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가수들 목덜미에 심줄 돋는 일이 잦아졌다. 우리나라에서 최고 수준의 가창력을 지닌 중견 가수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나는 가수다>에 이어 아이돌 그룹 주력 보컬들이 참여하여 만들어진 <불후의 명곡2>가 연달아 등장하며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서바이벌을 표방한 최근의 프로그램에서 가수들은 생존을 위해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최선의 가창력들을 선보이고 있다. 립싱크로 인해 감춰져왔던 목덜미 불끈 심줄까지 덩달아 대방출이다.

레알 심줄 돋는 가수들

목덜미 심줄을 돋게 하는 열창을 선보이기에 가장 적절한 음악은 뭘까. 모르긴 해도 ‘록음악'은 틀림없이 그 후보로 꼽힐 것 같다. 나가수 초기, 록은 찬밥이라고 했던 윤도현, 자신이 제일 먼저 탈락할 것 같다던 그는 현재 수많은 위기를 넘기고 서바이벌을 이어가고 있다. 게다가 록음악은 록커 윤도현만 살려내는 데 그치지 않았다. 청중이 생사여탈권을 지닌 라이브 서바이벌 무대에서는 이소라도, 김범수도 록커로 재탄생해야 했다. 심지어는 걸그룹 출신의 옥주현도 무대 위에서 신성우의 록발라드인 <서시>를 노래해야 했다. 음반을 통해 서바이벌을 진행했다면 아마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KBS에서 편성한 <불후의 명곡2>에서도 현역 걸그룹 씨스타 멤버인 효린이 록커에 가까운 힘찬 창법으로 수많은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아무래도 라이브 무대는 열창을 원하고 록스타일 음악은 열창을 담아내기에 가장 무난하다는 것, 동시에 매우 익숙한 음악으로서 대중들의 적절한 호응을 얻어내기에도 수월한 스타일인 까닭이다. 이렇게 최근의 음악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라이브 무대에서 록음악이 갖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일정한 재발견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록음악은 그랬다. 1950~60년대를 거치면서 미주 대륙 최고의 라이브 흥행 산업이었던 뮤지컬을 한방에 제압하고 새롭게 맹주로 등극했던 것이 바로 록음악이었으니까.

   
MBC '우리들의 일밤-나는 가수다'의 임재범 (MBC제공)
@CBS노컷뉴스
 
록스타일 주목 받는 이유

록음악 이전의 주류 음악은 영미권이나 국내 모두 대체로 순화된 목소리, ‘교양’ 있는 듯 따뜻한 목소리, 결국 ‘국민가요’ 풍의 목소리를 요구했다. 성적인 매력을 불러일으키거나 한을 토해내는 소리, 절제되지 않은, 거칠게 포효하는 소리 등은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직설적이고 에너지 만발하며 날것 그대로의 힘찬 소리가 록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면서 순식간에 음악계의 주류가 되었고 특히나 극장, 라이브 무대는 금새 이들의 차지가 되었다. 라이브 무대에서 청중 평가를 받는 것을 골자로 한 서바이벌 음악 경연대회에서 '성대겨루기'에 남다른 저력을 보유한 록스타일의 가창이 주목받고 우위를 점하는 것은 다 내력이 있는 것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조선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서구 과학기술이 삶의 양식으로 자리 잡기 전 조선 민중들이 만날 수 있었던 가장 큰 화이트 노이즈, 매섭게 떨어지는 폭포수 앞에서 물줄기 음벼락에 정면으로 맞서 피를 쏟고 또 쏟았다던 소리꾼들. 언제나 청중 평가를 통해 생사여탈이 결정되던 그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가수로서의 덕목은 바로 '남다른 성대의 힘'이었다. 그것을 얻는 순간 “득음(得音)”했다고 말해질 수 있었다.

천구성과 수리성을 조화롭게 운용할 수 있는 목청, 맑고 쨍쨍한 소리와 거친 드라이브를 함께 발진할 수 있는 성대. 특정한 소리가 가장 좋다고 미학적으로 우열을 가리는 것은 어렵겠지만 분명한 것은 당대 소리꾼들에게는 이처럼 하드록커를 닮은 혹은 그를 훨씬 넘어서는 초강력 성대가 필요했다는 사실이다. 폭포수를 뚫는 성대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20세기 벽두에 들이닥친 신문물의 시대를 그렇게 멋지게 통과할 수 없었을 것이 자명하다.

   
MBC '우리들의 일밤-나는 가수다'의 윤도현 (MBC제공)
@CBS노컷뉴스
 
창작자에 치우친 비평적 관심

그런데, 우리 현대 사회에서 목소리의 장인(匠人)들이 대접받던 기억이 있었나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동서양 전통음악 영역에서는 그런 게 좀 있는 듯도 하다. 기존의 ‘고전(古典)’을 반복해서 연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행동 양식이어서 그럴 것이다. 텍스트가 동일하니까 다양한 감성과 해석을 통한 변주 능력에 취향과 비평이 집중될 수가 있다. 반면 대중음악에 대한 정제된 취향과 비평은 여전히 텍스트에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구술사회, 문자사회 뭐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떠나서 그냥 길지 않은 역사 속에 ‘고전’으로 자리 잡은 노래, 누구라도 섬기며 리메이크하는 노래가 아직도 너무 부족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비평계의 관심과 욕망은 여전히 창작자에 집중되어 있다. 결국 창작을 하는 음치 가수들은 알파벳 간지의 ‘아티스트’가 될 수 있지만 창작을 안 하는 노래의 장인들은 아직도 한글 간지의 ‘딴따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예술 세계에는 자고로 작가의 세계와 장인의 세계가 공존해 왔다. 가령 김덕수, 조수미, 안숙선 등의 인물은 연주행위만으로도 동서양 전통음악의 장인으로 두루 인정받고 있다. 반면에 가요계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장인을 당연하다는 듯 언급하기가 조금 어렵다. 뭐 여러 맥락과 정황, 사연들이 있겠지만 이제는 이런 현실도 본격적으로 변해 나가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작가와 장인, 예술의 양 날개

최근의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이 보여준 성대의 힘, 열창의 미학은 변화를 향한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기대가 다소 긍정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들이 자리했던 무대를 통해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했던 ‘세션’과 ‘편곡자’들의 존재까지도 새롭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가요계에서도 장인들의 무대가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고 인정받게 될 조짐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대를 위한 잔치는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되어야 한다. 세상에는 장인들이 일구는 매혹의 세계가 있다. 우리는 지금에야 그것을 처음으로 마주보았고 몰라봤던 작은 거인들을 새삼 응원하기 시작했다. 변화를 향한 몸짓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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