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동안 밤 새게 하며 잠도 못자게 부려먹고..."

탤런트 한예슬 씨가 촬영 거부 후 미국으로 출국한지 하루 만에 돌아오겠다고 해 일단락되었던 KBS 드라마 <스파이 명월>불방 사태가 한 씨의 스타일리스트가 트위터에 올린 글로 새로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또 다수의 언론도 한 씨를 일방적으로 비판하던 논조에서 벗어나 한국 드라마 제작 환경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는 쪽에 방점을 찍기 시작해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한 씨의 스타일리스트는 8월 17일 새벽에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장문의 글로 한 씨에게 모든 비판이 집중된 상황의 부당함을 토로했다. 한 씨가 두 달 동안 살인적인 촬영일정에 시달렸고 연예인이기 때문에 모든 상황을 감내해야 했다는 것이다.

한 씨의 스타일리스트는 “여자가 3~4일 간 연속 밤샘 후 쓰러지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라며 “살인적인 스케쥴로 두 달을 밤새며 일하게 한 후 촬영 일정에 늦은 한예슬을 무개념녀로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또 이번 사태의 책임이 전적으로 한예슬에게 있다고 성명을 낸 현장 스탭들에게 “이해는 되지만 답답하다” 며 “같이 말도 안되는 고생을 해놓고 그런 성명을 썼는가”라며 섭섭함을 토로했다. 

   
@CBS노컷뉴스
 
그는 마지막으로 "연예인이면 두 달 밤새도 지각하면 안 되고 아파도 안 되며 쓰러질 땐 사람 많은 곳에서 쓰러져야 하나“며 ”(한 씨가) 단순히 피곤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행동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나"라고 덧붙여 이번 사태가 한 씨 개인의 돌출행동에서 빚어진 일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영화 칼럼리스트 듀나는 이번 불방 사태에 대해 주목할 만한 시각을 보여줬다. 연예전문 인터넷 언론 ‘엔터미디어’에 기고한 <한예슬은 정말 신성을 모독했나>라는 글에서 “과연 방송 결방이 시청자와의 신성한 약속을 깬 것인가” 라는 물음을 던진 것이다. 이어 “미국의 경우는 결방이 당연한 스케쥴의 일부”라며 “다음 에피소드가 완성되지 못하면 몇 주를 재방송을 내보내는 경우도 있다”라고 말했다. ‘결방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논리는 한국에서나 당연시되는 '신화'라는 것이다.  

듀나는 또 생방송 수준의 촬영을 당연시하고 있는 제작 시스템을 지적하며 ‘다른 방법으로 일을 못하는’ 한국 드라마 제작 현실을 ‘개고생 보존 법칙’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아무리 드라마 제작현장이 몇개월 동안만 지속되는 노동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수면 시간은 지켜야 할 권리이며 그 권리의 사수에 따른 이득은 시청자에게 돌아간다”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듀나는 “왜 우린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이며 그들이 상식적인 노동조건을 누리는 걸 당연하다고 보지 않는 걸까” 라는 일침을 가했다. 이번 <스파이 명월> 불방 사태가 단지 한 씨의 돌출행동에서 빚어진 일이 아닌 전체 구조의 문제이며 나아가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고액의 돈을 받는 배우부터 비정규직까지 모두 ‘노동자’들이라는 지적이다.

사실 한예슬 씨와 <스파이 명월>제작진의 마찰이 결정적으로 불거진 것도 ‘주 5일 촬영 요구’를 하는 등 제작 여건(노동 강도)에 대해 한 씨가 자신의 정당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언론들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한 씨에게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모두 다 힘든데 왜 못참느냐” 라는 것이 주요 논리였다. 스포츠 동아는 7월 21일자 <한예슬, ‘스명’ 주5일촬영 요구? “미치지 않고서야”>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방송을 펑크내겠다는 생각이 아니고서야 미친짓(?)이라는 것이 현장의 목소리” 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전했다.

하지만 한 씨의 ‘돌발 출국’ 후 많은 언론들은 한국 드라마 제작 현실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한 씨의 이번 행동의 정당성 여부와 무관하게 한 씨의 이번 '돌출'이 결과적으로 문제가 많으면서도 그동안 용인돼왔던 한국 드라마 제작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경제전문지 헤럴드 경제는 <완성도 갉아먹는 쪽대본…시청률만 따지는 제작사…>라는 기사를 통해 “이번 사태는 한예슬 개인의 문제를 넘어 한국의 드라마 제작시스템 전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며 “급조된 생방송 시스템은 드라마의 완성도를 낮추고 흥행 실패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차기작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인터넷 언론 오마이 뉴스는 <한예슬 사태? '마찰' 빚었던 배우, 이전에도 있었다>는 기사를 통해 고현정, 김정은 등 다른 배우들도 제작진과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 촬영 거부를 하는 등의 ‘파행’이 있었으며 이것이 한 씨 만의 특별한 일이 아니며 이를 사전에 봉합하지 못한 제작사나 방송사의 책임도 일정 부분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꼬집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 씨의 행동이 “돈도 많이 버는데 배부른 투정”이라는 시각도 여전하다. 인터넷 언론 OSEN은 <한예슬의 1인시위 왜 실패로 끝났나>라는 기사를 통해 “한예슬이 주연배우로서 본분에 맞지않는 행동으로 스트라이크를 벌인 까닭이다... 가장 많은 출연료와 월등하게 좋은 대우를 받았을 톱스타 한예슬이 지각, 거부, 이탈 등의 단어로 포장된 불협화음들을 냈다는 관계자들의 수군거림이 나오는 현실도 본질을 흐리고 있다”고 정리했다. 또 “한예슬부터가 자신을 둘러싼 제작 환경만 둘러봤을 뿐, 타인을 향한 배려나 모두를 위해 먼저 희생하겠다는 마음이 없었기에 이렇게 모든 일이 왜곡되지 않았을까”라며 한 씨를 비판했다.

이렇듯 언론과 일부 네티즌이 한 씨를 비판한 논리 중 제일 당연시 된 것은 “돈도 많이 버는데 참아야지 웬 투정이냐” 라는 것이었다. 연예인을 비판할 때 제일 먼저 등장하는 논리다. 소속사와의 계약 문제로 ‘파업’을 하는 아이돌에게도 악플을 성토하는 연예인에게도 “돈도 많이 버는데 좀 참아라” “너희가 파업하면 ‘한류’가 흔들린다” “나에게 그만한 돈을 주면 나는 더한 일도 하겠다”라고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는 저열한 논리는 ‘고소득자’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대중의 심리를 교묘히 파고들었다.

하지만 소득의 높고 낮음을 떠나 ‘누구나 보장받을 권리’는 있다. 드라마 현장에서 제일 많은 돈을 받는 배우든 비정규직 스탭이든 똑같이 보장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물론 한예슬 같은 탑스타들이 그렇지 않은 스탭들에게 평소 얼마나 '동료'로서의 연대를 보여주고 있는가는 별 문제이긴 하다). 교통사고를 당해도, 제작 현장에서 다쳐도 ‘시청자와의 약속이니’ 촬영에 임해야만 하고 그것을 ‘투혼’이라고 치켜세우는 언론도 분명히 그런 것쯤은 알고 있을 터이다.

한 씨는 17일 오후 5시 한국으로 입국해 촬영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이번 사태는 한 씨의 ‘사과’로 매듭지어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한 씨가 던진 드라마 제작 현장의 문제와 탑 스타도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어떤 권리’에 대한 논쟁은 지금부터 시작일 수 있다. 그것은 또 비단 탑 스타의 '권리'에 관한 것만은 결코 아닐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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