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이 인권센터 건립 후원을 위해 “인권을 말하다” 릴레이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인권센터는 최저 생계비도 받지 못하고 활동하는 인권단체들을 위해 최소한의 활동 공간을 지원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돼 오는 12월 준공을 목표로 10억원의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습니다. 20회로 예정된 이 인터뷰 시리즈는 인권 운동가 박래군씨가 대담을 진행하고 향후 단행본으로 출간할 계획입니다. 이 시리즈의 기사들은 예외적으로 CCL(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를 적용해 자유로운 복제와 인용을 허용합니다.

① 두리반 투쟁 승리한 소설가 유채림씨.
② 쌍용자동차 노동조합 기획부장 이창근씨.
③ 양심적 병역 거부자 현민씨.
④ 롯데손해보험빌딩 청소노동자 박근덕씨.
⑤ 불법 사찰 피해자 김종익씨.

“홍대 앞 작은 용산”으로 불렸던 두리반. 크리스마스 이브에 강제 철거를 당한 뒤 531일의 투쟁 끝에 자본의 항복을 끌어내 다시 가게를 열게 됐지만 두리반의 싸움은 아직 끝났다고 볼 수 없다. 소설가 유채림씨는 두리반 주인 안종려씨의 남편이다. 그는 강제 철거를 당한 뒤 한겨레에 ‘아내의 우물’이라는 글을 기고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는 글에서 “대한민국은 사막이다, 우물이 없다면 끝내 말라 죽는 수밖에 없다”고 절규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대해 두리반에서 함께 먹고 자고 싸운 덕분에 다행히 두리반은 새로운 우물을 찾게 됐다. 그러나 아직도 이 땅에는 물 한 바가지만 들고 사막으로 내쫓기는 수많은 두리반이 존재한다. 유씨 역시 “용산 참사를 지켜보면서 그게 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수 있었던 건 두리반 투쟁에 함께 해준 많은 사람들과 승리를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두리반 투쟁은 연대의 가능성을 입증했고 끝까지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남기기도 했지만, 시스템을 건드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근본적인 해법이 아니라는 무거운 현실 인식이 뒤따르기도 했다. 유씨는 “여기서 물러나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했고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그 과정에서 감내해야 했던 파괴된 일상과 무너진 미래, 절망과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유씨는 인터뷰 도중 여러 차례 눈물을 훔쳤다.

박래군 : “크리스마스 이브에 강제 철거를 당했다. 기억하기 괴롭겠지만 그날 상황을 설명해 달라.”
유채림 : “2009년 12월24일 오후 3시쯤 용역 30여명이 몰려왔다. 집 사람을 구석으로 내몰고 집기를 빼내기 시작했다더라. 소식을 듣고 달려갔더니 내 멱살을 잡아 집사람 옆에 패대기를 쳤다. 집기를 다 들어내고 난 뒤에는 철판으로 펜스를 쳐서 출입문을 막아버리더라. 그때까지만 해도 놀라기만 했던 집사람이 펜스를 보더니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서너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장사를 하던 내 가게였는데 갑자기 내쫓겼으니 그럴 만도 하지. 집 사람이 니들이 인간이냐고 소리치니까 용역들 하는 말이 밤길이나 조심해 이 년아, 그러더라. 정말 비참하더라. 집사람을 달래서 밥이라도 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펜스를 두들기면서 왔다갔다 하더라. 가장으로서 그때만큼 무력하고 비참한 때가 없었다.”

박래군 : “언제 점거 농성을 시작했나.”
유채림 : “새벽에 집에 들어갔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까 집사람이 안 보이더라. 두리반으로 다시 갔구나 싶어서 밥을 해서 갔더니 계속 눈물 떨구고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거야. 그러더니 나는 농성할 거라고 뚫고 들어가겠다고 하더라. 나는 불가능하다고 했지. 펜스가 어마어마했거든. 엄두가 안나더라. 용산 참사 남일당이 먼저 떠올랐고 엄청난 법적 책임이 따를 테니까. 폭력이 두렵기도 했고. 그래서 포기하자 했더니 이대로 들어가면 살림하면서 못 살 거 같다고, 나 없는 걸로 치고 직장 잘 다니면서 애들 잘 돌보라고 하더라. 그날 새벽 연락을 받고 후배가 침낭과 절단기를 들고 찾아왔더라. 그래서 12월26일 새벽 2시에 펜스를 뚫고 들어갔다.“

박래군 : “그때 기분이 어땠나. 무섭지 않던가.”
유채림 : “집사람이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도 자꾸 웃더라. 잃었던 가게를 되찾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겠지. 펑펑 울면서 환호성을 지르더라고.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일단 들어오긴 했는데 새벽 4시 반쯤 되니까 이제 뭘하지? 공포가 밀려오더라. 새벽에라도 용역들이 밀고 들어오면 남일당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있나.”

박래군 : “나를 찾아오지 그랬나. (웃음)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 보니 너무 아마추어 같더라. 점거 농성을 해봤어야 알지.”
유채림 : “박래군을 알긴 했지만 너무 어마어마한 사람이라(웃음) 감히 찾아갈 엄두를 못 냈다. 제일 먼저 떠올랐던 데가 국가인권위원회와 엠네스티 한국 지부였다. 그런데 용산 참사 때도 아무런 역할을 못했던 덴데 뭘 할 수 있겠나 싶더라. 가뜩이나 이명박 정부에게 뭘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보호막으로 생각했던 게 한국작가회의였다. 집에 가서 동료 작가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도와달라고. 두리반에 돌아왔더니 오전 11시더라. 그때부터 작가들이 하나둘씩 몰려오기 시작했다.”

박래군 :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보통은 용역을 세워두고 지키지 않나.”
유채림 : “다음날 아침 인부들이 왔는데 우리가 펜스를 뜯어내고 들어와 있는 걸 보고 바로 철수하더라.”

박래군 : “초반에 쓸어버렸으면 끝났을 텐데(웃음). 정말 다행이다. 워낙 작은 데고 다 끝난 거라고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마침 크리스마스라서 방심했던 것 같기도 하고.”
유채림 : “27일에 경찰이 왔다. 우리 부부 둘과 작가회의 식구들, 후배들 해서 여섯 명이 있었는데 이게 다냐고 물어보길래, 2층에도 있다고 둘러댔다. 누군가를 더 불러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용역들 밀고 들어오면 난리가 날 텐데, 남일당처럼 될까봐 아무도 못 부르겠더라. 그나마 성직자를 부르면 낫지 않을까 싶어서 아는 신부님과 목사님을 불렀다. 신부님이 강원도 화천에서 시속 200km를 밟으면서 오셨다더라. 그날 오후에 성명서를 만들었다. 성명서가 인쇄돼서 왔는데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가 않는 거야. 이런 게 무슨 힘이 있나 싶고 자꾸 무력감이 들고 두렵더라.”

박래군 : “용역들은 안 왔나. 나는 그때 용산 참사 대책위원회 일을 맡고 있어서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을 때다.”
유채림 : “안 왔다. 경찰이 와서 성명서를 받아보고는 작가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태도가 달라지더라.”

박래군 : "재개발 계획이 통보됐을 때 그렇게 철거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유채림 : “용산 참사를 보면서도 그게 내 일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재개발 계획이 나오고 명도 소송을 벌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300만원 받고 내쫓길 거라고는, 그렇게 우리나라 법이 무지막지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강제 철거 당하고 나서야 현실 인식이 되더라.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누가 볼까 창피하더라. 뭐하러 저러나, 딱하긴 하지만 떼를 쓴다고 될 일도 아니고 그냥 새 출발하지, 나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박래군 : “언론 보도가 힘이 됐을 것 같다. 마침 그때 용산 참사 장례식이 있지 않았나.”
유채림 : “한겨레에 처음 기사가 났을 때가 1월4일, 용산 장례식은 1월9일이었다. 분위기가 그래서 용역들도 함부로 치고 들어오지 못했던 것 같다. 그때 찾아온 동료 작가가 묻더라. 노동자는 어떻게 싸우죠? 뭘 어떻게 싸워? 그랬더니 노동자의 방식으로 싸우겠죠? 그러는 거야. 농민은 어떻게 싸우죠? 농민의 방식으로 싸우겠죠. 그러더니, 작가는 어떻게 싸우죠? 그러더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홍두깨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더라. 나는 작가니까 작가의 방식으로 싸워야겠다. 그래서 내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두리반 사장 안종려(왼쪽)씨와 남편 유채림씨. ⓒ이치열 기자.
 

박래군 : “한겨레에 쓴 ‘아내의 우물’이라는 글, 정말 인상적이었다.”
유채림 : “그 글을 쓰고 나니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홍익대 앞 인디 밴드들이 찾아온 건 2월 초였다. 머머스룸의 장동민씨가 찾아와서 두리반을 돕고 싶은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공연 밖에 없다, 공연을 해도 괜찮겠냐고 그러기에 고맙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디 밴드가 뭔지도 몰랐다. 아마추어 가수들이 떠보려고 길거리에서 공연하고 그러는 줄로만 알았다. 2월 마지막주에 첫 공연을 했는데 1층이 가득 찼다. 다큐멘터리 상영회도 열렸고 촛불 예배도 드리고 칼국수 음악회, 사막의 우물 음악회 등등 문화 예술 행사로 일주일이 가득 찼다.”

박래군 : “함께 하는 사람이 많아서 공포감이 좀 줄었겠다.”
유채림 : “여전했다. 배우 윤석화가 그랬나. 공연이 끝나고 빈 객석을 보면 눈물이 난다고. 정말 사람들 북적북적하고 밴드들 공연하고 할 때는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그러다가 자정 넘어 싹 빠져나가고 나면 우리 부부만 남아있는 날도 있었는데 공포감이 밀려왔다. 바람에 펜스가 흔들릴 때면 깜짝깜짝 놀래곤 했다. 하루도 마음 편이 잔 날이 없다.”

박래군 : “나도 경험해 보니 철거민 투쟁 만큼 힘든 싸움이 없더라.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싸우는 거라는 편견이 있고 연대를 끌어내기도 쉽지 않다. 고립돼서 싸우다 보면 용산처럼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런데 두리반은 어설픈 초짜들인데도 광범위한 연대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게 두리반이 용산처럼 되지 않은 이유 아니었을까.”
유채림 : “정말 아무 것도 몰랐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

박래군 : “당신들은 정말 평범한 사람들 아닌가.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달라졌나.”
유채림 : “2007년 12월 명도 소송장이 날아왔다. 영업 시작하고 2년 10개월 만이었다. 우리가 여기에 투자한 돈이 1억3천만원인데 이사비용 300만원만 준다더라. 아직 대출금도 갚지 못한 상태였다. 이대로 나가면 굶어죽기 딱 좋게 됐는데 누가 그냥 나가겠나. 나중에는 두리반 반 정도 크기 가게만 얻을 수 있다면 나가겠다고 했지만 이사 비용 이상은 줄 수 없다고 하더라.”

박래군 : “용산 참사 이후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이 개정되면서 상가 세입자의 영업 보상 기간이 3개월에서 4개월로 늘어났는데 두리반은 그 혜택 조차도 받지 못했다.”
유채림 : “상가 임대차 보호법 10조에 따르면 영업권을 최소 5년간 보장하도록 돼 있지 않나. 그 안에 내보내려면 영업 보상을 해줘야 하고 시설 투자비도 돌려줘야 한다. 그런데 재개발이나 재건축, 지구단위계획의 경우엔 상가 세입자를 보호할 의무가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시행사에서 세입자들을 하나하나 개별 접촉했다. 이웃 가게들은 버티다 못해 100만원이라도 더 받으면 다행이라며 하나둘씩 떠났고 결국 두리반만 남게 됐다. 그야말로 물 한 바가지만 들고 사막으로 나가라는 거다. 그렇게 안 나가고 버티고 있었는데 한 달 뒤 강제 철거를 당한 거다.”

박래군 : “먼저 나간 사람들은 정말 이사비만 받고 나갔을 거 아닌가.”
유채림 : “반드시 개별적으로 전화로 연락하라고 하더라. 그럼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 그래서 꽃집은 700만원, 이발소는 900만원씩 받고 나갔지만 댄스학원은 한 푼도 못 받고 그냥 나갔다. 댄스학원이 있던 건물은 유리창을 다 깨뜨리고 락카 페인트로 보기 싫은 낙서를 해놓아서 도저히 영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댄스학원 주인이 두리반에 찾아와서 소주 달라고 하면서 억울해서 못 나가겠다고 하소연을 하더라. 멱살도 몇 번 잡혔다더라. 그러더니 못 견디고 그냥 나가버렸다. 우리도 그런 두려움이 있었다. 한 푼도 못 받고 두둘겨 맞고 쫓겨나지 않을까. 그렇지만 우리는 끝까지 전화하지 않았다. 300만원 그 까짓거 받으나 안 받으나 죽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박래군 : “용역들이 들어냈던 집기들은 어떻게 됐나. 새 두리반을 열게 되면 새로 사야 하는 것인가.”
유채림 : “5톤 트럭 두 대에 나눠서 싣고 갔다. 3개월쯤 지나서 공문이 날아왔는데 경기도 고양시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고 보관 비용을 600만원 내고 찾아가라더라. 600만원이 어디 있겠나. 찾아온다고 해도 둘 데도 없고. 아마 경매로 중고 시장에 팔려갔을 거다.”

박래군 : “안정적인 직장에 다녔다고 들었다. 직장도 잃지 않았나.”
유채림 : “처음에는 휴직을 했는데 휴직 기간이 끝나서 결국 사직을 했다. 돈이 없으니까 퇴직금 받은 것과 연금을 해지해서 버텼다. 이제는 정말 두리반을 다시 열지 못하면 나와 내 가족은 끝장 난다는 생각이 들더라. 겨울에는 스티로폼 깔고 침낭 안에서 자면서 추위를 버텼고 여름에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끔찍한 더위도 이겨냈지만 끊임없이 밀려오는 불안과 공포에 맞서는 게 가장 힘들었다. 그렇지만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보면 힘들다는 말을 못 하겠더라. 적당히 타협해서 끝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깨지면 같이 깨지고 승리하면 같이 끌어안는 것이지 우리 부부만 살 길은 없었다.”

박래군 : “사실 철거민 투쟁하면서 가장 허망한 것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타협하고 돈 챙겨서 짐 싸들고 나가버리는 거다.”
유채림 : “우리는 우리와 함께 싸우는 사람들 자존심을 세워주고 싶었다. 함께 승리하고 싶었다. 용산 참사 이후에 두리반은 하나의 상징이 됐다. 반드시 두리반을 찾아서 이렇게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전기가 끊기고 난 뒤로는 밥도 두 끼 밖에 먹지 못했다. 아침에 된장찌개를 끓이면 점심 때는 이미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먹고 자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건 발가벗겨진 것 같은 생활이었다. 정말 견디기 힘들더라. 나는 직장에서도 독립된 공간에서 조용하게 일하는 걸 좋아했다. 그런데 일상이 다 노출된 상태로 1년 반 가까이 낯선 사람들과 공동 생활을 했다. 개인의 시간과 공간이 모두 파괴돼 버린 일상의 고단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고 돌아갈 곳도 없는 그 막막함이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재능교육 노동자들이 얼마나 힘들게 싸우고 있는지 이제는 안다. 명동 마리의 철거민들이나 한진중공업의 김진숙씨가 얼마나 외로운지도 안다.”

박래군 : “안종려씨와 갈등도 많았다고 들었다.”
유채림 : “어떻게 싸우느냐를 두고 논쟁이 좀 있었다. 집사람은 전국철거민연합 사람들을 자주 만났는데 그 사람들은 우리가 싸우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박래군 : “전철연 방식이라는 건 뭔가.”
유채림 : “충돌을 만들려고 했다. 이를 테면 건물 옥상에 스피커를 걸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민중가요 같은 걸 틀어놓자, 그렇게 하면 경찰이나 구청에서 뭔가 액션을 보일 거라는 건데, 나는 그거 반대했다. 왜 우리가 쉽게 가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느냐. 차를 한 대 사라고도 하더라. 확성기를 달고 돌아다니면서 집회도 하고 선전전도 하고 하라고.”

박래군 : “사실 그게 전통적인 철거민 투쟁 방식이다. 그렇지 않으면 고립되고 잊혀지니까.그런데 두리반은 그걸 거부하고 딴따라들 불러놓고 띵가띵가했으니 이상해 보이기는 했을 것 같다. 용산 참사 이후 전철연 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확산됐다. 그래서 어느 정도 밀고 당기다가 협상하는 쪽으로 많이 가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두리반의 승리가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눈 앞에 보이는 이익에 매몰되지 않고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지역 사회와 폭넓게 연대를 지속했다.”
유채림 : “한진중공업이나 기륭전자, 동희오토 같은 데는 사회적 관심도 많고 연대도 잘 되는데 철거민 투쟁은 돼 안 될까. 너무 처참하고 비참하기 때문 아닐까. 나는 두리반이 철거민 투쟁의 새로운 상징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함께 싸우는 사람들에게 함께 할 명분과 성과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리반처럼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원칙을 어기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협상하자는 제안이 왔을 때도 적당히 뒤에서 쑥덕쑥덕 끝내지 않고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유했다. 내가 나서기 보다는 대책위원회 차원에서 논의하도록 했다.”

박래군 : “협상이 타결되기까지 과정을 이야기해달라.”
유채림 : “지난해 12월 만나자는 제안이 처음 들어왔다. 처음에는 철거업체 사람들이 떡대들을 몰고 왔더라. 대책위와 이야기하라고 했더니 자기네들은 대책위 인정 안 한다고 하더라. 12월 말까지 해결 안 되면 삼오진 방식대로 하겠다고 하더라. 삼오진, 악명 높은 철거업체 아닌가. 속으로는 잔뜩 쫄긴 했지만 그렇다면 두리반은 두리반 방식대로 하겠다고 배짱을 부렸다. 그랬더니 떡대가 발끈 화를 내더라, 그게 뭐냐, 그래서 차차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맞섰다. 그날 오후 트위터에서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떡대들이 물러났다. 그때가 1주년이 다 돼 가던 때였다. 기자회견을 열고 삼오진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다 까발렸다. 그랬더니 며칠 뒤 삼오진 사람들이 다시 찾아왔더라. 한층 누그러진 태도로 우리가 뭘 그렇게 위협적으로 했느냐고 그러더라.”

박래군 : “걔들도 당황스러웠겠다. 삼오진 방식은 확 쓸어버리는 건데 이거 섣불리 건드렸다가 파장이 크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유채림 : “며칠 뒤 다시 찾아와서 대책위를 만나자고 하더라. 그래서 1월에 첫 만남이 있었다. 홍대 주변에 두리반 정도의 가게를 얻어주기로 하고 이야기가 진행됐다. 보상이라는 표현을 두고 우리는 배상이라고 써야 한다고 맞서기도 했다. 결국 우리 주장이 다 받아들여졌고 마포구청에서 조인식 갖는 것까지 밀어붙였다.” 

박래군 : “두리반의 성공은 철거민 투쟁의 역사에서도 정말 놀랄 만한 일이다. 지난 6월8일 조인식을 치르고 배상금을 받아 새 가게를 알아보러 다니고 있다고 들었다. 점거 농성 531일, 단전 324일 만의 성과다. 새 두리반은 언제쯤 오픈인가.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
유채림 : “첫 번째 원칙은 홍대 인근, 두 번째 원칙은 인디 밴드들과 함께 지낼 공간을 찾는 건데 그럴 만한 공간이 별로 없더라. 가장 다행스러운 건 두리반을 다시 차리게 됐다는 게 아니라 불안이 사라졌다는 거다. 1년 반 만에 집에 들어가니 모든 게 엉망이더라. 그렇지만 이제 마음 편히 자게 됐다는 안도감이 들더라. 우리 집사람이 올해 쉰넷인데 점거 투쟁하던 1년 반 동안 생리가 없었다. 그런데 다시 집에 들어가니 며칠 뒤 생리를 시작했다고 하더라. 몸이 말을 하기 시작하는 거다.”

박래군 : “요즘은 명동 마리 투쟁을 돕는다고 들었다.”
유채림 : “용역들이 밀고 들어왔는데 정말 성질이 났던 건 우리 애들 장비를 다 망가뜨렸다는 거다. 두리반에서 공연하던 인디 밴드들인데 두리반이 합의된 뒤 갈 곳이 마땅치 않아 마리 투쟁을 돕고 있었다. 드럼이나 앰프, 스피커가 다 부서졌다. 이게 어떤 장비인가 싶으니까 돌아버리겠더라.”

박래군 : "그 장비를 다시 사줬다던데."
유채림 : "중고 장비라 별로 비싸지는 않았다. 두리반에 보였던 관심과 연대를 이제는 마리에 쏟아야한다고 생각했다."

박래군 : “여전히 이 땅에는 수많은 두리반이 있다. 모두가 두리반처럼 싸울 수는 없지 않겠나.”
유채림 : “‘여기 사람이 있다’는 용산의 구호를 생각해 봐라. 그게 어느 날 내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봐라. 우선은 말도 안 되는 개발 악법을 개정하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 가장 낮은 곳, 가장 어려운 곳을 돌아보고 사회적 연대를 복원하는 작업도 필요할 것 같다. 두리반이 작은 희망의 씨앗을 뿌렸으면 좋겠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박래군은...
오랫 동안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로 활동해 왔던 박래군씨는 최근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용산 참사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병원과 명동성당에서 10개월 가까이 갇혀 지내다 유가족들의 보상 대책이 협의된 뒤 자진해서 경찰에 체포됐다. 대추리 투쟁과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 한진중공업 희망의 버스 등 투쟁의 현장에 늘 그가 있었다. 군부독재 해체를 외치며 분신 자살한 박래전 열사의 형이기도 하다.

인권센터는 무슨 일을 하는 곳인가.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10만명은 되지 않을까. 10만명이 1만원씩만 내면 10억원을 모을 수 있지 않을까. 박래군씨는 인권센터를 만드는 일에 지금까지 운동 인생을 모두 걸겠다고 선언했다. 인권센터는 인권교육과 상담을 받을 수 있고, 토론회와 문화행사가 열리는 인권운동의 허브가 될 전망이다. 인권센터는 세계 인권의 날인 오는 12월10일 출범을 목표로 모금을 하고 있다. 9월3일부터 100일의 기적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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