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평집 <10센티 정치> 펴낸 경향신문 김상택화백
만평집 <10센티 정치> 펴낸 경향신문 김상택화백
"충무로 조수"에서 "1면톱" 화백으로
서민수준으로 정치풍자... "만화는 만화로 이해돼야”

“저는 만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김상택화백은 최근 출간한 그의 만평 모음집 ‘10센티 정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장안의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인기절정의 시사만화가가 “만화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만화가가 만화를 모른다면…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시사만화에 대해 갖고 있는 철학이나 원칙은.
“에이 철학은요”

-만화를 그리는게 즐겁습니까.
“지겹죠. 직장에 매인 몸이고 또 회사에서 만화 그리는 일을 맡겼으니까 열심히 하려고는 합니다”
-만평집을 내게된 계기는.
“제가 낸게 아닙니다. 회사가 냈죠”

김상택화백의 대답은 ‘단답형’이다. 군더더기나 수사가 전혀 없다. 특별한 무엇이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이리저리 찔러보지만 결국 원점이다. 단답형의 그의 대답은 그만큼 솔직했다.

김상택화백의 만평에서 김영삼대통령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의 권위는 찾아 볼 수 없다. 철저하게 ‘서민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진다. 정치인들의 암중다툼은 ‘동네아이들’의 유치한 싸움으로 전락한다.

“서민들의 평균적 감각에 맞추려고 합니다. 정치인들을 서민들의 평균적 일상으로 끌어내려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합니다”

엄숙하지 않으면서도 날카로운 풍자, 이것이 김상택만평의 독특한 매력이자 성공비결이다.
그는 밖에 나서기를 싫어한다. 끔직할 정도로. “어릴때부터 혼자 노는걸 좋아했습니다. 생리적으로 떠들썩한 모임은 안 맞는것 같습니다”

하루일과도 무미건조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단순하다. 두차례의 편집회의 참석과 신문 읽는게 전부다. 취미도 없다. 얼마전까지는 영화를 자주 봤는데 요즘은 시간이 없어 별로 못본다고 했다. 주량은 맥주 한잔, 담배도 끊었다가 최근 다시 피우기 시작했는데 하루 2-3개비가 고작이다.

쑥쓰러운지 한마디 던진다. “재미없죠. 내가 생각해도 참 재미없게 삽니다”
점심 저녁은 모두 구내식당에서 해결한다. 신문을 꼼꼼히 읽기 위해서다.

“밖에 나가서 먹으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식사시간이 1시간에서 1시간 반이 걸려요. 그러면 신문을 제대로 못 읽어요. 구내식당에서 먹으면 20분이면 충분해요”

한국 정치의 기상도를 한 눈에 읽는 날카로움, 질펀한 익살과 재치, 그의 만평에 대한 평가다. 뭔가 비결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역시 무안만 당했다. “신문을 열심히 봐요”가 대답의 전부였다.

김화백은 그림을 딱 하나만 그린다. 회사에서도 더 요구하지 않는다. 적어도 만평에 관한 한 김화백은 ‘전권’을 갖고 있다. “회사 간섭은 거의 없어요. 믿고 맡겨줍니다. 그런 점에선 행복하죠” 김화백은 독자들의 반응이 그런대로 괜찮은 것에는 이런 회사의 배려도 적지않은 몫을 했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항의를 가장 많이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글쎄 저는 몰라요. 정치부쪽으로 간혹 항의가 온다고 듣기는 했지만…. 있다고 해도 귀담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정치권이든 일반독자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만화 그리는데 별로 도움이 안되거든요”

경향신문은 김화백을 철저하게 보호한다. 어떤 압력이 있을 경우 편집국 전체가 나서서 막는다는 각오를 갖고 있다. 일간신문중 유일하게 만평을 1면에 고정적으로 넣을 만큼 김화백을 아낀다.

김화백에게 전달되지는 않지만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정치인들의 반응도 재미있다. 김대통령은 이마에 세로로 쳐진 주름에 대해 불편한 심정을 전달했다고 하고 민주당 이기택총재는 너무 치마를 자주 입힌다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김화백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학교 졸업하고 10개월 정도 고향(경북 봉화) 근처인 경북 예천에서 미술선생을 하다가 꿈을 실현하기 위해 상경, 충무로 영화판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3년동안 연출부 조수 노릇을 했는데 “죽어라고 고생만 했다”는 것이다. 먹는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고 잠자리도 없어 친구 집을 전전하기도 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친구소개로 83년 경향신문에 입사했다. 도안담당이었다. 이때 그의 계획은 1~2년간 몫돈을 모아 충무로로 다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첫해는 신세진 사람들한테 ‘은혜’를 갚느라 돈을 모으지 못했고 다음해는 결혼하느라 못모으고 그래서 이래저래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 영화판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다가 꽉 짜여진 생활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88년 경향신문에 노조가 만들어지면서 당시 이성수노조위원장등 선배들의 ‘강요’로 노보에 만평을 그리게 됐다. 그해말 노조가 또 회사에 본지 만평란을 맡길 것을 추천, 시사만화가로서는 ‘늦깍이’로 데뷔했다.

너무 정치적 소재에 편중된게 아니냐는 질문도 던져보았다. “공부가 안돼있어서 그래요. 다른 주제를 안그리는게 아니라 못그리는 거예요” 너무 순순하게 잘못을 시인한다. “정치는 일정한 흐름이 있어서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지만 다른 주제는 표현하기 어려워요. 한마디로 능력부족이죠”라며 그는 빙긋이 웃었다.

최근 미군을 점령군으로 표현한 것과 관련, 국가보안법으로 입건된데 대해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만화는 만화로서만 봐야한다”고 주문하면서 그러나 검찰이 소환을 요구하면 “언제든지 응해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그의 인상은 소탈하고 담백했다. 기름기가 전혀 없는 마른형의 선비풍 외모의 그는 인터뷰 내내 어색해했다. 사람좋은 웃음, 솔직한 말투, 그리고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 이것이 김상택만평의 ‘보이지 않는 힘’으로 느껴졌다.

헤어지면서 그는 간곡하게 한마디 했다.
“기사 쓰지 마세요”

정구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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