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반세기,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광복’과 ‘해방’을 당당히 자부하지 못한다. 오늘은 그 까닭을 두루 헤아릴 만한 계제는 아니다. 대담하게 잘라 말한다면 ‘하이던 것이 다시 하나로’의 당위가 이루어지지 않는 아픔이 그 근원이다.

하나이던 나라와 겨레는 여전히 분단의 칼자루 아래 신음한다. 그것은 하나로 어우러졌던 ‘자연’이, 두동강이 난 ‘부자연’으로 말미암아 울어나는 신음이다. 아픔의 땅에 갇힌 북의 언론도 당연히 그 예외일 수는 없다. 오히려 ‘부자연’의 분단과 대치의 아픔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냈던 것이 남북의 언론이 아니었던가.

‘언론의 자율성. 당으로부터의 독립성’을 말했던 마르크스 엥겔스와는 달리, 레닌의 언론관을 따랐던 북녘의 언론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애당초 그들은 ‘당의 도구’임을 자임했던 것이다.

그러나 명색이 자유주의를 표방해온 남녘의 언론은 정작 지배이데올로기와 그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웠던가. 민망하지만 지울 수 없는 언론사의 증거들이 ‘그렇다’는 응답을 허락하지 않는다.

‘멸공언론’ ‘북진통일언론’용맹한 나팔소리는 무엇이었으며, 이른바 ‘평화통일언론’이후의 ‘용공조작언론’‘색깔 칠하기 언론’의 저돌적 북소리는 또 무엇이었던가. 그 모두가 지배이데올로기와 권력과 자본을 대변하는 가락이며 장단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거의 불가항력으로 헤아릴만한 까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뜻하지 않게 냉전의 전초기자가 돼버린 역사의 불운이 그것이다. 우리의 내인과 함께 외인으로 작용했던 냉전논리는 분단을 강요하고 또한 대치를 강조하는 압력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열강의 냉전구조가 무너진 이후에도 꾸준히 이어지는 왜곡과 도발의 이유는 무엇인가. 남녘의 ‘주장’은 북녘의 ‘생떼’로, ‘견해’는 ‘억지’로, ‘설득’은 ‘선전’으로, ‘평화’는 ‘평화공세’로. ‘대질’은 ‘생트집’으로 둔갑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나는 감히 ‘우리’라는 낱말의 남용을 자제하고자 한다. 다만 나를 나라고 말하고, 나를 ‘우리’로 확대하기 이전에 그저 나 스스로에게 먼저 말하고자 한다. 나의 머리, 나의 가슴에도 휴전선의 장벽을 가로지르고, 냉전의 논리는 좀처럼 뿌리치기 어려운 뿌리로 심어져 있었던 것이다.

‘머리속의 가위’‘북한정보의 재단기’가 오늘에도 가위질과 재단질을 강행하고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재하는 분단의 무게는 역시 반세기의 무게로 쌓여 있었던 것이다.

언론의 교과서들도 그 문제 앞서는 초라한 가벼움을 한탄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나는 분단을 넘어 진정한 ‘광복’과 ‘해방’을 맞이하는 민주·민족언론의 길은 가장 평범하다면 가장 평범하게, 언론의 원리를 되살리는 데서부터 비롯돼야 한다는 믿음을 저러비지 못한다.

내재하는 분단과 냉전의 주름살도 원리의 되살림으로 펴낼 수가 있을 터이다. 가위질과 재단질도 그 앞에서는 주춤할 수밖에 없는 터이나. 북녘이 ‘남반부’ 또는 ‘남조선’이라고 부르는 마당에, 왜 남녘은 ‘북한’이 아닌 ‘조선’으로 불러야 하느냐는 상호주의의 주장도 무색해질 수밖에 없을 터이다.

그러나 언론의 언론다운 원리의 되살림은 언론노동자들의 각성만으로 다다를 수 있는 과녁인가. 아니다. 역시 민주·민족언론의 큰 기둥인 통일언론의 길에도 권력과 자본의 장애요인은 도사린다. 역시 통일언론의 길도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권력과 자본의 장애를 넘어설 수 있어야만 통일언론의 길도 열리게 된다.

통일은 어느날 갑자기 우리 앞에 덮쳐드는 사건일 수 없다. 날마다 진행되고 날마다 축적되는 과정의 끝에서 통일의 지평은 열린다. 또한 그 진행과 축적의 끝머리에서 이뤄지는 통일만이 그 어느나라도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공존의 삶, 그 전형의 통일을 보여줄 수 있다.

8·15 반세기는 반세기의 끝이 아니다. 반세기의 시작이다. 그 반세기의 시작은 민주·민족언론의 줄기 속에 통일언론의 물줄기가 함께 서있음을 일깨워 준다. ‘하나이던 것을 다시 하나로’의 당위와 ‘자연’의 회복을 위해서도 우리는 언론의 언론다운 원리의 제자리를 찾아내고 지켜내야 한다.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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