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폭도들의 무력 난동’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되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사이 ‘폭도들의 무력 난동’은 ‘광주사태’(5공)로, 그리고 ‘광주 민주화 노력’(6공초)으로 재평가됐다.

80년 5월 ‘광주 항쟁’에 대한 그때 그때의 재평가는 1980년 이후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키 워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키 워드의 변천사는 곧 언론의 5·18 보도 경향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87년 ‘6월 항쟁’이 있기까지 언론 속의 5·18은 ‘광주사태’에서 한걸음도 더 나가지 못했다. 그것도 매년 5월이 돼서야 ‘시위기사’의 주제어로 한두마디 찾아볼 수 있을 정도가 고작이었다. 한마디로 ‘광주’와 ‘5·18’은 언론에게 ‘금기의 언어’였다.

모든 신문에서 광주사태의 진상 규명등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와 재야민주화운동세력의 움직임등은 모두 ‘1단 기사’로 처리됐다. 광주 관련 시위기사의 신문 보도는 그 후에도 대부분 ‘1단 벽’을 넘지 못했다. 또 정부 발표를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광주 사태의 ‘내용’을 언급한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같은 보도지침은 87년 6월 민주항쟁 때까지 그 위력을 발휘했다.

당시 광주 관련 언론 보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보도지침으로는 광주 관련 국민적 저항 기사는 어떤 경우에도 머릿기사로 다뤄져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83년 이후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거세지면서 5월이 되면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있었지만 신문의 보도는 기껏해야 사회면 ‘중간 머릿기사’로 다뤄지는게 고작이었다.

당시 광주관련 시위보도가 타 언론사에 비해객관적이었다고 평가받은 동아일보만 해도 ‘광주사태 해명등 요구, 39개대 만오천명 시위’(85년 5월 17일 사회면 4단기사) ‘광주사태 6주 곳곳서 추모시위, 천주교 광주교구 미사뒤 시가행진, 대학가 기념식 재야단체선 성명서’(86년 5월 17일 사회면 5단 기사) ‘전국 80개대 3만 8천명 교내외서 격렬 시위’(85년 5월 18일 사회면 4단기사)등으로 87년 때까지는 단 한번도 머릿기사로 오른 적이 없었다.

전두환정권에 참패를 안겨주고 두 김씨의 실재를 확인해준 85년 ‘2·12총선’이후 야권(신민당-국민당)과 두 김씨의 성명을 계기로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요구 기사’들이 ‘정치적인 쟁점’으로 비로소 1면에 등장하기 시작하고 시위 현장의 사진들이 게재되기 시작한 게 그래도 변화라면 변화였다.
방송의 경우 신문과는 달리 전두환정권의 ‘적극적인 보도기관’으로 기능했다. 2.12 총선 참패로 전두환 정권이 헌법 개정과 80년 광주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야당과 재야 민주화운동세력의 거센 공세에 직면했을 때 방송은 말 그대로 권력의 ‘전위기관’으로 맹활약했다.

85년 5월 22일 80년 당시 국무총리였던 박충웅씨의 광주사태 관련 ‘특별담화문 재중계방송’을 시작으로 31일 ‘역사의 교훈을 잊지말자’로 끝맺기까지 무려 8차례에 걸쳐 KBS가 잇달아 내보낸 광주특집은 그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KBS는 이 특집 시리즈 방송에서 교수와 변호사등 권력에 밀착된 인사들을 동원해 ‘폭도들의 난동’이라는 80년 신군부의 발표만을 되풀이해 선전했다.

이런 언론이 87년 6월 항쟁 이후 ‘화려한 변신’의 모습을 보였다. ‘광주사태’는 ‘광주의거’로 바뀌었고 ‘광주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거침없이 정부에 대한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88년 5월, 5·18 8주년을 맞은 광주 현지의 모습을 전하는 언론들의 보도태도는 ‘세상이 달라졌음’을 실감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일제히 사회면 머릿기사등으로 ‘그날 그거리 시민대회 절정’ ‘큰 북 앞세워 질서속 행진, 서슬에 눌려 못와본 시민들 몰려, 5월의 노래 합창 좌절씻는 계기’(이상 조선일보 5월 19일자)등으로 80년 5월의 광주를 기리고 그 희생자를 위무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특히 이날 조선일보는 사회면 기사에서 ‘5·18’을 ‘5·18 광주민중항쟁’이라고 적시해 ‘민주화를 위한 노력’이라는 정부의 공식 입장을 훨씬 앞질러 나가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기도 했다.

방송도 ‘80년 광주’를 재조명하고 그 진상을 알리는 특별 기획프로그램들을 제작 방영했다. 89년 2월에 방영된 MBC의 ‘어머니의 노래’는 그동안 광주 희생자들이 겪었던 절망과 한의 세월을 감동적으로 전달해 광주문제에 대한 전국민적 인식을 새롭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달 후인 3월에 방영된 KBS의 ‘광주는 말한다’ 역시 주남마을 주민 학살및 계엄군의 대검 난자등 충격적인 사실을 ‘영상’이라는 확증을 잡아 고발하는 등 80년 5월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5·18 보도’는 그러나 88년 여소야대 정국에서 구성된 국회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89년 12월 우여곡절 끝에 전두환 전대통령의 형식적인 증언 청취를 끝으로 막을 내리고 3당 통합으로 정국 구도가 바뀌면서 다시 시들해져 버렸다.

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맞은 첫 5월, 야당등의 ‘선 진상규명’ 요구에 초점을 맞추기도 했지만 대다수 언론의 무게 중심은 ‘명예회복’과 ‘희생자 보상’이라는 정부의 해법에 대한 정치권의 공방 쪽으로 일찌감치 넘어가 버렸다. 중앙일보가 5·18 광주 특별 취재팀을 구성, ‘전두환-노태우의 광주 현지 시찰및 진압작전 개입’ ‘공수부대원 민간인 살해 암매장 증언’등 주목할만한 내용을 담은 기획특집(5·18 진상을 캔다)을 내보내기도 했지만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사실 규명 및 실체적 진실 파악이라는 언론의 1차적인 역할과 관련해서는 전두환-노태우씨등에 대한 12.12및 5·18 고소-고발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 상황을 뒤쫓는데 급급한 형국이 되고 말았다. 검찰의 수사 발표 한달전 부터 대다수 신문과 방송들은 ‘무혐의 결정’(경향신문-MBC-연합통신등) ‘공소권 없음’(조선일보-중앙일보등) ‘기소유예’등 불기소 방법을 놓고 검찰이 저울질하고 있는 것을 보도하면서도 정작 유무죄 판단의 관건인 구체적인 혐의사실을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한 것은 그 단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5·18 내란음모 고소 고발 사건에 대한 검찰의 이번 ‘불기소 방침’에 대다수의 언론이 일제히 비판의 칼날을 세우고 나섰지만 검찰 관계자들이 “조금 시간이 지나면 곧 잠잠해질 것”이라고 느긋해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검찰의 수사내용을 반박할 결정적인 ‘사실’을 언론이 밝혀내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는 점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요란하다가 곧 제풀에 수그러들 ‘빈총 사격’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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