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에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이래 17일째였던 지난 10일에도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은 민중들의 권한 이양 요구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 시점에서는 성난 이집트 민중들의 거센 반정부시위가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그 누구도 쉽사리 단언할 수 없었다. 천안문사태처럼 실패할 경우 시위참가자들 및 주동자들에 대한 보복은 상상하기도 끔찍했다.

사실 튀니지의 시민혁명이 중동지역 내 도미노효과로 얼마나 퍼져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은 다름 아닌 왕정국가(사우디, 요르단, 쿠웨이트 등)와 공화정국(이집트, 리비아, 알제리 등)이지만 장기독재정권하에서 침묵하는 대다수 아랍국민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민주국가 시민의 정서로 이해하기에 그들은 매우 한심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튀니지 시민혁명의 성공은 예측 불가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28년을 집권한 벤 알리 대통령의 망명과 튀니지 혁명 성공을 실감하기도 전에 30년간의 철권통치에 격노한 이집트 국민들은 타흐리르(아랍어로 ‘해방’이라는 뜻)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사실 블로거들 사이에서 튀니지 혁명이 성공한 직후 알제리와 이집트가 ‘NEXT'가 될 것이라는 글들이 확산됐었다. 무바라크가 18일 만에 결국 하야하게 된 이유들 중 하나도 자국 시민들의 힘과 민주화에 대한 진정성을 불신하고 우민들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이집트대사관 근처에서 열린 <무바라크 즉각퇴진과 이집트의 자유를 위한 2차 집회>에 참가한 이집트인들이 무바라크의 퇴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이제 언론의 관심은 포스트 무바라크 시대의 정권을 누가 잡을 것인가이다. 현재 전문가들 사이에서 거론되는 차기 지도자들은 후세인 탄타위 국방장관, 무함마드 엘바라데리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 에쌈 엘 에리안 무슬림 형제단원, 아무르 무싸 아랍연맹 사무총장 등이다.  군부는 60년간 이집트를 통치해 온 전력이 있고 현재 무바라크로부터 승계한 권력을 실질적으로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유력한 차기 집권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표면상으로는 국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집트를 재건하겠다고 발표했고 국민들도 그들의 군부를 믿고 있다고 말하지만 무바라크가 하야했을 뿐 망명을 하지 않은 채 군부에 정권이양을 했다는 사실은 주목해 볼 만하다.

또한 지난 10일 대통령직을 유지하겠다던 대국민선언과 군부의 무바라크 지지선언이 있은 지 하루 만에 그가 사임한 점은 이집트가 필리핀, 인도네시아와 같은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점쳐지는 부분이다. 튀니지 혁명은 분명 국민들이 실현한 해방혁명이기는 하지만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군이 혁명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벤 알리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으나 군이 항명해 벤 알리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이집트 혁명의 성공도 결정적 열쇠는 군부가 쥐고 있었다. 계엄령이 선포됐으나 이집트 군은 시위대를 강경진압하지 않았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봐야 할 부분은 과도정부의 구성이다. 튀니지에서는 구정권의 핵심 부처장관들과 야권 인사들로 과도정부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는 무바라크의 측근 인사들이 대거 포진된 군부에 권력이 이양되었다. 무바라크는 망명을 하지 않은 상태다. 벤 알리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무바라크의 사임소식을 접했을 때 독일로 망명할 것으로 짐작하기도 했다.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이집트대사관 근처에서 열린 <무바라크 즉각퇴진과 이집트의 자유를 위한 2차 집회>에 참가한 이집트인들이 무바라크의 퇴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하지만, 무바라크는 망명하지 않았다. 그는 왜 망명하지 않았을까? ‘무혈의 군사쿠데타’인가, 아니면 ‘친 무바라크 세력의 건재’인가?

‘무혈 쿠데타’의 결과라면 대통령직을 유지하겠다던 대국민성명 후 군부의 항명이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으며, 그랬다면 무바라크는 망명을 갔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친 무바라크 세력의 건재’로 현 상황을 읽어보자면, 무바라크가 군부에 권력을 이양한 것은 이집트 내에 체류하면서 자신의 친위세력을 존속시키겠다는 의도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집트 혁명이 완전한 독재 타도로 보기에는 여전히 위험요소가 존재한다. 오는 9월 대선 전까지 과도 군부정권이 국민의 뜻대로 민주화정권수립을 실현하리라고 그저 낙관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집트 내 군부의 행보와 무바라크의 거취를 지켜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도정권인 이집트 군부는 국민들이 원하는 대로 개헌과 비상조치법을 개정하고 9월대선 후 평화적 정권 이양의 수순을 밟을 것인가. 세계의 이목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집트 민중들의 시위 배후에 미국 혹은 이슬람과격단체의 개입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억측일 수 있다. 이집트 혁명은 물가상승과 높은 실업률로 고통 받은 민심이 폭발한 결과 발생한 자발적이고 절실한 외침이었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이집트 혁명이 성공했기 때문에 이집트 사태를 ‘반정부운동’이 아닌  ‘민주화운동’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이집트 민중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이 끝난 후 다시 군인출신인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던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거울삼아 그 같은 고통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를 기원해본다. 

 필자소개---------------------

필자 김선하 중동연구자는 요르단대학교에서 정치학 석사를 받고, 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국제지역학과 중동아프리카 정치 박사 과정중에 있으며, 외국어대 아랍어 강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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