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 김여진씨와 ‘희망의 버스’ 덕분에 한진중공업과 85호 고공 크레인에서 163일째 농성을 벌이고 있는 김진숙씨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정작 이들이 왜 이런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김진혁 EBS PD는 최근 미디어스에 한 기고에서 김여진씨가 아니라 한진중공업과 김진숙씨에게 관심을 갖자고 제안한 바 있다. 김 PD는 “여전히 (언론 보도의) 포커스는 김여진에게 있고, 그가 어떠한 법적 처리를 받게 될 것인지 등에 맞춰져 있다”고 지적했다.

김 PD는 “김진숙씨가 이토록 오랫동안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진보 언론의 1면에 (김여진이 아닌) 김진숙의 이야기가 올라가는 것을 본 기억이 나는 없다”고 덧붙였다. 이들이 목놓아 외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진중공업 사태 일지.
 

한진중공업은 지난 2월 희망퇴직을 통보한 생산직 직원 400명 가운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172명을 정리해고했다. 노동조합은 파업에 돌입했고 사쪽은 직장폐쇄로 맞섰다. 상당수가 희망퇴직으로 공장을 떠난 가운데 지방노동위원회는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기각했다.

사쪽이 주장하는 정리해고의 명분은 지난 2년 동안 수주가 끊기는 등 경영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한진중공업은 지난해 517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처럼 대규모 희망퇴직과 정리해고를 강행할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었는지는 여러 가지로 의문이다.

첫째, 한진중공업의 적자는 과도한 차입금에 따른 이자 비용과 필리핀 수빅 조선소 관련 지분법 평가 손실, 그리고 건설 사업부문 대손 충당금 등이 원인이다. 한진중공업 조선 사업부문의 지난해 영업이익률은 13.7%로 경쟁회사들보다 훨씬 높다.

둘째, 한진중공업은 수빅 조선소에 13억 달러를 투자해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수빅 조선소는 올해 1분기부터 본격적으로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부산의 영도 조선소가 2년째 수주 물량이 없는 것과 달리 수빅 조선소는 이미 3년 이상 물량을 확보한 상태다.

이 때문에 한진중공업이 영도 조선소를 단계적으로 축소 또는 폐쇄하고 수빅 조선소로 생산 거점을 옮기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필리핀은 노동 생산성이 국내의 35% 수준이지만 인건비가 10분의 1 정도로 낮아 인건비 부담을 크게 낮출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한진중공업의 매출 비중과 추이. 필리핀 수빅조선소의 사업 비중이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2년 동안 수주가 없었다는 주장과 달리 오히려 수주 여력이 많아 긍정적이라는 증권사 분석도 많다. 노조에서는 영도조선소의 수주 물량을 필리핀으로 빼돌리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LIG투자증권.
 

셋째, 한진중공업은 엄청난 부동산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인천 북항 건설 예정지인 율도 인근의 부동산 가치는 용도 변경 이후 2조원에 육박할 전망이다. 서울 동서울터미널 부지와 부산 암남동 일대 부동산도 지난해 말 장부가 기준으로 2750억원 규모에 이른다.

넷째, 부동산 매각 차익도 상당할 전망이다. 울산 조선소 매각 대금 1251억원이 지난 4월 부분 반영됐고 매각 예정인 서울 상계동 부지도 400억원 규모로 추산된다. 한화증권은 한진중공업의 부동산 매각 차익이 올해 최대 1천억원에 이를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한진중공업 부동산 보유 현황. ⓒ동부증권.
 

다시 정리하면, 한진중공업은 대규모 정리해고를 해야 할 만큼 경영상황이 어렵지 않다. 지난해 적자가 난 건 사실이지만 필리핀 수빅 조선소 건립 비용과 건설 사업부문 대손충당금이 반영된 때문이다. 이는 노동자들의 책임이 아니라 경영 실패의 결과다.

영도 조선소가 2년 이상 수주를 못했다는 주장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2년 전에 수주한 물량으로 올해 상반기까지 조선소를 가동하고 하반기부터 추가 수주를 받으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수빅 조선소의 수주 물량을 넘겨받게 될 가능성도 크다.

   
한진중공업 필리핀 수빅조선소의 영업이익 추이와 전망. ⓒ동부증권. 지난해까지는 적자였지만 올해부터 흑자로 돌아설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곧 한진중공업 전체로 보면 당장 정리해고를 단행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된다. 국내보다는 인건비가 낮은 해외에 설비투자를 집중하겠다는 전략으로 영도조선소에 설비투자를 중단한 것이 최근 구조조정의 발단이라고 할 수 있다.
 

 

진보신당 부산시당은 최근 논평에서 "영도 조선소의 수익성이 낮아서 해고를 할 수밖에 없다는 회사의 주장은 터무니 없는 거짓이며, 2년 동안 수주 물량이 없어서 정리해고를 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 역시 본질을 왜곡하고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무엇보다도 올해부터 흑자 전환에 성공할 것이고 부동산 매각 차익도 상당한 수준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증권사들은 매수 추천 보고서를 쏟아내고 있다. 한진중공업의 구조조정은 불가피한 것이라기 보다는 이익을 늘리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한진중공업의 구조조정은 국내 공장을 철수하고 생산거점을 해외로 옮겨가는 철저하게 계획된 시나리오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한진중공업 뿐만 아니라 상당수 기업들이 국내에 신규 설비투자를 하기보다는 인건비가 낮은 해외로 빠져나가는 추세다.

김홍균 동부증권 연구원에 따르면 필리핀 수빅 조선소의 인건비는 월 9천~1만 페소, 약 23만~26만원 수준이다. 국내의 10분의 1 수준, 중국의 절반 수준이다. 낮은 노동생산성을 감안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인건비 부담이 크게 줄어드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박승현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내 조선업, 특히 일반상선 부문은 중국 업체들과 경쟁할 수밖에 없는데 대안은 첫째, 중국 업체가 단기간에 따라올 수 없는 고부가가치 선종에 집중하거나 둘째, 해외 조선소 확장을 통해 원가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연구원은 "한진중공업은 후자를 택했고 상당히 성공적이라고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박 연구원은 "수빅조선소는 향후 3년간 가파른 실적 성장이 예상된다"면서 "영도조선소의 매출 공백을 수빅조선소가 충분히 커버하는 구조로 갈 전망"이라고 덧붙였다.

문제는 이런 상황을 방치하면 국내 기업들의 해외 탈출 러시가 더욱 늘어날 거라는 사실이다. 자본이 더 많은 이익을 찾아 국경을 넘나드는 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멀쩡한 기업을 부실기업으로 만들고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이 돼서는 안 된다.

하종강 전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은 "과거에는 흑자 기업의 도산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지만 최근에는 해외 이전을 노린 정리해고가 늘어나고 있다"면서 "단순히 경영개선을 이유로 정리해고를 남발하지 못하도록 구조조정 요건을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진숙씨가 올라가 있는 영도 조선소 85호 크레인은 8년 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었던 김주익씨가 정리해고에 반대해 129일의 농성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바로 그 크레인이다. 하 전 소장은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고 있어야 그들을 살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김진숙씨는 지난 1월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끊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의 자리가 되도록 아직도 85호 크레인 주위를 맴돌고 있을 김주익씨의 영혼을 안고 반드시 살아서 내려가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올라갔다. 벌써 170일이 다 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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