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뜯는 여성을 총칼로 찌른 후 불속에 집어넣어 태워죽였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전사한 항일부대원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냈다”
“포로로 잡힌 항일부대원의 머리를 일본도로 자르고 잘린 머리를 들고…”
“여성 항일부대원을 생포, 강간하려다 실패하자 모두 살해했다”

이 같은 끔찍한 사례는 연변 작가 류연산씨가 지난 2004년 쓴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다-재만조선인의 친일행적 보고서'의 일부에 나오는 대목이다. 바로 조선인 간도특설대의 행적이었다.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던 1930년대 말부터 일제의 패망일까지 만주국에서 항일부대(주로 조선독립군)를 추적, 체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본 정규 특수부대인 간도특설대엔 해방 후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을 지낸 백선엽씨가 젊은 시절 활동(1943~1945)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백선엽씨에 대해 KBS가 전쟁영웅으로 둔갑시켜 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송할 예정이다. KBS는 6·25전쟁 60주년 기념 특별기획 2부작 ‘전쟁과 군인’을 오는 24일 밤 10시부터 이틀간 방송한다. (1편 <기억의 파편을 찾아서>가 24일(금) 밤 10시, 2편 <싸움의 능선을 넘어>가 25일(토) 밤 10시 30분)

KBS는 한국전쟁 당시 백씨가 1사단장으로서 각종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쟁담과 당시 전쟁의 참상을 조명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KBS는 이 프로그램의 중심에 놓인 백씨가 ‘한국전쟁의 영웅’이기 이전에 일제시기 조선 독립군을 쫓으며, 잔혹무도하게 살육, 사체유기하거나 강간해 간도지역 조선인들의 치를 떨게한 ‘간도특설대’ 부대원이었다는 점은 방송에 담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KBS가 역사적 인물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그의 족적을 냉정히 평가하고 방송을 할 만한 인물인지 검증부터 해야 한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백씨의 주된 행적은 일제시기 봉천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 부대원이라는 전형적인 친일군인이었다는 점을 먼저 시청자들에게 알리는 것이 공영방송의 역할이다. 그 마저도 알릴 필요가 없다면 아예 친일파인 백씨의 전쟁 무용담을 다시 끄집어낼 이유는 없다. 한국 전정 때 백씨의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KBS를 비롯한 방송사들의 백씨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지 않았던 배경 가운데 하나다.

백씨의 공적을 조명하자면 불가피하게 독립군을 때려잡던 간도특설대 부대원으로서 그의 일제 때 행적을 조명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해방 후 한국군 고위 간부의 상당수가 일본군 출신이었다는 한국 근현대사의 '민감한 아킬레스건'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일본군 출신을 비롯해 상당수 친일인사들이 해방 후 단죄당하기는커녕 오히려 승승장구했던 왜곡된 현대사의 문제를 정면으로 조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안이었던 만큼 다루기 쉽지 않은 주제였던 셈이다.

그러나 KBS는 이번에 백씨의 친일행적은 쏙 빼놓은 채 6·25 전쟁 때 그의 공적을 기리는 특집 프로그램을 용감(?)하게 기획 편성해 논란을 자초했다. 

   
백선엽씨의 현역 장성시절 모습.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이 때문에 KBS가 백씨의 전쟁 영웅담에만 주목한채 애써 드러내고자 하지 않고 있는 백씨의 ‘간도특설대’ 역할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간도특설대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는 이 부대의 절반 이상이 조선인으로 구성됐고, 주로 조선 독립군을 추적 체포 살해하는 활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역사연구가 고 임종국 선생은 1991년 출간된 <실록 친일파>(돌베개)에서 “1938년 12월 1일에 백두산 명월구에서 창설된 간도특설대는 중대장의 반수와 소대장·하사관·사병은 조선인인데, 창설 당시 360명이 종전 무렵에 800여 명으로 팽창해 있었다”며 “보병·기갑 혼성 전투부대인 간도특설대는 만군 산하의 특수부대라고 볼 수 있는데, 독립군과 공산 게릴라의 토벌을 위해 편성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 선생은 “이들은 반만(주국)항일 세력과의 전투에 동원됐다”며 “도현성(安圖縣城) 북방 36km 대사하(大砂河)에서 김광, 박득범, 위극민, 최현의 합류부대와 싸웠을 때는 간도특설대의 현학춘 상병이 응원대 도착까지 4시간을 버틴 끝에 (일본으로부터) 무공장을 수령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 책에는 간도특설대에 백선엽이 소속돼있었다는 내용도 있다. 

지난 2004년 발표된 친일인명사전을 보면 "모두 7기까지 모집한 간도특설대는 총인원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작전을 벌였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고문을 당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보관하고 있는 간도 조선족 증언록(‘간도성특설부대조직연혁급활동정황’-1960년 3월-중국연변조선족자치주혁명위원회)에 따르면 간도특설대의 주요임무는 장백산맥지구의 동북항일연군을 토벌하고 조선인, 중국인들의 항일투쟁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박 실장은 지난 20일 국회 토론회에서 발제문을 통해 이 자료의 주된 내용을 소개했다.

이 자료엔 간도특설대가 1938년 9월부터 1943년 09월까지는 주로 연변지역에서 활동을 벌였고, 각 농촌에 침투, 항일연군의 행적과 민심을 정탐하고, 이를 토대로 일본수비대와 함께 항일연군의 숙영지를 습격해 항일세력과 관련한 민간인을 학살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또한 간도특설대가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1944년 2월부터 7월까지는 주로 열하성(熱河省) 유수림자 지구에서 주변 약 60리 이내의 각 촌락에 대해 잔혹하게 소탕활동을 전개했다. 공식적인 토벌활동만 28회에 달했고, 22명이 살해되고 14명이 체포됐다. 그해 7월부터 1945년 1월까지는 하북성(河北省) 내의 밀운현(密云顯) 석갑진(石匣鎭)과 평곡현(平谷顯) 일대에서 수집된 정보를 근거로 팔로군 유격구를 비롯한 항일세력을 파괴하는데 중점을 뒀다. 토벌작전은 총 34건이며 39명이 살해되고 62명이 체포됐다.

이후부터 일제의 패망이 이뤄질 때까지 팔로군의 북상에 맞서 만주국의 관동군과 북지나방면군은 정예병력을 배치하기로 해 이른바 ‘철석부대’를 편성했는데, 간도특설대도 여기에 포함됐다. 이들은 1945년 1월 열하성에서 만리장성을 넘어 하북성 기동지구로 내려가 사집진(지금의 사각장) 지역에서 활동했다. 간도특설대는 철석부대의 독립보병대대로서 일명 ‘철인부대’라는 별칭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이 시기 간도특설대는 36차례의 토벌작전을 벌여 103명을 살해하고 62명을 체포했다.

   
백선엽(왼쪽)씨와 이명박 대통령. ⓒ전국언론동조합 KBS본부
 
간도특설대는 특히 독립군 토벌에 있어서 잔혹한 것으로 유명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20일 토론회에서 당시 간도특설대의 잔혹상이 담긴 자료 일부를 공개했다. 연변역사연구소가 작성한 ‘위(僞)특설부대 조직활동’(1960년 3월)이라는 자료를 보면 1935년 5월 간도특설대는 길림성 안도현에서 항일부대를 수사하던 중 야채를 채집하던 여성을 총칼로 찌르고 불속에 집어넣어 태워죽인 것으로 돼 있다. 그해 7월엔 천보산금광이 항일연군에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추격하던 중, 항일연군 전사자 시체를 발견하자 그 간을 오려냈다고 돼있다.

그 밖에도 끔직한 살해 장면들이 많다. 1944년 5월 유수림자 지역에서 40여세 되는 사람을 잡아서 사격장에 끌고 가 이들을 표적삼아 사격연습을 했고, 야간엔 부녀자만 보면 강간했다는 기록도 있다. 1944년 음력 8월 1일에는 하북성 석갑진에서 동쪽으로 60리 정도 떨어진 마을로 팔로군 토벌에 나서 도망치는 민간인을 사살했으며, 다리에 총을 맞은 한 임신부를 쫓아 배를 찔러 태아까지 흘러나오게 했다는 증언도 수록돼 있다. 

백선엽씨 자신도 조선 독립군을 토벌한 사실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지난 2009년 출간한 회고록 <군과 나>(시대정신)와 1993년 일본에서 출간한 <대게릴라전-아메리칸은 왜 졌는가!>(원서방·原書房)에서 이렇게 해명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 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는 1988년 9월 1일 경향신문에 기고한 ‘군과 나’ 시리즈 기고 11번째 <5년 만의 평양-잔적 소탕 끝나자 교회종소리가…>에서 “봉천만주군관학교를 마치고 42년 봄 임관해 자므스(佳木斯) 부대에서 1년간 복무한 후 간도특설부대의 한인부대에 전출, 3년을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고 밝혔다. 그는 “그동안 만리장성 부근 열하성(熱河省)과 북경 부근에서 팔로군과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며 “간도특설부대에서는 김백일(중장·51년 전사), 김석범(중장예편·해병대사령관), 신현준(중장예편·초대해병대사령관), 이용(소장예편). 윤춘근(소장예편) 등과 함께 근무했다”고 회고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간도특설대는 만주국에서 천황에 충성스런 군대이자 비정규전을 벌인 특수부대”라며 “독립군과 민간인을 학살하고, 약탈에 강간까지 온갖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해서 간도 조선족에게는 '쥐잡이부대'로까지 알려져있는 간도특설대에서 백선엽이 활동했는데도, KBS가 이를 빼놓은 채 한국전쟁 영웅으로 미화한다는 건 역사에 범죄를 짓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더구나 이런 와중에 KBS가 수신료 인상까지 요구한다는 것이 정말 염치라곤 찾아볼 수 없는 행태"라고 비난하고 "KBS가 과연 어떻게 역사에 책임을 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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