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마치고 저녁밥 먹기 전. 툇마루에 앉으니 마당 둘레에 핀 벚나무, 개나리, 명자나무꽃이 절정이다. 벚 꽃잎이 떨어져 눈 내리듯 마당을 덮고 있고, 명자나무 꽃은 빨갛게 타듯 한데 그 색깔을 글로 나타낼 재주가 없는 것이 애석다. 개나리꽃 역시 온 힘을 쓰고 있는 것이 력력하여 구슬땀에 배인 잎이 돋아나오며 노랑 꽃잎을 가려가고 있다. 봄이 가고 있는 것이다.

산은 요즈음 가장 이쁜 모습이다. 벚나무, 진달래 등 꽃나무와 소나무, 낙엽송 무리가 철 만나 점점이 제 색깔을 내고 매실, 배, 복숭, 사과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며 산허리를 덮어가니 봄빛 물들어가는 산은 날마다 새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도, 오래 보고 있다보면 질리고 심드렁해진다. 종종 하루일을 끝내면 그럴 때도 있지만 오늘 툇마루에 걸터앉은 내 마음은 일 저지르고 꾸중 맞은 아이처럼 다소 처져있어서 더 그런것 같다. 그럴 즈음, 내 귀청과 청각신경을 자극하는 소리가 들렸다. 새울음 소리다. 소쩍소쩍 소쩍새가 왔다! 지난해 늦가을까지 저녁 밤중 아침 간을 거르지 않고 울던 소쩍새가, 드디어 오늘 저녁 왔다. 반갑다. 언제 오나 기다렸는데, 때 되니 찾아왔다.
 
요즈음 한창 밭 일이 바쁘다. 봄을 뒤쫒아 다닌다. 쫒아가도 봄은 자꾸 일을 만들어놓고 저만치 앞서 간다. 심고 덮고 옮기고 갈고 북주고 풀맨다. 오늘도 하루가 지나간지 모르게 지나갔다. 일하다 허리 펴 하늘 보면 지나간 일 떠올라 머리 흔들고 다시 앉으면 놓쳐버린 세월과 눈 앞의 이해가 다가섰다.
 
오늘 지게를 졌다. 40키로 정도 되는 거름 포대를 밭에 옮겨야 하는데 차도 못들어가고 수레 이용도 불가능 했다. 이웃 농가에서 지게를 빌려 왔다. 함께 일하는 동료는 어릴 때부터 농사일로 잔뼈가 굵었는데 오늘 내가 지게를 져보겠다고 나섰다. 
 
“지게 내가 집니다. 괜찮지유.”
 

   
 
 
지게에 거름 포대를 들어 올려준다. 그러나 무릎 펴고 일어서기가 마음처럼 쉽지않다. 거름 올린 지게가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린다. 몇번 하니, 일이라는게 해볼수록 느는 것이어서 몇 번 왕래하며 일 요령이 붙어간다.
 
“이 정도는 두 짐 정도는 지야지요. 해볼 테유?”
“첨부터 넘 잘하면 안되자나유”
 
그런대로 일이 줄어간다. 작업도구가 기계화 되간다지만 지게 쓸모를 새삼 느낀다. 농사일이 기계화 되었다지만  아직도 지게 쓰임새가 많다. 반이 넘어 너댓개가 남았다. 그런데 일이 생기고 말았다. 거름 포대를 지게에 덜컥 올려놓다가 그만 지게가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할만 하다고 생각들 때 더욱 마음 쓰며 잘 해야 하는데. 넘어진 지게를 세워 일으켰는데 가로 지른 막대가 부러져 있다. 부러진 곳 때문에 이리저리 돌려세워보지만 힘을 못 쓴다. 부러진 곳 때문에 더이상 지게를 지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빌려온 지겐데 사고를 냈다. 
 
“세장이 부러졌네.”
 
지게를 본 동료가 말했다. 난 그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방금 머라고 했어요?”
“세장이 부러졌네유.”
 
또 알아듣지 못해 거푸 물었다. 몇번 물어 알아들어서, 내가 부러뜨린 지게 부분 이름이, 바로, '세장'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세장’이란 ‘지게의 두 다리 사이에 가로 박아 맞추어 놓은 나무’를 일컫는다. ‘세장’은 일반적으로 4∼5개를 지게다리 사이에 박고 각각 '윗세장(까막세장), 밀삐세장, 허리세장, 밑세장(아랫새장)'이라 부른다. 부러뜨린 세장은 바로 세장중 맨 아래인 ‘밑세장’인 셈이다. 밑세장에는 등태와 밀삐(멜빵)를 거는 곳이니 이곳이 부러져서는 지게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등태’는 짚으로 두툼하게 짜서 등이 아프지 않도록 한 등받이 이고 ‘밀삐’는 짚으로 엮은 어깨에 메는 끈이다.
 
참고로 지게 부위는 이외에도 ‘세고자리, 지게가지, 탕개줄, 목발’ 등이 있고, 지게에는 ‘쟁기지게 거름지게 물지게 쪽지게 옥지게 거지게 제가지지게 바지게 두구멍지게 켠지게 쇠지게 모지게’들이 있다. 지난 시절 지게는 농사일과 서민생활을 지탱해 주었다. 사용용도와 지역, 제작방법에 따라 지게 구조와 모양, 크기가 아주 다양했다. 이제 지게가 퇴장한 시대이지만 오늘 계기로 생각해 보니 지게만 사라진 게 아니라 함께, 말도 사라졌다. 난 지게라는 한 단어만 알았지 지게에 이렇게 많은 말이 있는지 몰랐다. 비단 ‘지게’뿐만 이겠는가. 그 말 사라진 빈 자리를 무엇이 채우는가.  
 
지게가 고장나서 어쩔 수 없이 거름을 등어깨에 지고 올려 일을 마무리 했다. 일 마치고 나니 망가뜨린 지게를 되돌려주는 일이 남았다. 슬쩍이 모른채 놓고 갈 수는 없고 당연히 부서졌다고 얘기를 하고 가야할 것이다. 전화로 사정 얘기를 하렸더니 마침 일 마치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섣불리 생각해보면, 그까짓거 낡은 지게 짧은 막대기 하나 부러진 것이어서 만들어 바꿔끼면 되리라 생각할 법도 하다.

그러나 농사기구는 흔한 호미나 낫, 곡괭이도 목수가 다루는 끌, 대패, 톱과 진배없는 것이어서 함부로 생각할 게 아니다. 더욱이 공장에서 나오는 제조품이야 부속을 사서 한다 하지만 직접 만들어 쓰는 농사도구는 값으로 대신 안되는 무언가가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일하다 지게를 망가뜨렸네요. 어쩌지요. 죄송합니다.”
 
지게 아래세장이 부러진 것을 보고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일하다 그런 것....내일 당장 써야 하긴 하는데....”
 
화제가 다른 데로 돌아갔다. 요즘 철 바쁜 농사에 대한 얘기가 오고가고 다른 마을 얘기도, 궁금한 안부도 오고 갔다. 그래도 지게가 마음에 걸렸다. 
 
“내일 쓰시려면 오늘 지게 고쳐야 겠지요?”
“그래야겠지. 적당한 나무가 있을지 모르겠네. 나무가 있으면 좋은데. 깎아 너면 되니까. 생나무가 아니고 마른 나무가 있어야 하는데. 안좋으면 만들어도 지게가 덜그럭 거려유”
“....”
“아뭏든 내일 밭일 져 나르려믄 고쳐 놓아야지. 하나하나 들고 나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괜찮아유. 오늘 일 힘들었지유. 피곤할 텐데 빨리 돌아가 쉬셔유.”
 
돌아와 쉬는 날 밤에 올해 들어 가장 큰 비가 왔다. 새벽까지 밤내 천둥이 울고 번개가 번쩍였다. 비 때문인지 다음날 아침 소쩍새 소리를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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