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16일 기자협회는 신문회관 회의실에서 회장단, 운영위원, 분회장, 보도자유분과 연석회의를 열고 보도검열 철폐방안을 논의했다.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검열을 전면거부하자는 결의안이 두차례의 투표끝에 통과됐다. D데이는 20일.

그러나 바로 다음날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그리고 집권을 위한 음모를 진행하기 위해 언론의 입을 틀어 막았다. 신군부는 우선 기자협회 간부들을 연행, 모진 고문을 가했다(이들은 대부분 실형을 선고받고 1~3년을 복역했다). 검열도 더욱 강화했다.

그런 와중에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신군부는 처음 사흘동안 철저히 이 사실을 통제했다. 그러나 언론사 기자들은 현지 주재기자들이 송고해 온 기사를 보고 대략적인 윤곽은 알고 있었다.

편집국내 젊은 기자들부터 술렁이기 시작했다. 경향, 동아, 중앙, 조선, 한국일보, 합동, 동양통신 그리고 MBC 편집·보도국 기자들은 광주항쟁에 대한 보도통제에 격분, 원래 검열거부 D데이로 잡아놓았던 20일을 전후, 제작거부에 돌입했다. 철야농성도 이어졌다.

언론사 건물 밖에는 계엄군이 진주해 있고 편집·보도국에는 기관원들이 날카로운 눈매로 동태를 살피고 있던 시절이었다. 원고대장이 나오면 순번대로 시청에 있는 계엄사 검열관들(당시 책임자는 후에 언론통폐합의 주역인 이상재)에게 들고가야 했다. 검열관들과 싸워 기사한줄 살린 것이 유일한 자랑거리가 될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제작거부가 일어났던 것이다. 신문은 간부들에 의해 제작됐고 TV뉴스는 아예 없어지거나 축소됐다.

그러나 당시 광주에서는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의해 희생되고 있었다. 일부사에서는 제작거부를 중단하고 사실보도를 해야한다는 주장이 일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통제체제하에서 제작에 참여해 봤자 진실보도는 커녕 사실보도 조차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논란속에 중앙일보 기자들은 27일부터 제작에 복귀했다. 경향, 동아, 한국, MBC에서는 기자들이 합수부에 연행돼 구속되면서 제작거부 대열이 흩어졌다.

그 와중에 광주 현지로 내려간 기자들은 철도전화를 이용하거나 지방지사에 기사를 송고, 다시 지사에서 서울본사로 송고하게 하는 등 나름대로 ‘현장’을 알리려 갖은 고생을 다했다. 본사에서 이들의 원고를 받아본 기자들은 검열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는 현실을 자탄하며 실의에 빠져 있었다.

모신문사의 기자는 그때 편집국 분위기에 대해 “일부 열혈기자는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렸으나 대부분 서로간에 이야기 나누는 것을 꺼렸을 뿐만 아니라 듣는 것도 꺼려 항상 시끌벅쩍하던 편집국에 정적이 감돌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일부 간부들은 재빨리 대세의 흐름을 살피기 시작했다. 10·26 이후 이미 전두환의 등장이 기정사실로 나돌고 있는 마당이어서 이들은 광주항쟁의 의미를 신군부 집권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광주항쟁이 무력으로 진압되자 일부 간부들은 잽싸게 신군부에 붙기 시작했다. 사설 등을 통해 광주진압을 정당화 시키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어떤 간부는 전두환에게 ‘이런 난세에 일신의 안위만 보살피시면 어떻게 합니까. 빨리 나오셔서 난세를 바로 잡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모통신사 기자의 전언이다.

총칼에 꺾인 기자들의 진실보도 의지, 언론의 왜곡보도로 폭도로 몰렸던 광주시민, 그 와중에서 권력의 끄나풀을 잡으려는 언론사 간부들 그리고 탄압과 회유를 통해 권력창출을 위한 여론조작을 기도한 신군부. 80년 5월은 이렇게 암울한 영상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영상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는 우리 언론의 영원한 자화상이다.

노광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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