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얼렁뚱땅 흥신소’ 촬영 당시, 보통 새벽 6시에 촬영이 끝나면 드라마 FD(무대감독)가 '모두 식사하고 주무시고 7시 반 집합'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4시간 반 정도 휴식 시간이 확보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한 방송사 스텝은 숙소를 정해 잠을 청했다.

그런데 그는 잠이 안 왔다고 한다. 그동안 버스에서 1~2시간 구겨져서 잤는데 오랜만에 편안하게 자려고 하니까 잠이 안 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 스텝은 버스 기사를 수소문해 버스 키를 빌렸고, 짐이 산더미처럼 쌓인 버스 안에서 다시 잠을 청했다고 한다. 그제서야 이 스텝은 잠이 푹 잘 수 있었다고 한다. 제가 28년 방송하면서 들었던 얘기 중 가장 슬펐던 얘기다.”

   
배우 이한위씨
 
25일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열린 ‘드라마 제작환경 개선, 어떻게 할 것인가?’ 토론회 패널로 참석한 배우 이한위씨. 그는 대뜸 지난 2007년 드라마 촬영 당시 경험을 토론회장에서 얘기했다. 그는 이어 “‘제빵왕 김탁구’ 촬영할 때 스텝들은 ‘1주일에 14시간 잤다’고 말한다. 지금도 이렇게 일한다”고 토로했다. 그가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한류 드라마가 열풍이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드라마 제작 환경은 충격적일 정도로 열악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올해 말 조선․중앙․동아일보, 매일경제의 종합편성채널 개국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드라마 제작 환경은 더욱 암담해질 전망이다. 특히 문제의 핵심은 광고 등 ‘재원 부족’이었다. 이날 토론회에선 연기자, 방송사, 제작사, 작가 패널 등이 이 같은 우려를 제기하며 정부의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노동렬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주제발표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속편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 ‘사람들이 붉은 여왕의 손을 잡고 가열차게 달리고 있지만 결국 제 자리로 온다’는 ‘붉은 여왕 효과’(Red Queen Effect)를 비유로 들며 “2011년은 한국 드라마 시장의 또 하나의 전환점”인데 “(언론사들이) 끝없는 경쟁을 위한 경쟁만을 지속하게 됨으로써, 결국 대재앙을 맞게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노동렬 교수는 “방송사의 제작역량 약화, 외주제작사의 지속적인 적자 구조, 출연료 미지급 사태 속출, 드라마 편성의 중요성 증가에 따른 장르 편중과 너무 긴 편성 시간, 연기자-작가 쏠림으로 인한 양극화, 쪽대본-초치기 제작 등의 나쁜 제작 관행, 한탕주의 기업의 수월한 시장 진입, 불량 기업에 대한 규제제도 미흡 등의 문제가 벌어지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특히 노 교수는 “가장 시급한 것은 광고 제도의 현실화”라고 말할 정도로, 이같은 문제의 뿌리에 드라마 재원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지적은 실제 드라마 관계자들이 말한 드라마 왜곡 실태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25일 오후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드라마 제작환경 개선, 어떻게 할 것인가' 주제로 한국PD연합회, 한국방송작가협회, 한국방송연기자협회, 한국콘텐츠진흥원 주최, 문화체육관광부 후원 토론회가 열렸다. 최훈길 기자 chamnamu@mediatoday.co.kr
 
KBS2 <가시나무새>의 이선희 작가는 “제일 힘이 있는 곳은 PPL(간접광고) 업체라는 걸 느끼고 있다”며 “(이번 드라마 제작 과정에서) PPL 업체가 노골적으로 요구해 대본이 수정되는 일이 발생됐다”고 전했다. 그는 “일례로 기업체가 자동차를 드라마 촬영용으로 빌려주는 대가로 ‘드라마에서 자동차 사고가 나면 안 된다’는 식으로 PPL 업체가 대본에 관여한다”며 “작가의 상상력을 돈에 의해 막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영섭 SBS 드라마 CP는 “가장 큰 문제는 편성 시간”이라며 외국에 비해 상당히 긴 국내 드라마 편성 시간인 72분에 얽힌 광고 문제를 거론했다. 김 CP는 “현행 광고 제도에서 드라마 10분 당 최고 1분의 광고가 붙는데, 72분 방송을 하게 되면 80분 편성으로 인정돼 최대 8분의 광고가 붙을 수 있다”며 “광고가 더 늘어날 수 있지만, 결국 제작비가 더 필요하고 스텝의 노동 조건이 악화되고 드라마 질도 떨어지며 최근처럼 방송 사고가 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안제현 삼화네트웍스 대표(드라마제작사협회 감사)는 “종편이라는 변수가 생기면서 한 번 더 큰 파동을 겪게 되지 않을까 우려를 하고 있다”며 작가, 연기자들을 둘러싼 과열된 영입 경쟁과 출연료 급등을 우려했다. 안 대표는 “분명히 향후 2~3년간 종편은 시청자의 눈을 끌기 위해 ‘센’ 작품을 하려고 할 것”이라며 “이에 따른 급등되는 비용 문제가 향후 제작사의 문제로 부메랑이 돼 돌아오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해법은 없는 것일까. △사전제작 시스템 강화 △편성 규제 완화 및 진흥 정책 활성화 △방송사와 외주 제작사의 장기계약을 통한 안정적인 드라마 수급 등의 각종 해결책이 제시되는 가운데, 이날 토론회에선 문제 해결의 열쇠는 정부에 있다는 주장이 주요하게 제기됐다.

이창섭 한국PD연합회 회장은 청중석 발언을 통해 “핵심은 정책”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책 결정자들이 드라마 시장의 크기를 판단하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창섭 회장은 “SBS 개국 당시인 지난 1991년에는 광고 물량이 넘쳐 났지만, 현재는 시장이 수용할 수 없는 상태에서 종편 4개가 더 들어오는 상황”이라며 “시장이 왜곡되게 되는데,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언론사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지 아무 방안이 없다”고 꼬집었다.

김영섭 CP는 “광고 등 제도적 개선을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면서 “좋은 작품과 좋은 연기자 발굴의 시발점인 단막극이 현재 제작비 1억2000만 원에 광고는 2000만 원이라 편성되기 어려운 상황인데, 정부가 제작비 지원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선희 작가는 “정부는 드라마 흥행이 보장되는 곳에 주로 금전적인 제작 지원을 하고 있다”며 “단막극처럼 인문학적이고 실험적인 드라마에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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