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개 민족으로 구성된 중화인민공화국의 여러 민족 가운데 ‘조선족’은 중국에서는 한족을 빼고 13번째로 많은 소수민족을 이루고 있는 재중 한인을 가리키는 공식 용어다. 그러나 대한민국 법무부 출입국 외국인 정책본부의 통계 자료에서는 ‘한국계 중국인’이라고 표기되고 있으니 이 땅에서는 공식 용어가 아니다.

재외 한인 가운데 가령 미국 거주 한인은 재미 교포, 일본 거주 한인은 재일 동포라고 하면서도 유독 재중 한인에 대해서만큼은 교포나 동포 같은 살가운 말 대신 조선족이라는 야박한 표현이 널리 쓰인다. 외국 출신 노동자가 많지 않던 시절에는 연변 동포라는 동족의식을 담은 살가운 말이 더 많이 쓰였었지만 요즘은 조선족이라는 말이 대세다.

조선족은 주로 중국 동북 지역 3성, 특히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가장 많이 살고 있었으나 중국의 경제가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취업 등을 이유로 중국 전역의 대도시로 조선족 인구가 분산되고 있다. 게다가 한국이 외국인 노동자의 저임금 노동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국내에도 많은 수의 조선족이 들어와 있다.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거대한 물량공세, 성찰 없는 이야기
이탈리아계 마피아 묘사하듯
범죄자 소굴로 비치는 조선족 사회

그러면서 한국 영화, 특히 상업 영화에서도 조선족을 재현하는 일이 잦아졌다.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댄서의 순정>에서 ‘국민 여동생’ 소리를 듣던 문근영을 통해 자본의 힘에 팔려와 공권력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꿈과 사랑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가치를 돌이켜보게 하는 애처롭고 사랑스러운 소녀의 모습이었던 조선족의 이미지는 이제 <황해>를 통해 소름끼치게 무시무시한 살인자 무리로 바뀌었다.

   
  ▲ 영화 '황해'의 한 장면  
 
가족을 위해 돈을 벌겠다고 한국을 찾은 여성은 한국에서는 밑바닥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다가 자취를 감추고, 빚을 내서까지 돈 좀 벌어오라고 여성을 보냈던 남성은 사라진 그 여성을 찾아내러 뒤따라온다. 연락이 닿지 않는 아내가 걱정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배신감에 치가 떨려서. 그래서 사내는 믿음 대신 칼을 품었다. 

 <황해>는 연변의 택시운전사 구남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개병(광견병)’에 걸려 동족을 물어 죽이고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다 끝내 탈진해 죽어버렸다던 개 이야기를 풀어놓는 데서 시작한다. 한국으로 떠난 뒤 연락이 끊긴 아내가 다른 사내와 정분이 났으리라는 의심은 구남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라 구남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다. 마침 개장수 면가(김윤석)가 빚에 쪼들리고 의혹에 시달리는 구남을 홀린다.

사라진 아내를 찾기 위해 구남(하정우)이 불법적으로 위험천만한 뱃길로 황해를 건너와 먼저 해치워야 하는 일은 주소와 이름 뿐 내력은 알 바 아닌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면 큰돈을 받게 되고, 한국 땅에 발 디딘 김에 아내를 찾아낼 수 있는 방도도 있으려니 싶어 청부 살인 의뢰를 받아들인 구남이 걸려든 것은 개병과도 같다. 닥치는 대로 물어뜯고 병을 옮기며 죽음을 퍼뜨리다 죽어서 묻힌 시체가 다시 파헤쳐져 사람들 뱃속으로 먹혀버린 개. 어린 시절 개병이 어찌 돌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족들에게 뿌려진 폭력의 근원은 아주 분명하다.

   
  ▲ 영화 '황해'의 한 장면.  
 
형님 동생하며 함께 사업을 도모하던 사이가 되었든, 여보 당신하며 잠자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든 치정과 불신 때문에 사람 죽여 달라고 돈뭉치를 건네며 병에 걸려들게 한 건 한국사회다. 힘들고 보수 적은 일을 맡기는 것도 모자라 치정 살인조차 조선족에게 떠맡기고서는 그 뒷감당을 못해 서로 쫓고 쫓기며 죽고 죽인다.

 <황해>가 불편한 것은 이렇게 병든 세상, 미쳐 날뛰는 인간 군상을 상상해서 영상으로 재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조선족을 철저하게 소재로 타자화하고 착취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조선족 사회는 군입거리로 해바라기 씨를 까먹고, 마작판에서 일확천금을 노리고, 돈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들며, 연락 끊긴 가족을 대뜸 오입질에 넋 빠진 원수 취급하는 모진 세상으로 그려진다.

한국말을 쓰기는 하지만 <댄서의 순정>에서 ‘아즈바이’라는 말에 정감 담아 건네던 같은 민족의 언어가 아니라 어휘며 억양이 낯설기가 외국어와 매한가지다. 말은 알아듣겠건만 풍속이며 말투, 정서는 영판 생경하다.

 

   
  ▲ 영화 '댄서의 순정'의 한 장면.  
 
그 낯선 세상에서 인간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내들이 하나도 아니고 떼로 몰려들어 칼이며 도끼도 모자라 뼈다귀까지 휘둘러가며 스크린에 피칠갑을 한다. 그들을 불러들인 한국사회에도 이미 조직폭력배가 차고 넘쳐서 서로 죽고 죽이느라 지옥이 따로 없다. 그런데 아이쿠, 그런 떼죽음의 배경이 고작 치정 문제란다. 칼깨나 쓰는 작자들을 줄줄이 거느렸으면서 굳이 연변까지 가서 목돈 들여 살인 청부할 대상을 찾는다는 것은 너무 부도덕하거니와 설득력도 없다.

컨테이너를 비롯해 수십 대의 자동차를 망가뜨리며 백억이나 되는 물량공세를 퍼부을 정도면 치정 살인의 배경이 되는 한국사회의 심연은 못 건드리더라도 틈새는 들여다보게 해줘야 그 무지막지한 폭력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봐야할 이유를 찾을 수 있을 텐데.

스크린에 넘쳐나는 노출이나 폭력의 묘사가 단지 영화적 재미를 위해서 감당하기에는 지독하게 집요한데 비해, 그런 폭력의 배경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그렇다고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을 이끌어내지도 못한다. 

   
  ▲ 영화 '황해'의 한 장면.  
 
 <황해> 이후 자칫하면 조선족 사회는 한국사회를 위협하는 잠재적인 범죄자 집단으로 비춰질 것이다. 마치 이탈리아계 미국인 사회가 미국 대중영화를 통해  마피아 소굴로 비춰졌던 것처럼. 그러므로 구남의 아내는 긴 외유 끝에 열차에서 내리더라도 한국에서든 연변에서든 편히 쉴 곳을 영영 잃고 말았다. 정말 잔인한 것은 피가 솟구치고, 뼈가 드러나며, 뇌수가 흘러넘치는 폭력이 아니라 모든 책임을 바다 밑에 내던져버리는 감독의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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