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과 언론 <80년`5월`당시`언론보도`행태>
5·18과 언론 <80년`5월`당시`언론보도`행태>
“군이`자제를`거듭했던`사실을`우리는`알고`있다”

80년 5월 이후 현재까지 언론의 광주 보도는 ‘폭도’에서부터 ‘민중항쟁’까지 실로 다양한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같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보도 기준이 있다. 그것은 언론의 독자적인 진실 규명노력이 아닌 당시의 시대적 배경, 특히 권력이 ‘용인’하는 범위 안에서만 보도가 돼왔다는 것이다. 80년 당시와 그 이후의 언론 보도의 흐름을 살펴본다.


80년 당시 광주항쟁 소식이 중앙언론에 처음 보도된 것은 5월21일. 항쟁발발 사흘만이었다. 계엄사의 철저한 보도통제 때문이었다.

이날 석간신문부터 보도되기 시작한 내용도 현지 송고기사를 담은 것이 아니라 계엄사의 발표문을 옮긴 것이었다.

따라서 이미 계엄군의 무자비한 양민학살이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당시 석간이었던 동아, 중앙일보는 각각 ‘광주일원 데모사태’ ‘학생, 시민들 광주서 소요’라는 지극히 ‘평온한’ 제목으로 관련기사를 내보냈다. 그날 오후 방송과 다음날 조간신문도 마찬가지였다.

보도내용은 “학생, 깡패 등 현실불만 세력들이 대거 광주에 내려가 사실무근의 유언비어를 날조해 퍼뜨림으로써 ‘사태’가 일어났으며 이로인한 사망자는 군경 5명, 민간인 1명 등 6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22일 석간부터 계엄사 발표가 아닌 특별취재반의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관련보도가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광주데모 사태 닷새째’(동아) 등 여전히 ‘한가한’ 제목이 1면머리를 차지했고 내용 또한 총기탈취, 방화 등 ‘과격시위’에만 초점을 맞췄다. 계엄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언급은 한줄도 비추지 않았으며 단지 시민 경찰 군인 사망자가 수십명에 달한다는 내용만 나갔다.

서울신문과 MBC에는 ‘폭도’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23일 들어서는 갑자기 논조가 바뀌기 시작했다. 신문들은 ‘광주사태 수습기미’(동아 조선 등) ‘미국무부 광주사태 평화적 해결 희망’ 등 현지상황과는 관계없이 수습에 중심을 둔 보도를 내보내기 시작했고 방송도 ‘이 난국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KBS) 등 특집방송을 마련, 여론호도에 나섰다.

이같은 보도는 24일 이후 더욱 강화됐다. ‘질서회복 안간힘’(한국) ‘광주시민 학생 자체수습나서’(조선) ‘질서찾는 광주’(동아) 등의 보도가 주류를 이뤘으며 그 한켠에는 “군자위권 발동하는 불행한 사태 없어야”라는 계엄사 발표문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자리했다.

결국 27일 새벽 계엄군이 광주시내로 진입, 시민군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광주를 장악하자 언론은 서둘러 ‘10일만의 평온’(서울) ‘광주, 차차 기력회복’(동아) ‘복구 서둘러’(조선) ‘슬기를 모아 안정을 되찾읍시다’(KBS) 등 봉합에 나섰다.

이후 보도 역시 ‘안정을 되찾아 가는 광주’의 모습에만 비중을 뒀을 뿐 정확한 원인규명이나 피해집계 등은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계엄사의 일방적인 발표와 검열을 통과한 기사만이 지면과 화면을 장식했다.

여기에 언론들은 ‘선량한 광주시민’과 ‘폭도’를 분리하려는 한편 ‘광주의 아픔’이라는 피상적인 표현으로 사건을 덮어두려는 보도태도를 취하고 나갔다.

“…선량한 시민들의 피해가 없도록 보호하고 극렬분자를 조속히 가려내고 기타는 과감히 관대한 처리를…”(경향 5월28일자 사설)

한편에서는 광주항쟁을 유발시켜 권력탈취를 노린 신군부에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진 내용도 있었다.

“광주사태를 진정시킨 군의 어려웠던 사정을 우리는 알고 있다. 비상계엄군으로서의 군이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한 국군이 선량한 절대다수 광주시민, 곧 국민의 일부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행동에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다…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성공했다”(조선 5월28일자 사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언론이 왜 광주항쟁이 일어났는지, 왜 시민들이 자위행동에 나설 수 밖에 없었는지, 계엄군의 행위는 어떠했는지, 정확한 사상자는 얼마나 되는지는 일체 추적하지 않고 오직 사태진정 및 조기봉합에만 매달렸다.

이같은 보도태도는 계엄이라는 특수상황하에서 빚어진 언론통제의 결과로 이해될 부분도 있다. 그러나 보도통제의 선을 넘어 신군부의 비위를 맞추려고 혈안이 됐던 일부 언론들의 보도태도는 언론사에 또 하나의 오욕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일부 신문도 그랬지만 방송의 경우는 더했다.

광주항쟁 기간 내내 북한군 무력훈련 장면, 피흘리는 계엄군, 시민군의 무장시위 장면 등 선별적인 장면을 골라 국민들을 호도했던 방송들은 27일 계엄군 광주진압 이후 각종 특집방송, 좌담 등을 통해 신군부의 선무공작에 앞장섰다.

한편에서는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몰고 또 한편에서는 계엄군의 민간인 살상을 불가피한 진압으로 호도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난국극복을 위해선 과거를 잊고 화합을 해야 한다는 논리를 줄기차게 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방송의 경우 당시에는 뉴스 속기록도 없고 방송필름 또한 제대로 보관돼 있지 않아 정확한 전달이 어려운 상태다.

어쨌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된 15년전의 ‘광주항쟁’은 권력에 의한 언론통제의 사슬에 묶인 언론의 나약한 자화상을 또한번 노출했고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 재빨리 권력의 향배를 쫓아가는 굴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광주 현장에 내려간 모신문사 기자가 “먼저 내려와 있던 동료 취재기자의 핏발 선 눈에서 사태의 흐름을 한눈에 읽었는데 그뒤 일주일여만에 본사로 복귀해서 신문을 보니 자신의 눈에도 핏발이 서더라”고 전한 말 한마디가 모든 것을 응축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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