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어깨에 기타를 메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듯하다. 슈퍼스타K, 나가수, 탑밴드 등 예능 감각을 탑재하면서도 전문성을 강조하는 음악 프로그램 열풍 덕택일까. 알앤비, 랩 그리고 힙합의 위세에 눌려 쇠락하기 바빴던 록음악과 포크음악들이 최근 들어 다시 한 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 같다.

안무와 개인기, 스튜디오 장비를 남용한 목소리 성형 등을 통해 음원 판매를 독점해 왔던 우리나라 가요계에서 최근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 작가적이고 작품 세계가 있으며 일상적인 라이브 문화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음악인들이었다. 하지만 기타를 메고 다니는 새로운 세대들이 복원됨에 따라 새로운 작가, 새로운 세계를 기대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지나친 호들갑일까. 어쨌든.

   
콜트/콜텍 악기의 노동자 탄압과 노동자가 연대해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룬 김성균 감독의 다큐멘터리 '꿈의 공장'의 한 장면.
 
기타를 처음 배우거나 초보자이지만 뒤늦게 다시 연주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중 하나는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제가 얼마짜리 기타를 사는 게 적당할까요?' 이에 대해 음악적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대답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보편적으로 많이 건네게 되는 말은 결국 '10만 원대의 악기를 사면 적당할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가서 반드시 직접 쳐서 들어보라고 말을 해주거나, 아니면 같이 가자는 부탁에 응하는 것은 그보다 좀 더 성실한 대답이 될 것이다. 물론, 10만 원대의 기타를 연주해보고 특별히 괜찮은 악기를 찾아주는 것, 경험상 그렇게 쉬운 일은 또 아니다.

흑인음악의 포화를 뚫고 되살아난 기타의 시대

지금과 가격 느낌의 비교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1990년대를 기준으로 하였을 때는 30만 원대의 기타까지도 초급자 혹은 초급 애호가들이 비교적 많이 구매하는 제품군이었다. 직업적 연주자는 아니지만 작은 공동체 내부에서 종종 연주를 하는 이들에게 10만 원대 혹은 그 아래 급의 기타는 조금 약해 보인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대략 50만 원대 정도까지 비용이 올라갔다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이러한 가격으로 표상되는 초급 시장은 낙원 상가의 주력 상품 시장이기도 했다. 10만 원짜리 하얀띠 선수들과 30만 원짜리 빨간띠 선수들은 전국 어디서나 끊임없이 등장하였고 적지 않은 기타 브랜드들은 이 가격대의 소비자들을 위한 다양한 상품들을 생산해 왔다.

   
콜트/콜텍 악기의 노동자 탄압과 노동자가 연대해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룬 김성균 감독의 다큐멘터리 '꿈의 공장'의 한 장면.
 
한편, 당연한 이야기지만 직업 연주자들의 기타는 초급자들에 비해 가격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이미 90년대에도 직업인을 자처하는 순간 100만원을 훌쩍 넘는 미제(美製) 마틴(martin) 기타 한 대를 마련하는 일은 마치 성인식을 치르는 것과 비슷한 필수적인 성장 의식이었다. 동네 기타맨으로 살아갈 때는 30만 원대의 기타를 사용해도 괜찮았지만 직업적인 음악인이 되겠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100만원을 훌쩍 넘기는 마틴 기타 정도는 손에 쥐어야 악기를 믹서에 꽂을 때 어깨가 주눅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가난한 기타 연주자, 가수들에게 100만원은 여간 큰돈이 아니었다. 고가의 기타를 사는 순간 기타줄을 감는 일부터 기타 가방에 넣을 때까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성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조금 어정쩡한 사람들이 있었다. 30만 원짜리 악기를 쓰긴 뭣한데 100만원이 넘는 악기를 사긴 더 뭣한 사람들. 동네 뮤지션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길거리 뮤지션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으로 검정띠를 허리에 찬 사람들. 30만 원짜리는 기타넥, 기타줄 손에 감기는 맛이 성에 안 차고 100만 원짜리는 자신의 불확실한 정체성을 더욱 고민스럽게 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30만원과 100만원으로 표상되는 느낌 중간쯤의 기타였지만 그러한 기타는 흔하지 않았다.

애매한 음악인들의 참 좋았던 친구, 콜트 기타

그때 혜성같이 등장한 기타가 있었다. 세고비아에는 없는, 삼익, 성음, 오봉에도 역시 없었던 기타. 프로 세계에 발을 들일까 말까 고민하는 이들을 위한 기타가 등장한 것이다. 이름하여 콜트기타. 50만 원 전후의 국산 기타가 등장한 것이다. 예상 못한 틈새시장에 새로운 수요가 창출되었고 수많은 예비 음악인들은 콜트의 기타를 두들기며 헐떡이는 청춘을 함께 했다. 곳곳의 거리 뮤지션들은 콜트를 둘러멨고 동네 연주장에 콜트는 언제나 풍년이었다. 10~30만 원짜리 기타 시장도 이미 콜트가 지배하기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가격에 비해 참 좋은 기타였기 때문이다. 콜트는 90년대를 통과한 우리나라 음악인, 음악애호가들에게 아주 특별한 이름이었다.

   
콜트/콜텍 악기의 노동자 탄압과 노동자가 연대해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룬 김성균 감독의 다큐멘터리 '꿈의 공장'의 한 장면.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 몇 년 사이 콜트라는 이름은 매우 부정적인 기타의 상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콜트 기타를 들고 하모니를 들려주던 많은 뮤지션들이 지금은 콜트 기타를 규탄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1990년대 세계를 주름잡던 록밴드 RATM의 톰모렐로까지도 지금 대한민국의 콜트 기타 규탄 행렬에 함께하고 있다.

노동자를 착취하고 이간질하는 회사의 기타를 연주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도 그럴 것이 멋대로 회사를 폐업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 그것이 이 회사 경영진이 보여준 그동안의 행태였다.

더 많은 착취를 위한 온갖 불법과 불협화음을 양산하는 회사가 언제까지나 평화로울 수는 없는 것이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기타를 즐거운 마음으로 어깨에 두를 수 있는 것도 음악인 입장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콜트를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면서 여러 일들이 벌어졌고 많은 이슈, 문화적 저항들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법정 투쟁을 통해 경영진의 부당한 행태가 시정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진은 불법 위에서 여전히 풍족하고 노동자들은 불법 하에서 여전히 신음중이다. 분노할 일이다.

콜트기타,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요즘 이 나라의 대통령이 격노하고 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자신이 측근들을 낙하산으로 투하한 곳에 가서 그렇게 격노하곤 한다는 게 잘 이해가 안 되긴 하지만, 진심으로 이 나라 민중들을 위하여 격노를 하고 싶다면 오늘이라도 당장 콜트 공장을 찾아가라고 권해주고 싶다. 거기, 진짜로 격노해야 할 사건이 몇 년째 억눌리고 흐느끼고 있으니까.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부당한 현실이 또렷이 응축된 자리이니까.

   
이명박 대통령 부부는 지난 9월 서울 잠실 야구경기장을 찾아 전광판에 중계되는 키스타임에 깜짝 키스를 선보여 화제가 되었다.@연합뉴스
 
부담스럽다고? 그렇다면 최소한 독립영화 상영 극장이라도 다시 한 번 찾아주면 좋겠다. 콜트 사태를 다룬 <꿈의 공장>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지금 전국 곳곳에서 뜨겁게 상영중이니까. <워낭소리>의 추억도 되살릴 수 있고 야구장퍼포먼스보다도 훨씬 좋은 효과를 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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