 수호였다. 그는 너무도 혹독하게 원생들을 동원해서 작업에 내몰았다. 그는 자신의 동상을 세워놓고, 매월 20일 원생들을 강제로 참배하도록 했다고도 한다. 1942년 6월 20일. 원생 이춘상은 그런 그를 칼로 찔러 살해하고 사형당해 죽었다. 그런 그가 원생들을 동원해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 가져온 수목들을 식수하게 하고 관리하게 하고, 바로 그 옆에 벽돌공장에서 가혹한 노동에 내몰았다. 그런 수호 원장 덕에 그리고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한센인 원생들의 노력 덕에 우리는 기막히게 잘 자란 아름드리 수목들이 자리하고 있는 오늘의 중앙공원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일제로부터 해방됐다고 한센인이 당했던 냉대와 차별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한센인에 대한 학살이 소록도에서도 그리고 전국의 정착촌에서도 일어났고, 그렇게 학살을 당하고, 노동착취를 당하고도 어디에 호소할 수 없었던 한센인들이다. 이제는 주사 한 방이면 99%가 치유된다고 하는데, 무지한 인간들이 문둥병이라면서 그들을 인권의 사각지대로 내몰았다.

그들 앞에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우리 사회가 소수자들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모든 짓에 대해 성찰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하운의 필-닐니리 풀피리 소리가 한없이 서럽게 들리는 것 같고, 한센인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것만 같은 소록도, 그곳에 예배 시간을 알리는 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린다. 종교는 그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줄 수 있을까. 한센인들이 종교에 매달려서라도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

300일을 넘긴 전북고속 버스 파업

   
▲ 전북고속 파업 농성장 모습. 박래군은 "전북고속 노동조합은 오늘로 천막농성 472일째, 파업투쟁 309일째다. 85명의 조합원이 파업 대오를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래군
 
민주노총 공공연맹 산하의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 전북고속 지회의 조합원은 85명이다. 그들은 지난해 6월 28일 천막농성을 시작했고, 12월 8일 전주 시내의 5개 버스 사업장과 함께 총파업에 들어갔다. 다른 사업장들은 지난 5월 2일 파업을 복귀했지만 전북고속만 파업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간 날은 파업 309일째이고 천막농성 472일째다. 장기투쟁 중이다. 황의종 사장은 법원의 명령조차 거부하고, 국회 국정감사와 청문회에도 불려나갔지만 완강하다. 막무가내로 조합과의 단협을 거부하고 있는 사장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들과의 단란한 저녁식사 뒤에 연행과 체포, 수사받는 요령에 대해 조합원들을 상대로 강의했다. 그들에게 생계 문제와 함께 벌금 문제는 가장 힘든 문제이기 때문이다. 쫄지 않고, 수사를 잘 받는 법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북고속 노동자들은 이 파업 과정을 통해 다른 세상을 보고 있다. 그동안 무시당하고, 속아 살아왔던 세월이 억울하다는 그들. 그들은 희망의 버스에도 동승하고, 이소선 어머님 장례에 가서 상여도 메었다. 단식, 민주당 중앙당사 점거농성, 전주 시내 도보행진 등등 할 짓은 다해보았다는 장투사업장의 노동자들. 매일 생계를 위해서 조합원들은 낮에는 일하러 가고 간부들만 농성장을 지키는데 그들은 지쳐 보이지 않는다. 아예 월동준비를 했다고 하니 초조한 것은 되레 고용주 측이 아닐까 싶다. 서로 넉넉하게 품어주는 간부들과 조합원들을 보면서 이 투쟁은 이미 승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섣부른 예단을 한다.

그리고 이어진 전북평화와인권연대 활동가들과의 술자리와 대화. 지역에서 인권운동 하는 일이 힘든가보다. 젊은 활동가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일이지만 답답하다. 이들 활동가들이 지치지 않고 전망을 만들어 가면 좋을 텐데, 선배라고 와서 하소연하는 후배 활동가들에게 미안한 마음만 가득하다.

전북대 정영선 교수가 늦게 들러서 차비 하라고 돈을 쥐어 주고 돌아간 게 밤 1시, 그리고 활동가들이 돌아간 게 2시, 이제 하루 일정이 끝났다. 잠이 밀려온다.

"아직 힘겨운 사회적 차별이 있다"
[인터뷰] 소록도병원생자치회장 김명호 씨

   
▲ 박래군 이사가 소록도 원생자치회 사무실에서 소록도 원생자치회장 김명호씨(사진 오른쪽)와 1시간 반 동안 인터뷰를 했다. 박 이사는 "김회장은 일본정부로부터 한센병 피해자 배상 소송을 주도했다. 그는 여기는 정착촌이라며, 자치회 규정마저도 맘대로 바꾸는 병원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소록도의 7개 자치마을에는 580명 정도의 한센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평균 연령이 70이 넘는다"고 밝혔다. ⓒ박래군
 
여의도 1.5배 크기의 소록도에 들어서면 오른쪽과 왼쪽, 두 갈래 길로 갈라진다. 오른쪽 길은 따라 가면 국립병원 직원들이 사는 곳이고 왼쪽 길을 따라가면 국립한센병원이 통제하는 한센인 마을이 나온다. 다리가 놓이고 관광객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섬 소록도는 아직 그렇게 서로 다른 세상으로 갈라져 있다. 소록도 왼편에 살고 있는 김명호 소록도병원생자치회장을 ‘박래군의 천리길’ 일정 중에 만났다. 소록도 한센인들은 대부분 완치된 환자들이다. 김 회장도 이미 완치됐지만 소록도에서 산다.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너무 혹독하기 때문에 한센인들은 다 낫고도 소록도 같은 그들만의 집단 생활을 벗어나지 않는다. 먹고 살 수 없다는 게 간명한 그의 설명이다. 그는 1990년 소록도에 들어와 2003년 자치회장이 되었다. 소록도 600여 명 한센인들의 대표다. 소록도 한센인들에 대해 궁금한 점을 짧게 들어보았다.

- 소록도병원생자치회는 무엇인가?
“소록도 전체는 병원이라고 보면 된다. 소록도한센국립병원에서 통제하고 관리하는 섬이다. 원장의 말이 곧 법이고 직원들이 우리를 통제한다고 보면 된다. 1984년 교황 방문 이후 자유와 인권에 대해서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소록도자치원생자치회는 이곳을 관리 통제하고 있는 병원을 상대로 원생들의 권익을 위해 병원을 상대로 우리의 권익을 세우는 일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치회는 노동조합이라고 보면 된다.”

- 자치회장 된 이후 달라진 점이라면?
“외출증을 없앴다. 소록도에는 7개의 마을이 있고 이장이 있다. 이장들과 함께 외출증 안 끊기를 시작했다. 전에는 녹동 시장에 가는 것도 복지과에서 외출 허락을 받고 외출증을 끊어서 안내소 수위에서 보여줘야 했다. 고향에 갔다 오면서 쌀을 가져오면 일부를 떼어가기도 했다. 외출의 자유도 인권인데 이거 없애야겠다고 마음먹고 하지 않기로 했다. 외출 허가는 병원의 통제 수단의 하나다. 우리가 하지 않으니 병원에서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전화 정도 해주고 외출을 나간다.”

- 자치회장은 어떻게 되나?
“7개 마을의 원생들이 자유 투표를 한다. 한때 소록도에 6000명 가량이 살았고 직원들 말이 법이었다. 감히 그럴 수 없었지만 우리 인권은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병원은 말 안 하면 안 해준다. 나는 현재 4번 대표로 당선되었는데 3번째 나갈 때 연임이 불가하다고 병원에서 못 나가게 했다. 정관 변경을 병원 혼자서 하고 통고나 공고도 없었다. 우리의 대표를 뽑는데 그렇게 해서 선거관리위원회에 유권해석도 해보았다. 잘못됐지만 강제력이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1년 쉬고 다시 나와서 당선됐다.”

-요즘 가장 부족한 점은 무엇인가?
“여기는 국립병원이 아니라 요양원이고 정착촌이다. 특히 전문적인 기술이 있는 의사들이 오지 않고 기자재도 별로 없다. 공중보건의는 의무 기한만 채우고 떠나면 그만이다. 한센병이 완치됐지만 크고 작은 질병은 많이 있다. 평균 75세가 넘는 노인들이고 눈도 잘 안 보이는데다 병으로 인해 잘 걷지 못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래서 골절이 많다. 얼마 전 다리를 잘 못 잘라서 의족도 제대로 못 하게 만들기도 했다. 제때 치료를 못 받아 죽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런 거 생각하면 가슴 아프고 눈물이 난다. 간호사들이 헌신적이지만 현재는 병원보다는 요양원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녹동, 고흥, 전남대 병원 등 협력 병원이 있어서 치료 하면 되는데 예산 부족 핑계를 댄다.”

- 가족과 함께 살고 있나?
“일제 강점기에도 가족이 함께 살았는데 한국 정부가 오히려 못하게 했다. 자치회장 되면 고치겠다고 마음먹었다. 인권위원장과 보건복지부 장관이 방문했을 때 면담이 있었다. 아내가 있다, 같이 살 수 없다면 이혼해야 하나? 따졌다. 아내는 노상 쫓겨나고 밤에 몰래 배타고 들어오곤 했다. 국가에 지원을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먹는 거 나눠 먹는다는데도 금지했다. 병원에서도 보호자가 함께 사는데 정착촌이나 다름없는 이곳에 가족이 함께 살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지금은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 강제 단종, 오마도 강제 노역 등 한센피해자 보상은?
“2007년에 한센피해자법이 만들어지고 시행령 등이 개정되지 않아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일시불이 아니라 연금형태로 지급된다는 말이 있다. 단종 피해자, 오마도 피해자에 한정된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나는 그 사람들만 피해자가 아니라고 본다. 한센인들은 지금도 어디가서 취직도 못한다. 자녀들 결혼도 속이고 하는 정도다. 녹동에 가면 여전히 밥도 팔지 않는 식당이 있다. 한센병이라는 이유로 마을에서 배척당하고 우물물도 먹지 못했다. 보편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것이 한센인들이다. 이들은 모두 피해자이고 보상받아야 한다. 일본의 경우 모두에게 보상해 줬다.”

- 앞으로 소록도를 어떻게 내다 보나?
“10년 전부터 없어진다고 내다봤는데 그렇지 않다. 내가 들어올 때 1300명이 살았다. 지금은 580명 정도이다. 20년 전보다 많이 줄었지만 다른 곳에서 정착촌이 없어지면서 소록도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꾸준히 이어진다. 전국에 100여개의 정착촌이 있었는데 지금은 88개로 줄었다. 또 나가 살던 사람들이 적응 못하고 들어오기도 한다. 산천에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곳이 있는데 못 살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아직도 한센병을 천형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녹동의 어떤 식당, 세탁소, 이발소에는 아직도 우리를 안 받아준다. 자치회에서 군수나 번영회 찾아가서 요청하기도 한다. 그들도 일일이 강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장애인들은 취직이 되도 우리는 절대 취직이 안 된다. 아직 힘겨운 사회적 차별이 존재한다.”(인터뷰어 김정아 인권재단 사람 사무처장)

인권센터후원 홈페이지 http://hrfund.or.kr/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①] 10월 9일 제주도 강정마을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11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②] 10월 10일 제주 4.3평화공원, 강정마을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13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③] 10월 11일 광주 망월동, 인화학교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24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