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소?
그 무덤 앞에서 샘이 솟아
서해바다로 서해바다로 흐르면서
휴전선 원시림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펼쳐지고
한려수도를 건너뛰어 제주도까지 뻗는 꿈,
그리고 우리 모두
짐승이 되어 산과 들을 뛰노는 꿈,
새가 되어 신나게 하늘을 나는 꿈,
물고기가 되어 펄떡펄떡 뛰며 강과 바다를 누비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고 문익환 목사의 시 한 구절. 27일 저녁 한국기독교연합회관 아가페 홀에는 문 목사의 시 ‘꿈을 비는 마음’이 맑고 카랑카랑한 고 박용길 장로의 목소리로 몇 번이나 낭송되었다. 통일에 대한 간절함이 담긴 그 목소리는 사람들의 가슴을 적시며 홀을 가득 메웠다.

지난 25일 소천한 박용길 장로를 기리기 위해 ‘그대 가시는 봄길-쉬엄쉬엄 가소서 늦봄의 품으로, 통일의 나라로’라는 이름으로 추모의 밤 행사가 열렸다. 고인의 유가족과 200명이 훌쩍 넘는 시민들이 기독교회관에 모여 박 장로의 삶을 회상하고 고인과 그의 남편 문 목사가 평생을 바쳐 헌신한 남북 화해와 통일을 노래했다.

   
▲ '어린 늦봄, 어린 봄길', 늦봄 문익환 학교 합창단 학생들이 '통일이여 오라'를 합창하고 있다. ⓒ 백경빈 기자
 
‘추모의 밤’은 늦봄 문익환학교 학생들의 합창으로 시작됐다. 어린 늦봄, 어린 봄길들이 무대에 올라 ‘통일이여 오라’ ‘고마운 사랑아’를 부르며 고인에 대한 사랑을 전했다. 이어 박영숙 미래포럼 이사장은 인사말로 “(고인이) 그 모진 가시밭길을 격려하며 걸어오셨다”며 “키 큰 장정처럼 의연하고 담대하셨다”고 회상했다.

유족들도 박 장로를 추모하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 고인의 외손자와 조카는 사진과 글을 준비해 고인의 출생부터 학창시절, 문 목사와의 만남,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이르기까지 뜨거웠던 고인의 일평생을 전했다. 할머니의 부음을 전해듣고 프랑스에서 부랴부랴 왔다는 큰손자도 할아버지의 시 ‘손바닥 믿음’을 낭송했다.

   
▲ 고 문익환 목사와 고 박용길 장로. ⓒ 백경빈 기자
 
생전 고인을 모셨던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도 있었다. 유시춘 소설가는 “80년대 중반 장로님을 뵀을 때 이미 60대셨지만, 30대의 저보다 훨씬 더 에너지가 넘치셨다”고 전하며 “지도자의 아내였지만 저는 권위적인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회상했다. 그는 “(문익환 목사와 박용길 장로는) 분단, 독재가 횡행하는 불의의 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었다”며 슬퍼했다. 89년에는 문 목사와 95년에는 박 장로와 함께 방북했던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선생도 이날 전화연결을 통해 고인의 별세를 애도했다.

고인의 셋째 아들 문성근 씨의 막역한 후배인 배우 강신일 씨도 이날 무대에 올라 고 문익환 목사가 옥중 부인에게 보낸 연서 한 편을 골라 낭독하기도 했다.

   
▲ 배우 강신일 씨가 고 문익환 목사가 박용길 장로에게 보낸 연서 <나의 코스모스에게>를 낭독하고 있다. ⓒ 백경빈 기자
 
이날 참석한 가수들과 합창단은 추모의 밤을 통일과 평화의 노래로 수놓았다. 홍순관, 이정열, 노래패 우리나라, 전 국립오페라합창단, 평화의나무 합창단은 ‘철망 앞에서’ ‘아침이슬’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등을 노래했다.

9시 30분을 넘기며 추모의 밤은 끝이 났다. 추모의 밤 마지막 곡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평화의 나무 합창단과 함께 참석한 이들이 모두 일어나 손을 붙잡았다. 마주잡은 두 손은 ‘겨레의 통일’이라는 고인의 뜻을 이어가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봄길’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이제는 그토록 사랑했던 ‘늦봄’을 만난다. 그리고 이날 누군가가 고인을 기리며 말했다.

“남북을 가르는 철망이 무너지는 날 고인과 문 목사가 함께 내려와 손을 맞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시리라 믿습니다.”

박용길 장로의 발인은 28일 오전 9시에 있을 예정이다. 고인은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문익환 목사와 합장된다.

   
▲ 손을 맞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는 평화의나무 합창단. ⓒ 백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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