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말, <미디어오늘>에는 영국의 한 유학생으로부터 적잖이 놀라운 내용의 제보가 들어왔다.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을 직접 만나 용서하고, 더 나아가 다른 살인 피해자 가족과 함께 사형제 폐지 운동까지 주도하고 있는 한 재미교포에 대한 이야기였다.

주인공은 현재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유한나(28)씨. <미디어오늘>은 이에 제보자인 최옥균씨를 통해 자세한 사연을 듣고 싶다는 뜻을 유씨에 전했고, 유씨는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몇 차례에 걸친 이메일 인터뷰가 가능했던 것은 통역과 번역을 전담한 최옥균씨 덕분이다.

유씨의 아버지가 살해당한 것은 지난 2005년 5월 한국에서였다. 당시 일부 언론에도 보도된 이 사건은 이른바 ‘묻지마 살인’의 전형이었다. 유씨가 경찰 등으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아버지는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사내들로부터 목과 가슴 등을 흉기로 찔려 사망했다.

유씨나 경찰이나 처음에는 원한관계 등 아는 사람의 소행일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범인을 붙잡고 보니 과거에도 유사한 시도를 한 적이 있는, 아버지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직접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과 옆에서 도운 공범은 형·동생 사이였다.

당시 미국 시카고의 한 법률회사에서 보조 업무를 하고 있던 유한나씨는 아직도 이들이 왜, 무슨 이유로 아버지를 죽였는지 모른다고 했다. 유씨는 “그날,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사실 저도 궁금하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며 “만약, 누군가 이 사건에 대해 좀 더 아는 게 있다면 연락을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버지(오른쪽)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릴 적 유한나씨. 아버지 유모씨는 지난 2005년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이른바 '묻지마 살인'을 당했다.(사진=유한나씨 제공)
 
유씨가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살인범과 직접 마주한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인 지난 2007년 8월이었다. 범인들 중 아버지를 직접 살해한 동생은 방문하기 몇주 전쯤 자살한 상태였다. 그녀는 “왜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을 찾아갔는가”란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지쳤다고나 할까요. 저는 살아야 하고, 이런 일을 겪었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저는 화를 내거나 미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혼자만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수반합니다. 저는 그럴 만한 에너지가 없습니다. 만약 제가 증오하면서 제 남은 생을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제 목숨마저도 아버지와 함께 거두어지기를 희망합니다.”

면회 시간이 다 되어 떠나야 했을 때, 유씨는 그에게 따뜻한 미소를 건넸다고 했다. “내가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나에게 미쳤던 잔인무도함을 용서했음을 알아줬으면 했습니다. 그가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미안해하거나 잘못했다고 느낀다면, 나의 미소가 마음에 평화를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표정으로 추측컨대 그는 미안해하는 거 같았습니다.”

쉽게 믿기 힘든 이 특별한 선택에 대한 믿음과 확신은, 사랑하는 가족을 살인으로 잃었으나 그럼에도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살인피해자가족화해모임(Murder Victims' Families for Reconciliation, 이하 MVFR)’ 활동을 하면서 더욱 굳건해졌다.

현재 미국 내 전국적인 조직인 MVFR의 임원인 유한나씨는 지난 2007년말경부터 거주지인 일리노이주의 사형제 폐지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녀는 사형제 반대 목소리를 내줄 가족 구성원들을 백방으로 찾아다녔고, 주 의회 의원들을 만나 제도 폐지의 정당성을 설득했다.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들에 대한 ‘사적인 용서’를 넘어, 가혹한 형벌제도 자체를 없애는 더 크고 근본적인 ‘용서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일리노이주는 미국에서 16번째로 사형제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팻 퀸 주지사는 지난 3월 9일 사형제 폐지 법안에 최종 서명했고, 이 사실은 일부 국내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진전 뒤에, 아버지를 잔인하게 잃은 한 재미동포의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살인피해자가족화해모임(MVFR)' 일리노이주 구성원들과 함께. 맨 왼쪽이 유한나씨다.(사진=유한나씨 제공)
 
유씨는 사형제 폐지 운동에 나선 이유를 묻자 “사형 집행이 살인자 가족에게 가져다 줄 고통을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극악무도한 짓에도 불구하고 살인자도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제 아버지는 완벽한 분은 아니었지만 저는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분명, 살인자의 가족도 살인자를 같은 방식으로 사랑할 겁니다. 아버지는 결코 살인자가 아니었지만 저는 제가 살인자의 가족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살인자에게 용서는 가당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족사와 관련해) 아버지와 화해했듯이, 살인자들도 용서받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사형 집행은 살인 당사자보다 죄 없는 살인자 가족에 더 끔찍한 일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누군가는 살인자 가족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유씨는 그러나 “가족을 포함해 다른 사람이 누군가의 행위를 모두 통제할 수는 없다. 어떤 살인자는 폭력을 행사했으리라 상상조차도 안 되는 어린 친구들”이라며 “만약 살아 있는 살인자 아버지의 처지와 저의 경우처럼 살인 피해자 가족의 처지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마음이 편할까를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주저없이 후자라고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저는 전자의 경우가 아니라서 차라리 다행이고 축복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전히 고개를 떳떳이 들고 다닐 수 있고, 저희 아버지는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안장되셨습니다.”

유한나씨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 고통스러운 듯했다. “내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눌 때마다 상처가 되살아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아픈 이야기를 기꺼이 공유하는 것은, 살인자에 대한 증오로 삶을 방치하지 않고 용서로 비운 단단한 마음으로 자신의 삶에 집중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유씨는 현재 아버지 일을 겪고 난 후 삶을 정리한 회고록을 집필 중이며 내년쯤 미국에서 출간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녀는 사랑과 용서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이 “꼭 한국에서도 출간되기를 희망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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