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언론을 심판하는 거의 사법부에 준하는 독립기관이 필요하다.” 지난 8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박만 위원장이 기자들과 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박 위원장은 “인사와 예산 독립이 중요하다”면서도 “내가 위원장으로 와서 심의한 것 가운데 이해하지 못할 게 뭐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공안 검사 출신이라는 지적에는 “검사는 공무원으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한 것인데 전과자처럼 나를 이야기하는 건 옳지 않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박 위원장의 말은 논리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애초에 정부기관이든 독립기관이든 누군가가 언론의 공정성을 심판하고 규제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 제기에 먼저 답변을 하는 게 맞고 인사가 독립돼 있다면 공안 검사 출신인 그가 위원장으로 임명되는 일이 가능할 것인지도 의문이고 방통심의위 출범 이후 그동안 숱하게 제기된 정치심의 논란을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묵살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한 사람의 과거 경력이 주홍글씨가 돼서는 안 되겠지만 공안수사와 방송통신 심의는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박 위원장은 서울중앙지검 재직 시절인 2003년 송두율 교수의 구속 수사를 진두 지휘했다. 송 교수는 이듬해 항소심에서 대부분 혐의에 무죄를 인정 받아 집행유예로 석방됐고 박 위원장은 2005년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한 뒤 사표를 냈다. 이어 KBS 이사로 재직했던 2008년에는 정연주 전 KBS 사장의 해임 결의를 주도하기도 했다.

송 교수 사건은 개인의 양심과 사상의 자유, 무죄 추정과 피의사실 공표 금지 등의 원칙를 묵살하고 무리하게 여론 재판으로 몰아붙여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 전 사장의 경우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임기가 1년 남은 상태에서 경영악화 등의 이유로 해임됐으나 그 이듬해 서울행정법원은 정 전 사장의 해임이 위법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정 전 사장의 임기 만료를 10일 앞두고 내려졌고 정 전 사장은 결국 KBS로 복귀할 수 없었다.

문제는 방통심의위에서도 공안수사 못지 않게 무소불위의 독단과 전횡이 만연하다는 데 있다. 9명의 심의위원 가운데 정부와 여당이 6명을 추천하는 구조도 문제지만 애초에 언론의 공정성을 심의하고 제재하는 원칙과 기준이 모호하다는 게 더 큰 문제다. 방통심의위는 태생적으로 정치권력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사건건 공정성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방통심의위의 원칙 없는 심의 기준은 여러 사안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방통심의위 회의 녹취록을 보면 근거 없는 인상비평을 하거나 진술인을 고압적으로 몰아붙이거나 형평성을 잃은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가 숱하게 발견된다. 제재 수위를 결정한 뒤 조항을 꿰어맞추는 경우도 흔하다. 격렬한 논쟁 끝에 야당 추천 심의위원 3명이 퇴장한 뒤 정부와 여당 추천 심의위원 6명이 만장일치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파놉티콘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일종의 감옥 건축양식이다. 파놉티콘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를 뜻하는 'opticon'을 합성한 것으로 소수의 감시자가 모든 수용자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감시할 수 있는 형태의 감옥이다. 사진은 파놉티콘이 적용된 프레시디오 모델로 감옥의 내부. ⓒ위키피디아.
 

방통심의위는 2008년 11월 YTN 앵커와 기자들이 낙하산 사장의 취임에 반대해 검은 색 옷을 입고 방송을 진행하자 시청자 사과를 명령한 바 있다. “방송은 당해 사업자 또는 그 종사자가 직접적인 이해당사자가 되는 사안에 대하여 일방의 주장을 전달함으로써 시청자를 오도해서는 안 된다”는 방송심의규정 9조와 “방송은 품위를 유지해야 하며 시청자에게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27조를 적용했다.

그러나 같은 무렵, YTN의 블랙 투쟁에 동조해 함께 검정색 옷을 입고 방송을 진행했던 MBC와 SBS 앵커와 기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재 조치가 내려지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KBS가 “노조의 불법파업으로 기존에 방송된 내용의 재편집 분을 방송하고 있습니다, 시청에 불편을 드린 점 사과드립니다”라는 흘림자막을 내보낸 데 대해서도 권고 조치에 그쳤다. ‘불법파업’이라는 자사 사용자 쪽 일방의 입장을 전달한 경우였지만 다른 기준이 적용됐다.

원칙이 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검정색 옷을 입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낙하산 사장에 대한 반발을 꺾기 위해 방통심의위를 제재 수단으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무리수를 둔 셈이다. 애초에 옷 색깔을 문제삼아 징계를 내린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방통심의위 심의가 이처럼 아무런 원칙과 기준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진다는 게 문제의 본질이다.

KBS ‘뉴스 9’는 2008년 감사원의 KBS 특별 감사 관련 내용을 보도해 “직접 이해당사자가 자사에 유리한 내용을 중점적으로 보도했다”는 이유로 주의 조치를 받은 바 있다. 정 전 사장을 퇴진시키기 위한 표적 감사라는 논란이 제기됐지만 방통심의위는 이런 논란을 보도하는 것 조차 금지했다. 그러나 월드컵 중계권 분쟁 관련 보도나 수신료 인상 관련 보도에는 경징계를 내리거나 아무런 징계조치를 하지 않았다. 심의의 형평성 논란을 자초한 셈이다.

지난해 7월 한나라당 조전혁 의원 등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한 교사들 명단을 게재한 것과 관련, 이를 삭제해 달라는 신고를 받고도 심의를 지지부진 연기해 논란을 불러 일으킨 바 있다. 피해 당사자의 신고가 있는데도 2개월 이상 심의를 미루는 경우는 이례적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법원으로 가서 가처분 소송에서 승소했고 이에 불복해 명단을 계속 게재했던 조 의원 등은 거액의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미국산 수입 쇠고기 문제를 다룬 ‘PD수첩’의 제재수위를 결정하는 자리에서는 “왜 그렇게 큰 굉음이 들어갔느냐”, “불손하다”, “규정이 아니라 상식이고 윤리다” 등의 강한 압박이 계속됐다. 천안함 의혹을 다룬 ‘추적60분’ 심의에서는 한 심의위원이 “천안함 피격사건이나 격침사건이라는 일반적인 용어가 아닌 천안함 사건이라고 지칭한 이유는 뭐냐”고 질문을 하기도 했다. 공정성이라는 잣대가 얼마나 주관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였다.

미디어법 논란을 보도한 시사교양 프로그램들이 잇따라 중징계를 받은 적도 있다. ‘뉴스후’와 ‘시사매거진 2580’은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사안을 다룸에 있어서 공정성과 균형성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각각 시청자 사과 명령과 경고 조치를 받았다. 그러나 미디어법을 미화했다는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정부 광고에 대해서는 문제 없다는 결정을 내려 이중잣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지난 3월에는 4대강 사업을 다룬 KBS ‘추적 60분’이 권고 조치를 받은 바 있다. 정부에 비판적인 의견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일부 자막의 설명이 잘못 됐다는 게 이유였다. KBS 노조는 성명을 내고 “천안함이나 4대강 사업 등 유독 정치권력이 불편해하는 것만 심의해서 징계를 내리고 있다”면서 “문제가 있다면 사회적으로 비판을 받고 반론을 하면 되는데 사실상 행정기관인 방통심의위가 이를 규제하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한편 친일 미화 논란을 불렀던 KBS 백선엽 다큐멘터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도 주목된다. KBS 이사 출신의 권혁부 심의위원은 “(백선엽의 공 때문에) 내가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는데, 백선엽 장군을 좀 미화한들 뭐가 문제 되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백씨의 친일 행적을 누락한 것과 관련, 야당 추천 심의위원들이 제작진에게 의견진술을 받을 것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근에는 정부 비판적인 이슈 뿐만 아니라 논조 자체를 문제 삼는 경우도 많다. MBC 라디오 ‘박혜진이 만난 사람’이 일제고사를 거부한 교사들의 발언을 다뤘다는 이유로 주의 조치를 받거나 유성기업 노조 파업을 다룬 ‘손에 잡히는 경제’와 KBS 라디오 ‘박경철의 시사포커스’ 등이 권고 조치를 받은 것 등이 대표적이다. “한쪽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했다”, “공정성과 객관성을 잃었다”는 등의 이유였다.

한국PD연합회는 성명을 내고 “이번 결정은 방송에서 그 누구도 인터뷰를 하지 말라는 소리와 같다”면서 “이는 명백히 언론의 비판기능을 마비시키고, 제작자의 자기검열을 강화시켜 여론 획일화시키려는 술책”이라고 비판했다. 오죽하면 방통심의위 노조까지 나서서 “방통심의위가 공정성의 의미를 기계적 중립성으로 해석해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반영해야하는 방송의 역할을 문제 삼는다면 그 심의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민주당 최종원 의원에 따르면 방통심의위의 지상파 방송 보도‧교양 프로그램에 대한 제재 건수는 참여정부 시절 구 방송위원회에서 심의‧의결한 건수보다 최대 3배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 이후 심의 의결한 34건 가운데 19건이 정부 입장과 상반된 보도였다. 최 의원은 “정부에 의한 방송통제가 지난 전두환 독재정권 시설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된다“면서 “정작 공정성의 잣대로 제재를 받아야 할 곳은 방통심의위”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시사‧보도프로그램이 잇따라 징계를 받고 폐지되거나 PD들이 전출되는 시련을 겪으면서 최근에는 이들 프로그램이 연성화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최근 ‘PD수첩’이나 ‘추적 60분’에서는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을 보기가 쉽지 않다. 지난 7월 ‘시사매거진 2580’이 평양냉면을 이슈로 다뤄 “지금 한가하게 냉면 타령하고 있을 때냐”는 누리꾼들의 거센 비난에 직면했던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별 취재팀 이정환·최훈길 기자

 감시사회를 말한다, 시리즈 연재 순서.

1부. 일상화된 감시·검열 시스템.
1. 여는 글, 뉴 ‘빅 브라더’ 시대.
2. 방통심의위를 해부한다.
3. 방통심의위의 이중 잣대.
4. 무차별 접근 제한, 포털 임시조치.
5. 방송법 32조, 차별적 방송 심의.
6. [인터뷰] 박경신 고려대 법학과 교수·방통심의위 심의위원.
7. [인터뷰] 김보라미 법무법인 동서파트너스 변호사.

2부. 감시사회의 제도적 기반.
8. 일상적 검열, 정보통신망법과 인터넷 실명제.
9. 민간인 사찰의 법적 토대, 전기통신사업법과 통신비밀보호법.
10. 광범위한 개인 정보 수집, 정보통신망법과 전자주민증.
11. 표현의 자유 위협하는 명예훼손 고소·고발.
12. 판도라의 상자, 소셜 네트워크 규제.
13. [인터뷰] 전응휘 녹색소비자연대 상임이사.
14. [인터뷰] 장여경 진보네트워크 활동가.

3부. 여론 통제와 언론 장악의 기제.
15. 냉전 이데올로기의 유물, 국가보안법.
16. 정치 참여 가로 막는 낡은 선거법.
17. 정치·자본 권력의 언론 장악 메커니즘.
18. 테러리즘과 해외 동향.
19. [인터뷰] 민경배 경희사이버대 교수.
20. [인터뷰]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
21.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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