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주인공을 보자. 월화, <내게 거짓말을 해봐> 베이비복스 출신 윤은혜, <미스 리플리> 전 동방신기, 현 JYJ 멤버 박유천. 수목, <로맨스 타운> 핑클 출신 성유리, <시티헌터> 카라 멤버 구하라, <최고의 사랑> 베이비복스 출신 이희진. 주말, <내 마음이 들리니> 슈가 출신 황정음, 주간 시트콤 <몽땅 내사랑> 브라운 아이드 걸스 멤버 가인, 2AM 멤버 조권.

 예능 프로그램 고정 출연진도 보자. 월요일, <밤이면 밤마다> 빅뱅 멤버 대성, 애프터스쿨 멤버 유이, 씨엔블루 멤버 정용화. 화요일, <승승장구> 비스트 멤버 이기광, <강심장> 슈퍼주니어 멤버 이특, 신동, 은혁과 전 HOT 멤버 문희준, 수요일, <황금어장> 슈퍼주니어 멤버 김희철, 토요일, <놀라운 도전 스타킹> 슈퍼주니어 멤버 이특, 전 HOT 멤버 문희준, <세바퀴> 2AM 멤버 조권, 일요일, <1박 2일> 전 젝스키스 멤버 은지원, 전 코요테 멤버 김종민. <일요일이 좋다> 동방신기 멤버 유노윤호, Fx 멤버 크리스탈, 아이유.

   
지난 설 MBC가 특집으로 방영했던 아이돌육상선수권 대회의 한 장면.
 
모든 프로그램을 샅샅이 훑은 것도 아니고 지상파 3사가 시청률 경쟁작으로 내세우는 드라마 주연이나 대표적인 연예 오락 프로그램 고정 출연자 가운데 아이돌 출신이거나 현재 아이돌로 활동 중인 스타만 얼추 추려 본 이름들이다.

아이돌로 뒤덮인 TV… 기획사와 방송사가 만든 '돈벌이 종합연예세트'

아이돌 뮤지션 위주로 꾸려지는 가요 순위 프로그램인 <뮤직뱅크>와 <음악중심>은 빼고도 요즘 최고의 화제작인 수목 드라마 <최고의 사랑>에서 시청자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있는 극중 아이돌 그룹 국보소녀 출신 구애정을 깍두기로 끼워 넣고, 아이돌 댄스 그룹 핑클 출신 가수 옥주현의 출연에 대한 논란으로 시끄러운 일요일 저녁의 서바이벌 음악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까지 마무리로 정리하면 한 주일 내내 TV는 아이돌을 위한, 아이돌에 의한, 아이돌의 매체다.

 연예계를 아이돌 천하로 만든 것은 뮤지션보다는 종합연예상품을 만들어서 대박 이익을 보려는 매니지먼트사의 기획과 아이돌을 출연시켜 높인 시청률로 최대한 많은 광고를 따내려는 방송사의 셈속, 그런 기획이나 셈속에 장단 맞춰 열광하는 우리 사회다. 열렬한 아이돌 팬은 비단 청소년들만이 아니다. 입시 교육에 치이는 청소년보다 오히려 삼촌팬이니 이모팬이니 하면서 어른들의 ‘팬질’이 더 요란하다. 그러면서도 조금만 수틀리면 아이돌 출신 연예인에 대해서는 정치인이나 공직자, 학자, 언론인에게보다 더 가혹하게 비난이 쏟아진다

두 편의 애니메이션 통해 본 ‘아이돌의 삶과 정체성’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곤 사토시는 아이돌 출신 연예인을 두고 벌어지는 미스테리 스릴러 <퍼펙트 블루>와 젊은 시절 은막을 주름잡다가 스스로 모습을 감추고 늙어 가는 여배우의 일대기를 짚어 가는 <천년여우>에서 대중의 주목을 받는 여성과 그 여성에 집착하는 열성 팬, 그리고 미디어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이 관계 속에서 던져지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또는 ‘나를 아는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이런 정체성의 문제가 영화 속 영화, 이야기 속 이야기, 사람 속의 사람으로 켜켜이 쌓여 있다.

   
영화 '퍼펙트 블루'
 
   
영화 '퍼펙트 블루'
 
<퍼펙트 블루>의 주인공 미마는 아이돌 그룹 멤버에서 배우로 모습을 바꾸려한다. 자신이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 에이전시의 기획 때문이다. 아이돌의 원뜻은 우상, 곧 금속이나 돌, 나무 따위 자연물로 초자연적인 존재의 형태로 만들어진 섬김의 대상이다. 아이돌의 어원인 그리스어 ‘에이들론’은 인간과 실재하는 대상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해 있는 영상을 뜻하며, 그래서 베이컨에 따르면 진리를 인식하는 데 방해되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할 것이 바로 이 우상이다. 미마가 이 우상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옮아가려고 하는 순간 방해와 협박, 살인이 벌어진다. 그 과정에서 ‘미마’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스릴러의 플롯과 시점을 따라 파국으로 치닫는다.

 <천년여우>는 다큐멘터리 형식에 실린 팬터지 속에서 한 여배우의 끝나지 않는 삶을 펼쳐보인다. 열쇠 하나와 그림 한 점만을 남기고 사라진 첫사랑을 찾아 배우의 길을 걷게 된 십대 소녀 지요코의 긴긴 여정으로 이끌려 들어가다 보면 한창 전쟁 중이던 일본에서 만주로, 저주 속에 불타 무너지는 천 년 전의 고성에서 숨 가쁘게 내달리는 현재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최고 스타의 화려한 삶에서 잊힌 여배우의 적막한 노년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게 된다. 종횡무진 누비는 카메라는 스타와 팬, 영화와 현실, 꿈과 좌절까지 모두 아울러 하나의 진실을 향해 쏘아 올려진 우주선을 비춘다.

   
영화 '천년여우'
 
   
영화 '천년여우'
 
아이돌의 삶 뒤로 하고 가수 되려는 연예인에 쏟아진 무거운 질시

 지금 아이돌 출신 뮤지컬 배우 옥주현의 <나는 가수다> 출연에 대한 논란은 어떤 정치적 쟁점이나 경제적 위기, 국제적 사건 사고를 뒤엎을 정도로 뉴스와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달구고 있다. 연예인에게 아이돌로서의 시기는 기껏해야 젊어 한 때다. 그 시기에 비춰진 이미지, 누렸던 인기, 거쳐 온 행보가 이후의 삶 전체를 가늠할 정도로 무거워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요구다. 사람은 누구나 평생에 걸쳐서 변화하고, 성장하고, 새로운 시도를 할 권리가 있다. 젊은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그런데 아이돌이 더 이상 아이돌이기를 그치고 다른 모습으로 나서는 순간, 그 연예인이 아이돌이었기에 받았던 사랑이 오히려 족쇄가 되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여러 해 동안 무대에 올라 라이브로 몇 편의 뮤지컬에서 가창력을 갈고 닦아도 아이돌 출신은 좀처럼 ‘가수’로 불릴 수 없다면, 당장 대중의 사랑을 받는 수많은 아이돌들 앞에는 언제고 <퍼펙트 블루>의 미마처럼 세상에 대해 억눌린 반감과 두려움으로 자아가 분열되고, 현실과 꿈의 경계를 잃게 될 미래만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천년여우>의 지요코처럼 세월과 더불어 성장하고, 세상을 이해하고, 삶 전체를 아우르는 자아를 단단히 지키기 위해서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숨어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나는 가수다’ 불만 출연자 옥주현에게 집중되는 이상한 구조

 <나는 가수다>가 진행이나 원칙에서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방송사와 제작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그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을 새로운 도전의 기회로 받아들인 연예인의 책임인 것은 아니다. 아이돌 문화가 마뜩치 않다면, 그것은 대중문화를 온통 아이돌 천지로 만든 우리 사회의 기형적 문화산업 구조 때문이지 그 안에서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된 연예인 개인의 책임인 것만도 아니다.

   
'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가수 옥주현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이 나아갈 바에 대해 대중들이 기대와 우려를 보내는 것은 대중문화가 공급자 위주의 일방적 방식에서 문화수용자의 요구에 귀 기울이는 쌍방향적 소통구조로 바뀔 수 있는 모처럼의 좋은 본보기가 됨 직하되, 연예인 개개인에 대한 호감도 여부에 따른 비난으로 시청자 권력을 행사하는 대중 폭력의 장이 되는 것은 ‘무한 서바이벌’이라는 프로그램 형식의 가혹함보다 더 잔혹하다. 그런 비난 속에서는 제아무리 노력한들 ‘살아남을’ 수도 ‘다음 기회를 향해 도전할’ 수도 없을 테니까.

 곤 사토시 감독은 <퍼펙트 블루>에서 아이돌 출신 배우라는 존재를 통해 스타와 팬, 영화와 현실, 미디어와 진실의 관계에 대해 던졌던 질문에 대해 <천년여우>에서 자신있게 대답한다. 한 인간의 치열한 삶은 천년의 세월과도 맞먹을 만한 역사라고. 그런 역사를 이루려는 도전에 돌 던지기보다, 그런 역사를 이루는 도전이 공정하고 아름답게 이루어질 수 있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돌을 쌓는 것이 아이돌에게든 대중에게든 더 바른 길이다.

   
(사진 왼쪽) 영화 '퍼펙트 블루' 포스터, '천년여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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