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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왕밍의 귀국, 마오의 숨고르기
'코민테른' 왕밍의 귀국, 마오의 숨고르기
[하나의 불씨, 중국을 태우다/ 중 공산당 90주년, 마오를 다시 말한다] 80

1937년 11월, 일본 제국주의가 잇따라 상하이, 타이위안을 함락시켜 광활한  국토가 일본군 수중에 떨어졌다. 전국적으로 항전에 많은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 국내적으로 친일파로 변신하는 민족투항주의가 고개를 들고, 공산당 안에서는 계급 투항주의가 꿈틀거렸다. 이런 때에 옌안에서 당의 활동분자들의 회의가 열렸다.

마오는 이 회의에서 ‘상하이, 타이위안 함락이후 항일전쟁의 형세와 임무’ 제목의 초청 강연을 했다. 마오는 무거운 마음으로 타이위안, 상하이 실함이후의 엄중한 형세를 분석하고 편면적인 항전을 전면적 항전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들이 직면한 가장 긴박한 임무라고 말했다. 마오는 당 내외에 투항주의가 범람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감안해 당 내외의 투항주의와 당내의 계급 투항주의에 반대한다고 견결하게 말했다.

마오는 투항주의를 제어하지 못하면 전면항전을 추동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항전 승리를 담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마오의 일련의 연설은 각성제 구실을 해  전당, 특히 고급간부들이 투항주의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1월 7일 왕밍(王明 왕명)이 모스크바에서 옌안으로 귀국하면서 희화화하고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마오로서는 분란의 불씨인 화근덩어리에 바짝 경계태세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주석 167)
 

   
왕밍(왼쪽), 마오쩌둥.
 

왕밍은 마오보다 14살 아래인 1907년 안후이성(安徽省 안휘성) 지역 유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천샤오위(陳紹禹 진소우)다. 1923년 상하이 대학에 들어가 1925년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해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소련으로 가 그곳에서 코민테른의 지도자 미프를 만나 통역원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왕밍은 미프의 지원을 받아 이후 ‘28인의 볼세비키’로 알려진 중산대학 중국인 학생들의 영도자가 되었다.

1931년 1월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열린 제6차 4중전회에서 당시 중국공산당에 파견된 코민테른 대표 단장인 미프의 도움으로 중공중앙 정치국원에 진입해 총서기로 선출된 향중파(向忠發 향충발)가 6개월 뒤 처형되자 24살의 나이로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됐다. 왕밍은 그 해 9.18 만주사변 뒤 모스크바로 돌아가 중국공산당 코민테른 대표단 단장이 되었다. 왕밍은 또 코민테른 집행위원에 당선되어 주석단 위원과 서기처 서기에 임명됐다. 코민테른이라는 후광이 왕밍의 권위를 배가 시켰다. 왕밍은 자신의 총서기직을 이어받은 보구와 함께 ‘상왕(上王)’으로서 4년 동안 좌경적 공산혁명 노선을 부르짖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 기간 동안 마오는 권력 중심부에서 퇴출돼 암울한 세월을 보냈다.

1937년 11월 7일, 왕밍이 옌안에 도착할 때 마오는 소련과 코민테른의 ‘상방보검’을 가진 '흠차대신' 왕밍을 마중하러 직접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오는 옌안의 중공중앙과 군대 영도자들을 대동하고 옌안비행장으로 왕밍을 영접하러 나갔다. 마오로서는 왕밍의 좌경 교조주의의 직접 피해자이지만 이제까지 만나 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옌안비행장에서 처음으로 상면했다.

왕밍이 비행기 트랩에서 내릴 때 마오는 환영의 뜻으로 손을 뻗으며 “우리 산골짜기에 마르크스주의를 보내 준 당신을 환영한다”고 인사말을 했다. 말속에 비수가 뿜어져 나왔다. 의미심장한 환영사였다. 왕밍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마오와 왕밍이 악수하는 순간 그들 간의 투쟁은 이미 시작됐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공산혁명의 발전과정에 따라 마오는 착실하게 전당전군에서 영도자의 지위를 확립해 가고 있었다. 코민테른의 마오와 왕밍에 대한 태도도 미묘한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왕밍은 이런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어쩔 수 없이 마오의 영도적 지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나 내심으로는 불복했다.

왕밍은 은밀하게 마오는 단지 공맹(孔孟)의 유가학설만 알 뿐이어서 공맹의 ‘수신(修身), 제가(齊家),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식의 방법론으로 국가를 경영하려고 할 뿐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하지 못해 당의 영수가 될 수 없다고 헐뜯었다. 왕밍은 1935년 8월 1일 발표한 ‘항일구국을 위해 전국동포에 고(告)함; 8.1선언’에서 모스크바의 요구를 반영해 노동자, 농민, 소자본가, 민족 자본가들이 한데 뭉쳐 히틀러의 나치와 일본에 대항하자고 호소했다.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신정책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중요한 잣대를 제시했다. 이에 대해 마오는 “이른바 8.1선언은 우리당이 추진하고 있는 하나의 근원일 뿐 항일민족통일전선과 국공합작의 ‘긴 흐름(長流 장류)’의 잣대는 아니다”며 모스크바 노선에 이견을 보인바 있다.

왕밍의 귀국은 중공중앙에 코민테른의 신정책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었다. 1937년 8월 10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회의를 열어 중국의 정세와 중공중앙의 임무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왕밍은 회의에서 고무적이고 낙관적인 보고를 했다. 왕밍은 “현재 중국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국공합작의 기초위에서 전중국의 반일 각 당파가 항일 대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에 기초해 전중국의 통일적 국방정부와 전중국을 통일하는 민주공화국을 건립해야 한다. 아울러 전중국의 각종 무장 세력을 통합해 통일지휘, 통일기율, 통일공급, 통일무장, 통일군사계획 등을 아우르는 통일국가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왕밍은 “장제스의 진보적인 정책전환이 필요하고 중공은 국민당 정부를 진정한 중국통일의 국방정부로 승인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코민테른 대표 디미토로프는 왕밍의 의견에 동의했다. 디미토로프는 “관건은 국공 통일전선의 건립문제다. 중공의 재력, 물력과 인원의 100분의 95이상을 소비에트지구에 집중했기 때문에 간부도 난징정부와의 무장투쟁과정에서 양성해야 한다. 노동자 성분의 사람들이 당과 홍군에서 비율이 아주 적다. 당의 정책과 책략을 백팔십도 확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미토로프는 “진정으로 자신들의 과거의 적과 손을 잡아야 한다. 국제형세에 밝고 패기발랄한 사람이 가서 중공중앙을 도와야 한다”고 힘을 주어 말했다. 코민테른은 왕밍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해 파견한 것이다.

(주석 167) 共産國際爲何放棄王明轉而選擇毛澤東? 時政頻道 新華網  毛澤東與王明的激烈爭論 理論頻道 新華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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