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0주년을 맞아 사회 각 분야에서 새로운 한일관계에 대한 모색이 활발하다 반면 우리 사회의 일제 잔재 청신부터 더 분명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일제 잔재의 청산 없는 한일관계의 새로운 모색이란 자칫 일본의 경제적, 문화적 침투에 무방비로 빗장만 푸는 꼴이라는 우려도 크다. 광복 50년을 맞은 언론계의 일제잔재, 그 실태를 살펴본다.

기자 사회의 일본말 잔재

“우리 사쓰마와리(경찰기자)들이 어제밤 하리꼬미(잠복근무)하느라 고생했어.”일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언 듯 듣기에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이런 일본말이 아직도 기자사회에서 공공연히 쓰이고 있다.

그뿐 아니다. 앞서의 ‘사쓰마와리’나 ‘하리꼬미’등의 일어가 주로 취재부서에서 사용되고 있다면 ‘와리스께’(얽이), ‘미다시’(제목), ‘노꼬리’(남은기사)등은 편집부에서 많이 쓰인다.

이들 일본말이 신문 기자들은 낯설지 않다. 선배의 선배들이 대를 이어 써왔기 때문이다. ‘전문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듯싶다. 한 신문사 사회부의 중견기자는 “관례화돼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 나온다”고 털어놨다.

이처럼 기자사회에서 일본말이 아무 거리낌없이 사용되고 있는 데는 우리 신문의 ‘출생의 한계’에 비롯한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근대 신문으로 성장한 우리 신문들은 신문제작이나 취재분야의 전문용어로 일본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반세기가 흐른 지금까지 기자사회에 일제시대 언론 잔재가 적잖게 남아있다는 사실은 한번쯤 뒤짚어 봐야 할 일이다.

신문기사에 나타나는 일본식 표기

“전문가들은 ‘엔고’현상에 대한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 증권가에서는 ‘즐거운 비명’등이 일본식 표현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기자들 역시 이런 표현을 즐겨 쓰고 있을 뿐 이들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기사를 ‘알기 쉽게’, ‘흥미롭게’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기자들의 노력은 높이사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식 표현이라는데 문제가 있다.중앙일보 교열부의 이상규기자는 “몇몇 기자들이 기사를 쓸 때 거부감 없이 일본식 표현을 사용하고 dT다”며 “분별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일본식 한자어 표기를 우리식으로 고치려는 노력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는 ‘엔고’, ‘거래선’, ‘시합’, ‘수순’등은 엔 강세, 거래처, 경기, 절차로 바꿔 쓸 수 있음에도 아직가ㅣ 일부에선 그렇지 못한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밖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본식 한자어 표기가 신문 기사에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문기사에 일본식 한자어 표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꼭 과거 일제의 유산만은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기술등 모든 분야에서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정보의 흐름이 가속화되면서 일본식 신조어들은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신문편집과 제작의 일본 의존

지난 91년말 일본 신문게에는 변화의 바람이 몰아쳤다. 1백20년 역사를 자랑하는 마이니치신문이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큼 지면 혁신을 시도했다. 제호를 현대 감각의 조형미를 살린 명조체로 바꾸고 신문제작의 금기사항으로 여겨지던 ‘통단내기’를 시도했다. 그날의 주요 기사와 독자가 관심 둘만한 기사를 한번에 찾을 수 있도록 ‘기사 소개란’을 고정 배치했다.

당시 마이니치신문으로 대표되는 일본 신문업계의 지면 혁신 바람은 우리 신문업계에도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지면혁신’, ‘개혁’이란 말이 우리 신문업계에 회자되기 시작한 시점도 공교롭게 그때부터다.

실제 이들 일본 신문의 지면혁신은 곧바로 우리 신문 제작에도 영향을 마쳤다. 최근 K신문사가 1면에 광고를 없애고 통단내기를 한 것은 마이니찌 신문의 1면 통단내기를 연상케 한다. M신문사는 제호의 형태와 배경 색깔도 마이니찌의 것과 너무 유사하다.

최근들어 일부 신문의 경제면과 국제면에 종종 등장하는 단신 갈라붙이기 편집도 일본 아시아신문의 편집 경향을 본 뜬 것으로 보인다.

신문제작의 하드웨어도 일제에 의존하고 있는게 많다. 윤전기는 성능과 비용면에서도 일제가 선호되고 있지만 설치 및 운용상의 문제로 거의 대부분이 일제를 들여와 쓰고 있다. 기사 제목의 밑그림으로 사용되는 지문까지도 국내제작이 안돼 일본에서 수입해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하드웨어의 극심한 일제 의존이 편집 기법등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만 선진기법을 배워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한겨레신문이 전면 가로쓰기 편집을 도입한데 이어 다른 신문들도 정치, 경제, 사회면을 제외하고는 점차 가로쓰기 편집면을 늘려가고 있다.이는 일제 시대부터 이어져왔던 일본식 편집틀의 극복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신문업계는 지금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섹션 신문’, ‘광고 없는 1면’, ‘제2창간’등 다른 신문들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여기에 ‘신세대 전면 가로쓰기’란 구호를 들고 나오는 것도 기대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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