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한 감각과 치열한 논증이 장점이던 진중권의 글이 왜 이리 일그러져 보이는가?

뜬금없이 맥락도 없이 한겨레가 게재한 그의 칼럼은 첫 문단에서부터 자의적인 개념과 밑 빠진 비약으로 일관한다. 그는 곽교육감이 박명기교수에게 2억원을 건넨 일을 두고 “어떤 명목으로도 그런 돈은 절대로 줘서는 안 되며, 이미 돈을 건넨 이상 곽 교육감은 마땅히 도덕적 책임을 져야 했다.”고 한다. 여기서 “어떤 명목”과 “그런 돈”은 상호참조되고 있다. ‘어떤 명목으로도 돈을 줘서는 안 되는’ 것도 아니며, ‘(이런 명목으로는 그런 돈을 줘도 괜찮지만) 저런 명목으로는 그런 돈을 줘서는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어떤” 명목이라는 말과 “그런” 돈이 애매하게 결합하면서 마치 곽교육감이 2억원을 건넨 행위가 어떤 절대명제를 벗어난 ‘비리’처럼 보이게 만든다. 어떤 경우에 그리고 왜 ‘돈을 줘서는 안되는’ 것인지 그 판단의 기준은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이미 돈을 건넨 이상 곽 교육감은 마땅히 도덕적 책임을 져야 했다.”라는 명제도 공허한 말장난 내지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돈을 건넸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도덕적으로 책임을 져야할 이유는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진중권이 곽교육감이 돈을 건넨 행위를 그렇게도 비난하는지 그 이유는 그 다음 단락에서야 비로소 나온다. “법정에서는 주관적 ‘선의’도 객관적으로 ‘범법’이 될 수가 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그런 문제”라는 것이다. 요컨대, 그의 ‘도덕적 책임’의 판단기준은 ‘범법’의 여부 즉 공직선거법 규정의 위반여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판단과는 달리 곽교육감의 ‘범법’여부는 아직은 “객관적”이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검찰의 “주관적” 판단에 불과하다. 그것도 처음에는 ‘사전에’ 박명기후보와 금전거래를 약속했다(공직선거법 제232조 제1항 제1호)고 피의사실을 퍼뜨리며 수사를 집중해 놓고도, 막판에는 엉뚱하게도 사후에 금전을 지급했다(같은 조항 제2호)고 주장하며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또 기소하였다. 진중권의 ‘범법’은 검찰의 이런 오락가락 행보 때문에 아직은 객관적이지 않다.

법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법원은 제2호와 관련된 제대로 된 판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나마 있는 하급심판결도 실상은 제1호와 관련된 것이다. 법정에서 “주관적 ‘선의’가 객관적으로 ‘범법’이” 된 경우가 여지껏 한 건도 없다는 것이다. 사정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중권이 이를 말하는 것은 어떤 근거에서인가? 그가 말하는 ‘범법’이라는 것이 갈팡질팡하는 검찰이 말하는 법률을 기준으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아직 나오지도 않는 법원의 판례를 기반으로 하는 것인가? 그도 저도 아니라면 언젠가 그러한 법률을 검찰의 주장에 맞게 해석할지도 모르는 법원의 가상적인 판결을 지레짐작하여 ‘범법’ 여부를 판단한 것인가?

   
한겨레 10월4일 30면 .
 

이에 덧붙여 진중권의 칼럼에 깔려 있는 법률실증주의라는 독침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주장은 “법률(혹은 검찰이 말하는 법률 또는 지레짐작되는 가상의 법률)에 위반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로 압축된다. 그 법률이 악법인지 아닌지 살펴볼 여지도 없이 법이기 때문에 선한 것이며 따라서 그를 위반하는 행위는 악이 된다. 법률 위반 행위가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할 행위로 비약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법률적 판단을 도덕적 판단으로 연결시키려면 좀 더 많은 분석의 단계들이 필요하다. 도덕과 법률의 세계는 전혀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프레시안에 게재된 이재승의 글 “법은 도덕적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명령해선 안 된다”이 잘 설명하고 있다. "법은 도덕적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명령해선 안 된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10921163246§ion=03).

실제 이런 주장은 관료법학에 익숙한 법률가라면 몰라도 진중권과 같은 ‘문화평론가’가 강조할 것은 못 된다. 이 법률조항은 일본에서 60년전에 만들어진 이래 제대로 적용된 적도 거의 없는 법률을 베껴 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제대로 적용된 적이 없다. 사정이 그렇다면 그 법률이 그 자체로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문제삼아 고민하는 것이 도리다. 그러한 법률조항이 선거제도를 비롯한 정당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민주주의의 이념이나 인권의 이념과 어떤 관계 속에서 이해되고 평가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결과로서 ‘도덕적 책임’의 범위와 성격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인가가 올바르게 규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을 꼼꼼하게 짚어나가야 할 사람이 바로 진중권과 같은 평론가들이며 또 그는 여태까지 그렇게 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후보자에게 금전이나 어떤 직책을 내 걸며 후보를 사퇴하게 만드는 행위는 선거에서 유권자의 의사를 왜곡할 수도 있기 때문에 법으로 규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를 검찰의 주장처럼 후보사퇴와 금전·직책의 제공이 서로 시간적으로 연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획일적인 처벌에 나서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역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치 특히 선거의 특성상, 검찰의 이런 단속행위는 국민이 가지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라는 인권을 침해하고 대화와 타협에 바탕을 두는 민주주의의 흐름을 방해하는 역효과를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즘 흔히 보는 정책연합이나 후보단일화 등을 보면 그 폐해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선거과정에서 상대방의 선거비용을 보전하여야 할 필요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과의 정책연합의 방식으로 그를 선대본부장으로 임명하거나 혹은 당선된 후에 일정한 직책을 맡기며 그의 정책을 실천에 옮겨야 할 필요가 있기도 한 것이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법제에서는 우리 공직선거법과 같이 막무가내로 규제하는 법률은 갖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진중권은 곽교육감이 돈을 건넨 행위를 밑도 끝도 없이 “도덕적 책임” 운운하면서 악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이 조항을 이용하여 이제 정치공학에까지 손대기 시작한 검찰의 손을 번쩍 들어준다. 앞으로 모든 선거에서 어떠한 후보단일화나 정책연합이 있더라도, 그래서 어떤 형태로건 자기들 눈에 ‘거래’라고 보여지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 무차별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적당히 차별적으로, 검찰이 개입해서 선거판을 마음대로 휘저을 수 있는 아주 넓은 공간을 제공한다. 25.7%의 지지율로써 선거에서 언제나 ‘사실상 승리’할 수 있는 강력한 여당에 대적해야 하는 중소 정당들의 힘겨운 선거전략들이 그의 이 칼럼에서 여지없이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할 행위로 처단되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진중권은 “상식을 뛰어넘는 진실”은 단순한 “믿음”이며 이를 가지고 곽교육감의 행위를 변호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한다. 과연 그런가? 그가 인용하고 있는 상식이 ‘합리적 이성에 입각한 이해’를 의미한다면 그의 주장은 옳다. 하지만, 그 상식이 세간의 사람들이 ‘그냥 공유하고 있는 일반적 인식 혹은 인상’ 정도의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전혀 잘못된 주장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이 사건이 진행되어 오는 상태를 보면 아쉽게도 그 상식이란 후자일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다.

검찰의 음흉한 피의사실공표와 언론의 소설창작행위를 제외한다면 우리에게 현재 명확한 것은 ‘박명기교수가 후보를 사퇴하였다.’와 ‘곽교육감이 2억원을 주었다’라는 두 개의 사실뿐이다. 왜 주었느냐에 대해서는 검찰은 ‘사퇴의 대가로’라고 말하고 곽교육감은 ‘선의로’라고 말한다. 사전 담합이 있었느냐에 대해서도 검찰은 ‘피의자측이 약속했다’고 하고 곽교육감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라고 한다. 왜 그런 식으로 돈을 건넸느냐는 질문에는 검찰은 ‘부정한 돈거래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곽교육감은 ‘저쪽에서 원하는대로 했을 뿐’ 그리고 ‘괜한 구설에 말릴까봐’라고 답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상식’적 판단은 어떤 것일까? 도대체 진중권은 검찰로부터 어떤 정보를 어떻게 받았길래 곽 교육감측의 주장은 모조리 상식의 영역으로부터 배제해 버릴 만큼 과감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만일 그 확신의 근거가 그리 명확한 것이 아니라면, 그가 의뭉스럽게 기대고 있는 법률의 상식이 그것을 대체할 수도 있다. 진중권은 이런 저런 의혹과 논란들을 다 쳐내고 돈을 줬으면 그 자체로 ‘범법’이요,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결론으로 직행한다. 하지만, 법률의 세계에서는 이런 직선적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 구차한 의문과 반론들을 하나하나 다 고려한 끝에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모든 것이 입증되어야만 유죄로 판단하는 것이 “상식”이다. 특히 양측의 주장이 서로 대립하면서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적어도 재판에서 공격과 방어의 과정을 통해 그 주장들이 제대로 입증될 때까지는, 그래서 합리적 의심이 완전히 제거될 정도로 유죄의 입증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이것이 법치국가가 요구하는 시민적 상식이다. 비록 당혹스럽고 곤혹스럽다 하더라도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망설이고 주저하며 주춤주춤 실체적 진실을 향해 다가가는 것, 그래서 맹목적 믿음의 오류를 깨치고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진실을 발견해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법의 세계가 요구하는 시민적 상식인 것이다. 검찰이 불법적으로 공표한 수많은 ‘피의사실’들에서 무수히 나타나는 합리적 의심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왕 시작한 길에 하나만 더 지적하자. 그의 글에서는 지나친 일반화의 논리가 횡행한다. 그는 보수진영에서 이런 일이 있어도 무죄추정을 내세울 것인가라면서 공정성의 잣대를 들이댄다. 하지만 그것은 공정성이 아니라 형식적 획일화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강이라고 해서 언제나 같은 물이 흐르는 것은 아니다. 다름과 같음의 구별은 철학의 과제일 뿐 아니라 법률의 핵심이기도 하다. 한번 물어보자. 진중권은 과거 진보가 한나라당의 차떼기 정치자금 수수를 비난하였기에 지금 전교조 교사들이 용돈 한두푼 모아 민노당을 후원한 것도 처벌 또는 징계하여야 한다고 주장해야 하는가? 공정택 전교육감의 뇌물수수행위를 비판한 진보는 마찬가지로 현재 진행중인 한명숙의 재판에 대고도 구속재판하라고 외쳐야 한다고 보는가? 성희롱으로 유명한 강용석 의원의 의원직 사퇴를 주장한 시민단체는 감사원에 의해 부실경영판정을 받은 정연주에게 KBS사장직을 사퇴할 것을 주장했어야 했다고 보는가?

이들 사건들은 각각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가진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진중권이 말하는 “과거 보수의 도덕적 스캔들”과 이 사건과 같은 ‘법률적·정치적 스캔들’ 사이에는 수많은 고민과 판단의 지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판단마저도 쉽지 않은 것은 사실관계가 지금도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진중권은 이 두 범주의 사건들을 같은 선상에 놓고 똑같이 비판하고자 한다. 그가 기대고 있는 사실관계의 인식이 검찰이 공표한 피의사실에 의거한 것인지 아니면 곽교육감의 주장에 의거한 것인지 혹은 그 자신이 수집하거나 유추한 또 다른 사실관계에 입각한 것인지도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채 말이다.

더 심각한 사실은 “과거 보수의 도덕적 스캔들”에 대해서도 어떻게 되었든 무죄추정의 원칙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현대사회의 기본 합의, 즉 ‘상식’이라는 점이다. 진보진영의 무조건적 도덕성을 강조하는 진중권의 논리는 단순명료하다. 그에 의하면, 미래 발생할지도 모르는 보수의 스캔들을 비난하기 위해서 현재의 무죄추정의 원칙을 접어야 한다. 그뿐 아니다. 과거 보수의 스캔들을 비난했다는 과오를 덮기 위해 현재의 무죄추정의 원칙을 접어야 한다는 것도 그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 두 개의 주장은 모두 어불성설이다. 정의는 과거의 과오를 현재에 되풀이하여 획일화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미래의 과오를 미리 당겨서 균질화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정의는 정의다. 과거의 과오는 교정해야 하며 미래의 과오는 예방해야 한다. 그리고 그 판단의 기준은 적어도 법의 세계에서는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고 단호하게 선언하는 헌법이다.

곽교육감은 2억원을 건넨 이유를 ‘선의’라고 하였다. 그는 사람됨의 도리를 내세우며 국가법의 바깥에도 인간이 따라야 할 또 다른 법이 있음을 주장한다. 마치 왕의 명령이 지엄함을 내세우는 크레온에 대항하여 신의 법을 외치는 안티고네처럼,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에 대해 검찰 혹은 그들에 내세우고 있는 편협한 법률과 다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중권은 단지 하나의 법만이 타당하다고 강변하며 이를 곽교육감에게 강요한다. 그의 “도덕적 책임”론은, 왕의 법을 저버리고 인간의 도리를 내세우는 안티고네를 힐난하는 헤겔주의자들의 논지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검찰의 법에 예속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두고 “제3제국의 철학자”라고 비난한다. 참 안타깝고도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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