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긴가민가했던 것 같다. 올 들어 이명박 정부를 중심으로 한나라당과 보수언론 일각이 재벌 지배체제를 강력히 비판하고 복지담론을 공세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을 때, 그 반대편인 진보진영 쪽의 반응은 대체로 ‘냉소’였다. ‘선거용’이거나 ‘인기영합 정책’일 뿐이며 ‘부자 감세’로 대표되는 본질이 변하지 않는 한 실질적인 대안은 나올 수 없다는 지적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최근 진보 일각에서 하나둘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그 결이 사뭇 다른 듯하다. 놀라움과 당혹감, 그리고 위기감으로 표현될 수 있을 만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한겨레 정남기 경제부장은 지난 7월 21일자 칼럼에서 보수의 ‘좌회전’을 ‘상전벽해’라고 칭했다. 정 부장은 특히 이명박 정부가 주도한 재벌의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과세가 “현 정부 아래서 법제화될 줄은 몰랐다”고 고백하면서 “비상장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가 재벌 총수들의 편법상속 수단이란 주장은 진보적인 시민단체와 학자들, 그리고 한겨레가 오래 전부터 제기해온 것”이라고 토로했다.

   
재벌의 계열사 일감몰아주기 행태를 강력 비판한 조선일보 6월 30일자 8면 기사.
 
시사평론가 김종배씨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최근 보수의 드라이브는 자칫하면 진보에 ‘재앙’이 될 수도 있다고 보는 쪽이다. 김씨는 “보수세력은 최대 화두인 사회양극화의 해결책으로 ‘747 공약’ 같은 성장담론은 더 이상 통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며 “내년 총선·대선에 맞춰 ‘파이 쪼개기’ 즉 재벌을 때려 분배를 활성화하는 방법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복지담론에 한 발 걸쳐 야권의 ‘독점이윤’을 방지한 것처럼 재벌개혁 또는 시장개혁 담론에 '알박기'를 하려는 측면도 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 경우 복지담론만을 중심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진보진영은 현실성, 설득력 측면에서 크게 밀릴 수밖에 없다. 김종배씨는 “진보의 복지담론은 각종 예산수치, 재원마련 대책을 앞세운 보수의 공세에 홀로 구석에서 난타를 당하게 된다”고 진보에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물론 야당과 시민사회단체, 언론 등 진보진영이 재벌 문제를 그냥 넋 놓고 바라만 보고 있다고 하긴 어렵다. 한진중공업 사태 등에서 보듯 비판의 강도는 보수진영 그 이상이라 할 수 있고, ‘재벌개혁 정책’ 역시 지난 십수년 간의 연구·경험을 바탕으로 이미 촘촘하게 짜여져 있다.

문제는 재벌개혁부터 복지담론까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낼 총론, 정치슬로건의 부재다. 김종배씨는 “큰 그림이 먼저 있어야 한진중공업이든 희망버스든 무상급식이든 힘을 더 받을 수 있는데, 요즘 진보의 대응은 개별적이고 즉자적이다. ‘공생발전’, ‘공정사회’, ‘동반성장’ 같은 굵직한 화두는 보수 쪽에서만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7월 초 민주당이 ‘야심차게’ 내놓은 비정규직 대책이 쓴소리를 들은 이유 또한 같았다. 정규직 확대, 차별 시정, 최저임금 인상 등 내용 자체는 그간 진보정당과 노동계가 요구해온 것을 대폭 수용한 전향적·진보적인 것이었으나,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접근인지 아쉽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비정규직 확산의 근본 원인인 시장경쟁 체제의 전면 개혁에 대한 고민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이와 관련 “비정규직 대책은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노동·사회정책’의 하나로 놓아야 한다. 체계적인 정책이 없으면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문제에 대해 일회적이고 부족한 혹은 잘못된 대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민주당은 괜찮은 일자리 없이 복지국가가 없고, 양극화 상황에서 복지국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좀 더 분명히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7월 30일 오후 부산역 광장에서 열린 희망버스 3차 문화제에 참석한 야5당 정치인들.(사진=이치열 기자)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진보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복지담론마저 보수에 빼앗길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최근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반값등록금과 무상보육을 이슈화시킨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였다.

진보언론 역시 복지 관련 보도의 질과 파괴력이 보수언론에 크게 밀리는 양상이다. ‘반값등록금 이슈’ 보도가 대표적이다. 전국언론노조 한겨레지부 진보언론실천위원회는 7월 6일 발행한 소식지에 지난 5월 30일부터 6월 29일까지 한달 동안 조선·중앙·경향·한겨레 4개 신문의 보도 내용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한 바 있는데, 모든 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매체는 조선이었다.

소식지는 “조선은 한달 동안 16차례나 등록금 관련 기사를 1면에 올렸고, 현장감을 살린 10회 짜리 기획기사를 가장 먼저 내놨으며, 시리즈 중반부터 ‘소득별 등록금 차등화’로 논조를 결정해 집중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한겨레와 경향에는 “조선·중앙처럼 딱 부러진 논조를 결정하지 못한 채 다소 허둥거리는 모습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6월 들어 한국대학생연합 등을 중심으로 한 대학생들의 촛불집회가 시작되자 본격적인 기획 경쟁에 집중하지 못하고, 촛불에 ‘매몰’되는 한계를 보였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에게 촛불 집회에 나오라고 선동하는 듯했다”, “6월 항쟁 24주년을 앞두고 진행된 촛불과 등록금을 과하게 연결하는 보도에 머물렀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경향신문 6월 8일자 1면 머리기사. 등록금 문제에 대한 심층분석 없이 대학생들의 집회 참석만 선동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한나라당마저 ‘무상’, ‘반값’ 복지담론을 제기한 현실에서, 진보진영이 선택할 수 있는 차별화된 대안은 그리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더 큰 문제는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가 경제체제·복지문제와 관련해 또 어떤 공세적 대책을 제시할지 앞날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인데, 이 경우 진보는 더더욱 심각한 혼란에 빠지거나 보수의 꽁무니만 좇다 2012년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다.

뚜렷한 대안이 없다면 이제까지 해온 방식이 과연 옳았는지부터 철저히 따져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미국학과)는 이와 관련 “무조건 ‘무상’, ‘보편주의’가 옳다는 생각, 보수보다 더 왼쪽으로 가는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 진보가 제시하는 것만이 시대정신이 된다는 기대부터 버려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이를테면 진보진영이 대표 정책으로 내세우는 무상급식·무상의료·무상보육 정책이 과연 국민들로부터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는지, 모든 복지 영역에 ‘보편주의’ 적용을 외치는 게 큰 공감을 얻을 수 있는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자신의 이념이 아니라 시민들의 문제의식과 욕구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전제 위에서 정책노선이 결정된다는 근대적 정당의 상식이 한국에서는 자주 망각된다. 이는 이른바 정치엘리트로 자임하면서도 결국 자신들의 예측과 크게 다른 선거 결과에 자주 놀라는 기이한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지적하면서 “그런 점에서 난 아직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은 근대적 훈련조차 충실하게 내면화되어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도 지난 2월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 “복지 담론이 이제 진보세력의 전유물이란 사고는 버려야 한다. 마음먹기에 따라 보수도 착한 일을 할 수 있다. 진보·보수의 경계선도 칼로 두부 자르듯 그어지는 게 아니다”라며 “정책을 잘못 내면 신뢰는 더 깨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진보·보수를 갈라 치고 원조·명품 진보와 짝퉁 진보를 나누는 게 아니다. 길게 보고 국민의 신뢰를 다져갈 때”라고 강조한 바 있다.

최근 진보진영 전반이 보수에 비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또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전략·기획 능력의 부재, 지지부진한 통합 논의, 상대적으로 불리한 언론 지형, 시장·재벌 개혁과 노동·사회 연대에 대한 민주당의 어정쩡한 입장 등이 그것이다.

과거 같으면 당장 실현가능한 것부터 하나하나 해결해나가자, 적이 한가로운(?) 소리가 흘러나왔을 법하다. 실제 진보진영 일각은, 여전히 최근 보수의 움직임을 ‘선거용’이라거나 ‘가능하지 않은 시도’로 폄훼하며 별 긴장감을 드러내지 않는 분위기다. 하지만 과연 그것뿐일까?

“우리 사회 권력의 무게추가 정치권력에서 재벌권력으로 옮겨간 지는 이미 오래다. 자본주의 4.0 시대의 핵심은 대기업이 나눔과 배려,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 대기업은 아직도 시대가 변한 줄을 체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여·야의 급선무는 우리 경제가 자본주의 4.0 시대로 확실히 옮겨갈 수 있도록 튼튼한 법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는 것이다. 그래야 대기업이 정치권을 얕잡아 보지 못한다. 대기업은 밉든 곱든 정치권의 뒤엔 국민이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서민과 소비자가 진짜 성나면 대기업의 힘은 하루아침에 속 빈 강정이 될 수 있다.”

조선일보 8월 18일자 주용중 정치부 정당팀장이 쓴 칼럼의 일부다. 2011년 진보진영은 ‘이런 조선일보’를 상대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조선일보 8월 18일자 주용중 정당팀장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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