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단짝친구가 드라마 촬영 중인 아무개 PD를 만나보라고 했다. 주인공 친구로 나올 사람이 필요하다는데 자신은 교수님 추천을 받고도 사정상 나갈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대신 나가보라는 권유였다. 한 카페에서 PD를 만났다. 승무원 역할이라고 했다. 드라마가 잘 되면 항공사 메인 모델도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했다. 그러면 몇 천 만원 수입도 올릴 수 있다고….

대화를 잇다 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짜 잘 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 이상 보여줄 수 있다고 했는데 나보고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하더라. 이미 밤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고민이 들었다. 그때 PD가 말했다. '넌 매니저도 없고,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집이 잘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꺼낸 게 잠자리 요구였다."

배우 허린 씨는 "2년 전 경험"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비슷한 일을 몇 번 더 겪었다"고도 했다. 1일 오후 '여성연예인 인권 개선 방안 모색' 토론회에서 허씨는 여성연예인이 처한 열악한 현실을 증언했다. 그는 "돈 때문에 끌려가진 말자, 연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자, 그렇게 강한 맘을 먹고 시작했는데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종종 보게 됐다"며 "여자니까 정말 이럴 수밖에 없는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는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이하 여성민우회)가 '여성연예인인권지원센터' 개설 1주년을 기념해 열었다. '장자연 사건'을 계기로 센터를 마련한 여성민우회는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지금껏 처벌받지 않은 현실을 지적하며 여성연예인 인권 가이드라인을 이날 함께 발표했다.

가이드라인은 △술접대·성접대 △노출과 성형수술 강요 △무리한 스케줄 등을 여성연예인 인권 침해 상황으로 규정하면서, 문제가 발생할시 즉각 협박죄로 신고하거나 센터를 통해 상담과 도움을 받으라고 적시했다.

윤정주 미디어운동본부 소장은 "'이건 안 된다'는 것, 그 기준을 세우려고 한다"며 "가이드라인을 연기자 지망생이 많은 예술고나 방송사에 배포해서 오며가며 여러사람이 볼 수 있게 하려 한다"고 말했다. '장자연 사건'은 미완으로 귀결됐지만, 사회의 감시 눈은 살려가겠다는 게 여성계 취지다.

 

   
▲ 여성·시민사회단체는 지난 3월 경찰이 가해자 처벌 없이 고 장자연 씨 관련 수사를 종결지은 데 대해 특검을 도입하고 사건의 진상을 투명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지난 2009년 조사에 따르면 여성연기자 절반이 방송관계자나 사회유력인사에게서 술시중(45.3%)과 성접대(60.2%) 요구를 받은 적 있다. 언어적 성희롱(성적 농담 64.5%, 몸에 대한 평가 67.3%), 시각적 성희롱(58.3%)에 노출된 경우도 상당수며 심지어 성추행(31.5%), 성폭행(6.5%) 피해를 당했다고 답한 비율도 적잖게 나오는 등 여성연예인은 성적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수연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1일 토론회에서 "성접대 관행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사회 경향이 연예계라는 특수상황으로 통해 극단적으로 표현된 것"이라며 공급이 수요 보다 많은 연예산업 특성과 투명하지 않은 캐스팅 과정이 문제를 고착시켰다고 지적했다. 이어 더해 여성연예인이라는 신분 특성상 드러내놓고 문제를 꺼내기 힘든 점을 감안하면 신체적,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비율은 보다 많을 것이라는 게 여성계 설명이다.

김금옥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는 "여성연예인이란 위치가 사회적 소통을 차단 당하는 구실이 된다"며 "성매매 구조와도 비슷하다"고 말했다. '네가 도망가면 그 빚을 가족에게 묻겠다'는 협박 때문에 성매매여성이 결국 벗어날 수 없는 연쇄구조에 갇히듯, 여성연예인도 '스타가 되려면 참아야 한다'는 강요 때문에 비자발적으로 일하는 통제 시스템 아래 눌린다는 설명이다.

이런 상황과 관련, 현행법상 처벌은 가능하다는 게 법조계 설명이다. 김재련 변호사는 성적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드라마 출연 기회를 박탈할 것처럼 협박당한 경우를 예로 들면서 형법의 '피감독 분야에 대한 간음죄', 성폭력특별법의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으로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개인의사에 반해서 카메라 등에 의한 촬영 혹은 그것을 전송한 것에 대해 처벌하는 규정도 있다"고 덧붙였다.

김 변호사는 "실제 사건을 접하게 되면 기획사 사장은 보통 성적 착취가 아니라 성적 파트너라고 얘기하고 피해여성에게 대가도 지불했다고 주장한다"며 "대가에 의한 것, 대가 관계로 포섭한 것이라면 성매매특별법으로 처벌받아도 구속사유까지 이어지진 않는 데다 '쌍벌주의'로 여성연예인도 같이 처벌받기 때문에 이같이 말한다"고 지적했했다. 그러나 걱정할 게 없다는 게 김 변호사 설명이다.

"기획사나 스폰서의 관리·감독을 받는 입장이라면 문제가 생길 때 '피감독 분야에 대한 간음죄'가 적용된다. 강간은 폭행이 수반돼야 하지만 간음은 성관계라는 중립적 용어로 설명되기 때문에 꼭 폭행이 수반되지 않아도 처벌 가능하다. 또 성매매 알선 등에 의한 법률을 보면 쌍방주의라고 해서 양쪽 다 처벌하긴 하는데, 강요에 의해 성매매 업종에 종사하도록 된 경우라면 '성매매 된 자'라 해서 처벌대상이 아니라 보호대상이 된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던 것, 비자발적으로 했다는 것, 그것을 입증하면 된다."

김 변호사는 "일관된 진술,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황적 증거가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피해자가 적극성을 보여야 하는 만큼 여성연예인의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효가 없다.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그래서 나온다.

허린씨는 "관계자들 만날 때 술이라도 따라야 하나? 얼굴을 많이 고쳐야 하나? 스스로 그런 고민을 할 때도 있었다"면서 "장자연씨는 마음이 순수했기 때문에 죽음을 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허씨는 "여성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고 싶지만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고 이럴 때 누군가 '그건 잘못된 것이다'라고 조언이라도 해줬으면 하지만 마땅히 도움을 구할 방도가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재련 변호사는 "사실 강요된 적응"이라면서 "어쩔 수 없다, 여기서 성공해야만 하니까, 그러니 적응하자, 그러다 보면 자기가 즐긴다는 심리적 가정까지 하게 되고 그러면 무력감과 자책감이 온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이어 "솔직히 일반인이 여성연예인 피해자에 대해 이중적 잣대를 갖고 있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피해를 당해도 실질적으로 얘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며 "어렵긴 하지만 여성연예인이 노조 등을 통해 전체 힘을 키워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적 편견을 시정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김금옥 대표는 "여성에게 술을 따르게 하는 등 성적인 것을 강요하는 게 범죄라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며 "이것이 뒤따르지 않다 보니 법이 있어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연 연구원은 "여성연예인의 성적 인권은 특정인들, 일부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이 문제는 사실 여성 전체의 문제일 수 있다"고 말했다.

단계별 개선작업을 위해 법적 보완은 필요하다는 게 중론이다.  서병기 헤럴드경제 기자(대중문화담당)는 "노동부 유권해석으로 연예인은 노동자가 아니고 노동자 신분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여성연예인은 더 고달프다"며 연예인을 노동자로 규정해 근로기준법을 적용 받게 함으로써 여성연예인의 처우를 개선하는 작업이 병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재련 변호사는 가해자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해 강요나 협박으로 배우로서 장래가 차단 당한 데 대해 금전적 보상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고, 양벌규정을 둬 가해자뿐 아니라 기획사 책임자에게도 잘못을 물어 업종에 종사하는 전체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밖에 매니지먼트사를 공인화 하거나 음반 제작과 드라마 출연 과정에 공개오디션을 정착시켜 연예산업 분야를 투명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무엇보다 업계 관행을 일소하는 것만큼이나 언론·누리꾼 등 제3자의 성숙한 시선이 제고돼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다.

윤정주 소장은 "여성연예인에 대해서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이 많다"며 "팬덤 문화가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수연 연구원도 "결국 대중의 욕망이 연예인을 움직이게 한다"며 "때로는 여성연예인을 괴롭히고 성적 대상화하기도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라는 점을 인식해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 기자는 "댓글을 보면 그 자체로 인권 침해 요소가 있는 경우가 있고, 정말 입에 담기 힘든 욕도 많다"며 "MBC 드라마 <최고의 사랑>에 보면 잘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서 기자는 "조카가 여주인공을 보고 '사람들이 왜 고모를 걸레라고 그래?'라고 묻는데 이미 그 단어에서 여성연예인을 향한 대중의 시선을 알 수 있다"며 "언론인인 저를 포함해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우리 사회 시선을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