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어두운 국가의 상황 속에서도 의지를 잃지 말고 각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언제나 편안한 세상이 우리 사회엔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니까, 인내 인내심을 발휘해서 살아가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어요.”

MBC 라디오 <손석희 시선집중>이 6일 방송에서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가 생전에 만나 인터뷰 한 리영희 선생의 육성을 전했다.

손석희 교수는 이날 오전 방송에서 “리영희 전 한양대 명예교수가 어제 새벽에 타개했다. 진보적 사상가로서 언론인으로서 사표와 같은 존재였다고 많은 분들이 추모하고 계신다”면서 지난해 말 손 교수가 리 선생의 자택을 찾아 인터뷰한 일부 내용을 전했다. 지난 5일 리 선생의 임종으로 이 인터뷰는 리 선생의 생전에 마지막 MBC 라디오 인터뷰가 됐다.

방송에선 리 선생이 추억담을 얘기하며 소탈한 모습이 소개됐고, 손 교수의 웃음도 전해져 눈길을 끈다. 리 선생은 “나 공부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아닌데 술도 많이 했고 방탕도 좀 했고 남과 다름 없이 살아오면서 한 가지 무지하게 독서를 한 것만은 사실이에요”라며 어려운 생계에서도 독서에 매진한 추억담을 전했다.

“재미난 것이 원고료 좀 들어오면 서점에 가서 신간들 못 본 것 꾸려 가지고 집에 들어오는데, 와서 대문 밖에 책 꾸러미 놓고 대문 두들겨서 집에 일단 들어가요.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서 나와서 책 꾸러미를 다시 가지고 들어가요. 보면 집 사람, 어머니가 ‘식구들 (생계는)어떡하는데 책만 사온다’고. 그런 수법으로 하면서까지 독서를 많이 했죠.”

   
  ▲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왼쪽), 고 리영희 선생.  
 
이어 인터뷰 과정에서 뻐꾸기 시계 소리가 울리자 다시 웃음이 흘렀다. 손 교수가 뻐꾸기 시계 소리를 듣고 “리영희 선생 댁에서 인터뷰하고 있기 때문에 (울리고 있다)”며 “밤에도 이렇게 울리면 주무시는데 지장은 (없으신지)” 물었다. 그러자 리 선생은 “뻐꾸기가 현명해서 해만 떨어지면 안 울어. 잘 만들었어요”라며 위트 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리 선생은 손 교수에게 현 시대의 위기를 언급하는 대목에선 결연한 모습을 보였다. 리 선생은 “어두운 국가의 상황 속에서도 의지를 잃지 말고 각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언제나 편안한 세상이 우리사회엔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니까”라며 “인내 인내심을 발휘해서 살아가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 손석희 / 진행  :
아시는 것처럼 1974년에 출간돼서 1980년대 필독서였던 <전환시대의 논리>, 내 책이 더 이상 읽힐 필요가 없어서 인세가 0원이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을 늘 피력해주셨던 <전환시대의 논리>의 리영희 선생님, 오늘 어렵게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근황은 어떠신지, 마침 또 리영희 선생님의 삶이 주는 의미로 오늘의 상황에 대입해보는 <선생 리영희>, 아직 가제이긴 합니다만 이 책이 발간된다는 그런 소식도 들려와서요. 시대의 양심,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늘 많은 분들의 좌표가 돼 오고 계신 리영희 선생님을 좀 모시고 얘기 나누겠습니다. 안녕하셨습니까? 선생님.
 
◎ 리영희 선생  :
네, 안녕하셨습니까? 
 
◎ 손석희 / 진행  :
예. 
 
◎ 리영희 선생  :
먼 길 찾아오셔서 고맙습니다.
 
◎ 손석희 / 진행  :
예, 우선은 건강이 좀 어떠신지 여쭤볼 수밖에 없네요. 어떠신지요. 괜찮으십니까?
 
◎ 리영희 선생  :
뭐 건강은 벌써 한 10년 전에 뇌출혈, 뭐 우리말로 중풍이 돼서 쓰러진 후에 기동을 잘 못하고 또 요새는 겨울이면 만성기관지염이 재발해서 방금 지금 앉아 있는 이 시각에도 퍽 고생하고 있죠.
 
◎ 손석희 / 진행  :
예, 불편하신데 저희가 장시간 시간을 뺏어드린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 리영희 선생  :
예, 좋은 일입니다. 오늘 같은 날.
 
◎ 손석희 / 진행  :
지난 2일이 팔순을 맞으신 날로 알고 있습니다. 
 
◎ 리영희 선생  :
예, 그렇죠.
 
◎ 손석희 / 진행  :
후배들이 자리를 마련했으면 했는데 또 사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왜 그러셨는지요?
 
◎ 리영희 선생  :
글쎄, 가당치 않은 일인 것이 내가 회갑 때 육순 때도 크게 사회적으로 벌려줬고 또 칠순 때도 역시 또 공개적으로 큰 잔치를 베풀어줬는데 연거푸 또 팔순이라고 해서 그러기가 부끄러워졌죠. 세상에 무슨 할 일을 하고 그만한 보람 있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모르겠는데 두 번도 가당치 않은데 세 번씩이나 그런 일이 있어서는 너무 내가 뭐랄까, 감히 후배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그런 심정이었어요. 
 
◎ 손석희 / 진행  :
댁에서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시계가 뻐꾹뻐꾹 소리가 들립니다. 글쎄요.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후배들 입장에서는 뭐랄까요. 선생님의 존재 자체가 어떤 힘이 되고 그렇게 해서 또 팔순을 맞으신 선생님의 그날을 뭐랄까요. 축하드리고 싶었던 그런 마음도 있었을 것 같은데
 
◎ 리영희 선생  :
그런 뜻은 저도 잘 이해는 하겠어요. 이해는 하는데 옛날 얘기가 있듯이 과하면, 모든 것이 과하면 다 오히려 욕이 되니까 나 같은 사람은 이제 병들고 나이도 먹고 그냥 조용하게 있다 가는 것이 오히려 세상에 사는 자세가 아닌가 생각하죠.
 
◎ 손석희 / 진행  :
선생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평소 내 책이 더 이상 읽힐 필요가 없어서 인세가 0원이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인세가 한 푼도 안 들어오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 리영희 선생  :
예, 그렇습니다. 나 그러한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한 까닭은 다소간 내 저서가 책들이나 써온 내용들이 시대를 조금씩 앞서갔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것으로서 깨우치고 그래서 더 이상 내 책이 어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정도로 전반적으로 그런 의식의 수준이 올라왔으면 그럼 뭐 책 읽을 필요 없으니까 그런 걸 바랐는데 여기 사회가 그렇지 않고 요새 같이 또 보니까 계속 책이 팔리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인세가 조금씩 들어오려고 그러는 모양인데, 러시아의 솔제니친이 미국에서 20년 동안 망명생활 하다가 소련에서 쫓겨나 가지고 있다 소련이 러시아가 되고 민주화가 되려고 하니까 돌아가는 자리에서 뉴욕공항에서 바로 대체로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자기의 저서와 사회의식의 수준에 관해서 내가 솔제니친보다 조금 더 앞서서 그런 생각을 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
 
◎ 손석희 / 진행  :
여전히 아무튼 책은 팔리고 있습니다. 글쎄요. 그 책이 또한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하시는지요?
 
◎ 리영희 선생  :
글쎄, 그런 세월이 안 되길 바랐는데 전진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이건 역시 또 후퇴하니까 그 책에 대해서 그런 의견들이 생겨나는가 봐요. 
 
◎ 손석희 / 진행  :
혹시 그 책을 쓰실 때에 정말 말씀하신 대로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거겠습니다만 실제로 이 책이 더 이상 나갈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확신하셨었는지요?
 
◎ 리영희 선생  :
아니, 그렇게 꼭 오리라는 것을 확신할 순 없었죠. 다만 그런 걸 희망을 했고 그러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 것이죠.
 
◎ 손석희 / 진행  :
요즘 시국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 끊고 지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전혀 그러신 것 같진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7월에 인권연대 10주년 행사에서 이 정부를 좀 비판하신 그런 말씀도 하시고 그래서 조금 논란이 되긴 했습니다만.
 
◎ 리영희 선생  :
예, 그 인권연대의 젊은이들이 자기들의 행사 10주년 기념에 와서 잠깐 인사해달라고 간청하길래 오래간만에 갔었죠. 가서 지금 이 정권하에서 민주주의가 그토록 어렵게 한 2, 30년의 투쟁의 결과로 조금씩 뭔가 이루어지는 것 같이 보였던 것이 그냥 사그리 되돌아가는 그런 느낌이었길래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인용하면서 그에 대한 내 의견이랄까 경고 같은 것을 가볍게 말했던 거죠.
 
◎ 손석희 / 진행  :
어떤 느낌을 가지셨길래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 리영희 선생  :
<레미제라블> 인용한 까닭은 알다시피 장발장을 잡으려고 10년, 20년을 쫓아다니던 자베르라는 경찰 두목이 딱 포위하고 나서 파리의 다리 위에서 장발장을 앞뒤로 포착을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냥 끌고 가면 되는 거죠. 그래서 부하들이 끌고 가자고 하니까 자베르가 부하들을 문책하더니 체포영장을 안 가져왔다, 그러니까 체포영장 없이 끌고 가면 내일 신문에 날 거고 언론들이 이것을 그대로 보도하면 내각이 총사퇴할 위험성이 있다, 이런 얘기를 해요. 이게 1830년대 얘기거든. 프랑스. 그때 이미 인권이라는 것에 대해서 프랑스혁명 다음이니까 그렇지만 그만큼 발달했는데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뒤인 한국에서 현재 그냥 마구잡이로 끌고 가니 이게 어떻게 된 사회인가에 대해서 불만을 얘기했었죠.
 
◎ 손석희 / 진행  :
그러나 아시는 것처럼 현 정부는 법치주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마구 잡아간다고 표현하셨습니다만 법적 근거를 가지고 또 행하는 것이라고 또 얘기하고 있고요. 
 
◎ 리영희 선생  :
우리는 법적 근거라는 것이 강자의 입장에서 자기의 틀에 맞는, 이익의 틀에 맞는 그런 법적 근거만을 제시해선 아무런 의미가 없죠. 아시다시피 민주주의라는 것은 지배를 받는 피치자의 정당한 동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법률이나 기초를 가지고서 권력을 행사해야지.
 
◎ 손석희 / 진행  :
알겠습니다. 1950년대 중엽부터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언론인으로서 또 학자로서 또 사회비평가로서 국제문제 전문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해 오신바가 있습니다. 당시의 삶을 ‘지성인에 해당하는 삶의 구간’ 이렇게 칭하셨던데요. 혹시 ‘지성인’이라는 단어를 쓰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보통은 지식인이라는 단어도 쓰곤 하는데 혹시 차별을 두고 말씀하신 건지요?  
 
◎ 리영희 선생  :
그런 의미로 차별을 뒀죠. 지식인이라는 것을 흔히 요새는 기술적인 지식인, 또는 전업적인 지식인들이 많은 사회이다 보니까 사회공동체, 자기의 사회 전체에 대한 관심은 없이 오로지 그 고도의 기술 직업적 지식으로 사는 이 사람들을 지성인이라고 할 순 없단 말이에요. 지성인이라는 것은 역시 전체 개별적으로 살면서 또한 동시에 전체의 일원으로서 전체의 생존과 복지와 운명까지도 자기의 것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그런 삶이야말로 지성인이다,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죠.
 
◎ 손석희 / 진행  :
그것은 달리 표현하면 사회적 정의감, 이런 것으로 표현해도 됩니까? 
 
◎ 리영희 선생  :
사회적 정의감 물론 그렇죠. 그리고 역사의식에 바탕 해서 오늘을 보고 또 내일 지향을 늘 생각하는 그런 것을 겸해야겠죠.
 
◎ 손석희 / 진행  :
행동이 포함이 되는 걸까요?  
 
◎ 리영희 선생  :
그렇죠. 그 행동이라는 것은 무슨 육체적으로 몸으로 라는 뜻만이 아니라 그런 것보다 각기의 위치에서 자기의 지성과 지식과를 최대한으로 공동체, 공동체는 조그마하게는 사는 범위이고 크게는 국가이고 그런 미래까지의 연결을 지으면서 발언하고 쓰고 하는 그런 것까지로 행동한다고 봐야죠. 각기의 위치에서 행동하는 방법이야 조금씩 다 다르지만, 
 
◎ 손석희 / 진행  :
그것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진보진영, 아니면 뭐 보수진영, 그것을 막론하고 말씀하신 거겠죠.
 
◎ 리영희 선생  :
난 뭐 진보진영이나 보수진영이나 그런 말, 단어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냥 살아가는 방법, 패턴, 이런 것으로써 난 자기 자신을 어떻게 규정을 해서 무슨 주의, 이런 식의 표현을 싫어하기 때문에 물론 굳이 그렇다면 진보나 보수나 다 초월하고서 그래야죠.
 
◎ 손석희 / 진행  :
오래 된 책이긴 합니다만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책을 쓰신바가 있으십니다. 그래서 그때는 좌우로 또 이렇게 나눠서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한국 사회는 좌우의 날개로 날고 있다고 판단하고 계신지요? 혹시.
 
◎ 리영희 선생  :
지금이야 전혀 아니죠. 전혀 아니죠. 오히려 이게 어떻게 될 거냐가 걱정스러울 만큼 오른 쪽에, 즉 우익의 날개만이 커가고 함께 더불어 기능을 발휘해야 할 좌측의 날개는 왜소해지고 이른바 위축되고 그런 상황이라고 지금 봐야죠.
 
◎ 손석희 / 진행  :
그런 속에서도 여전히 이른바 진보진영 쪽, 그러니까 왼쪽의 날개라고 표현하실 수 있는 그 진영은 늘 그런 비판을 받아왔습니다만 늘 분열한다 라는 얘기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나가야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리영희 선생  :
본래 세계정치사를 보면 폭력집단적 성향을 가진 개인과 단체가 우익이라는 것을 이루는 건데 주로 우익은 이해관계, 말하자면 뭐를 가지고 더 먹고 덜 먹고 하는 그것으로 분열해요. 소위 좌익이라는 세력은 먹을 걸 가지고서 싸우다가 분열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념, 이론의 세분화를 극단까지 몰고 가는 그런 나쁜 성향이 있어가지고 분열하고 자멸하는 그런 두 가지의 별도 대립하는 양상이거든요. 오히려 우익이라는 것이 가지는 그 폭력성이 있지만 그들이 하나가 되려는 모범을 좀 좌측이 채택하고 우측은 또 먹을 것을 쟁탈하는 데에서 생기는 그런 것을 이론적인 좌측의 행태에서 조금 배우고 이렇게 하면 쌍방이 다 이로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 손석희 / 진행  :
글쎄요. 단기적이든 중기적이든 한국의 진보진영이 어떻게 역할을 할 것인가, 앞으로. 그리고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론을 취해야 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있어선 혹시 생각을 해두신 게 있으신지요?  
 
◎ 리영희 선생  :
어차피 이런 흔들림은 방향의 흔들림은 그건 뭐 있게 마련이니까 이 기간을 좌파들이라는 사람들은 하나의 반성, 크게 자기반성의 기회로 삼아서 이론적인 이념적인 극렬분열을 자성하면서 작은 차이를 버리고 큰 원칙에 모여 가는 그것밖에 없겠죠. 어차피 그런 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정치나 사회생활의 패턴에서 변증법적으로 그런 변화를 겪게 마련 아니겠어요. 
 
◎ 손석희 / 진행  :
알겠습니다. 리영희 선생님 수식하는 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지가 ‘메트르 드 팡세’ 우리말로 ‘사상의 스승’ 이렇게 칭했고요.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이렇게 또 리영희 선생님을 칭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수식어들에 대해서 혹시 리영희 선생님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느끼고 계신지요?  
 
◎ 리영희 선생  :
약간 거북한 느낌이죠. 왜냐하면 난 중국에 한문으로 표시한 격언이 있는데 성문과정 군자치지(聲聞過情 君子恥之)라, 그런 말이 있어요. ‘성문’이라는 것은 소문, 평가, 뭐 칭찬, 이런 것이 성문과정, ‘정’은 실제라는 건데 그런 소문들이 사실보다 부풀어져 있을 때 오히려 그 당사자는 군자일 경우에 그걸 부끄러워한다, 내가 잘못 자기를 표현했거나 해서 그런 헛된 소문이 평가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우쭐해서 기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가 처신을 잘못했구나 그러니까 이런 실제보다도 과장된 평가나 말이나 이런 것이 나온 것 아닌가, 그럴 때마다 난 좀 부끄러워지죠. 
 
◎ 손석희 / 진행  :
그러면 이렇게 해석하면 될까요? 그러니까 리영희 선생님에 대한 평가, 외부의 평가와 또 본인이 추구하는 그런 목표를 가능하면 그 간극을 좁히려고 노력해 오셨던 삶, 그렇게 받아들이면 될까요?  
 
◎ 리영희 선생  :
예, 그렇죠. 하여간 내가 현실정치나 이런 걸 하는 사람이라면 뭐 평가나 소문이나 이런 것이 나면 날수록 우쭐해지잖아요. 그런 것이 하나의 지식인으로서 학자로서 또 반성하는 개인으로서는 그래선 안 되는 그런 걸 생각하는 거예요. 
 
◎ 손석희 / 진행  :
그러면 선생님께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때 가장 반성하신 부분은 어떤 걸까요?
 
◎ 리영희 선생  :
뭐 하도 광범위한 얘기가 돼버리죠. 나는 공적인 문제에 있어선 그렇게 반성을 해야할만한 어떤 자기부정을 해야할만한 그런 일을 또 시도해본일이 없으니까 그런데, 다만 내 개인의 가정생활에서 제 아내와 가족에게 하도 많은 고생을 시켰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서는 내가 반성을 하죠. 
 
◎ 손석희 / 진행  :
저기 뒤에 사모님도 계신데요.
 
◎ 리영희 선생  :
예, 고생했죠.
 
◎ 손석희 / 진행  :
아홉 번 연행되셨고 다섯 번 구치소에 수감되셨고요. 재판도 물론 많이 받으셨고 언론계에서는 두 번 그만두셨어야 됐고,
 
◎ 리영희 선생  :
대학에 가서도 박정희 때 쫓겨났다가 박정희 죽고서 복직하고 전두환 이어서 들어오자 또 쫓겨났다가 전두환 말기에 복직해서 대학으로 돌아왔고, 그런 생활이다 보니까 나는 한국의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게 아니라 그런 제도화된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완전 아웃사이더였던 셈이죠. 그러니까.
 
◎ 손석희 / 진행  :
사모님께는 그래서 좀 빚을 갚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 리영희 선생  :
그렇지 않아요. 사람이라는 게 이게 나이가 들수록 일생을 같이 한 사람의 젊었을 때 고생에 대해선 참 갚아질 수가 없어요. 아무리 해도. 정말 우리 세대라는 게 가난에서부터 시작해가지고 공권력과의 대립관계에서 가족마저 참 엄청난 고생을 한 것이 쉽게 갚아지질 않죠. 
 
◎ 손석희 / 진행  :
요즘은 좀 갚으시면서 사시죠?
 
◎ 리영희 선생  :
예, 그러려고 하면서 사는 겁니다. 요새는. 그런데 이제 비로소 가족과의 좋은 생활이 되려고 할 때 이렇게 병이 들어서 쓰러졌으니 참 조금은 안타깝죠.
 
◎ 손석희 / 진행  :
사모님께 여러 가지로 미안하다, 빚을 졌다 라는 말씀하셨는데 자녀분들께는 어떻습니까? 같은 생각이시겠죠?
 
◎ 리영희 선생  :
애들한테도 마찬가지죠. 내가 애들이 자랄 때 어릴 때 한창 사회 문제에 대해서 몰두했을 때이기 때문에 한 가지 예를 들면 텔레비전 같은 것도 만화와 소년 프로 아니면 딱 그냥 텔레비전을 치워버렸어요.
 
◎ 손석희 / 진행  :
못 보게 하셨군요?  
 
◎ 리영희 선생  :
예, 너무나 내가 이념, 그런 의미에서 이념적으로 좀 경직돼 있었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을 해요.
 
◎ 리영희 선생  :
일상에서도 다 실천하시다 보니까.
 
◎ 리영희 선생  :
일상에서 가정에 애들에게 충분히 애비로서의 그런 육신적인 사랑의 표시로서 관계가 이어져야 하는데 애들과의 사이에도 어떤 이념적인 그런 장벽을 친 셈이 됐어. 그래서 서먹하죠. 지금까지도 어렸을 때 잠재의식으로 자리 잡은 아버지의 이미지가 그렇게 쉽게 잘 풀리지 않더라고요.
 
◎ 손석희 / 진행  :
그래서 이제 사모님께서 다 모든 걸 떠맡으셨겠군요?  
 
◎ 리영희 선생  :
결국 그런 셈이죠.
 
◎ 손석희 / 진행  :
요즘은 물론 안 그러시겠죠. 잘 지내시죠?
 
◎ 리영희 선생  :
이제는 뭐. 
 
◎ 손석희 / 진행  :
알겠습니다. 리영희 선생님의 어떤 삶을 관통하는 신념이라고 할까요. 80평생을 지켜 오신 신념이라면 어떤 걸까요?
 
◎ 리영희 선생  :
뭐, 그냥 흔히 얘기된 거지만 Simple Life, 검소한 생활과 High Thinking, 이념적으로 사고를 높이 가지는 그런 거죠. 구체적으로 어떤 거냐 설명하기 힘들지만 가령 흔히들 유행들이 많잖아요. 어느 정도 되면 골프 쳐야 하고 어느 정도 되면 뭘 해야 하고 하는 이런 유행에 가까운 또는 그런 물적, 세속적 자기방기를 거부하는 거죠. 나는. 그걸 멸시한다는 건 안 됐지만 그런 거 다 치우고 검소하게 생활을 하면서 그래야 사고의 도덕적 논리적 수준의 높이를 순수하게 높여갈 수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에요. 
 
◎ 손석희 / 진행  :
개인의 삶에서는 그렇고 그것이 어떤 정치적 신념으로 옮아가면 그건 어떻게 발현이 됐을까요?  
 
◎ 리영희 선생  :
말하자면 권력이나 이권이나 경제적 이권이나 사회적 평판이나 하여튼 이런 것에 초월하고자 하는 거예요. 가령 권력의 자리에 연연해서 뭔가 한 자리씩 해보려고 한다든가 감투를 쓰고자 사방을 헤맨다든가 쉽게 말하면 그런 것을 안 하고 가능하면 자기를 깨끗하게 지켜나가는 거예요.
 
◎ 손석희 / 진행  :
알겠습니다. 시선집중이 <토요일에 만난 사람> 언론인 리영희 선생님과 함께 하고 계신데요.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오늘 언론인 리영희 선생님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정신적인 스승으로 노신을 말씀하신 바가 있어서요. 노신의 철학 중에 특별히 어떤 부분에 감명을 받으셨는지요?
 
◎ 리영희 선생  :
한마디로 쉽게 말해서 시대의 그 삐뚤어진 정체나 역사에 대해서 민중의 입장에서 같이 울고 같이 웃고 하면서 문학을 해나가는 그리고 정신을 깨우친 그 자세에 큰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 손석희 / 진행  :
예, 알겠습니다. 70년대 대개 대학을 다닌 세대들한테 물어보면 선생님 사상에 특히 매료된 학생들 같은 경우에 ‘의식화의 은인’이라고 부르기도 했고요. 반대편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드려 죄송합니다만 ‘의식화의 원흉’이다, 이렇게 또 부르기도 했습니다. 
 
◎ 리영희 선생  :
그렇죠. 그건 오랜 세월 그래왔으니까 조금도 나 듣기에 거북스러운 거 없어요.
 
◎ 손석희 / 진행  :
그래서 7, 80년대에 굉장히 많은 젊은이들이 사실은 또 선생님께 영향을 받아서 민주화운동도 했고 또 감옥에도 다녀왔습니다.
 
◎ 리영희 선생  :
그랬죠.
 
◎ 손석희 / 진행  :
어떤 부채의식 같은 것은 혹시 없으십니까? 
 
◎ 리영희 선생  :
있죠. 부채의식이 있죠. 난 개인적으로 그런 분들을 만날 때 늘 많은 것을 내가 죄를 지었구나 그런 생각을 해서 도덕적으로 인간적으로 굉장히 마음속으로 참 반성을 하는 거죠. 그러나 죄의식이라는 표현까지는 아니고 한 시대의 한 사회에서 한 시대가 변화를 요구할 때 일어나는 일반적 현상이에요. 그래서 나도 역시 그 속에서 시대가 운명적으로 요구하는 그 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인 거고 또 내 저서나 발언이나 사상에 공감해서 그런 어려움을 겪었던 젊은이들로 그 시대에 산 사람으로서 시민으로서 피할 수 없었던 운명의 길이라고 봐요.
 
◎ 손석희 / 진행  :
아마 앞장서서 가셨기 때문에 당시에 그 젊은이들도 선생님께서 부채의식을 가지시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 같습니다만 글쎄요, 아까 잠깐 그동안에 살아오시면서 후회스러운 일이 없으신가 여쭤보긴 했습니다만 아쉬운 일은 뭐가 있을까요, 그럼. 꼭 좀 하고 싶었는데 못 하셨던 일은 혹시 없으실까요?
 
◎ 리영희 선생  :
난 자기능력의 한계라는 것을 늘 자기반성하면서 살기 때문에 그 이상은 내가 더 바라지도 않고 그래서 내 능력껏 내 한도 내에서 충분히 인생을 꽉 채워서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뭐 한스러운 건 없어요. 좀 더 잘 했으면 그야 능력이 더 컸으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못 한 것에 대한 자기 뭐랄까, 
 
◎ 손석희 / 진행  :
아쉬움,
 
◎ 리영희 선생  :
아쉬움이 많겠지만 그런 문제에서는 난 자기능력의 한계를 딱 알고 있기 때문에.
 
◎ 손석희 / 진행  :
그러면 뭔가를 조금 더 앞으로 한 가지라도 좀 해보고 싶다 라고 생각하시는 건 없으신지요?
 
◎ 리영희 선생  :
있죠. 내가 쓰러져서 반신불수가 된 것이 10년인데 꼭, 좀 더 책을 볼 수 있고 쓸 수 있고 사상을 굴릴 수가 있었다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보탤 수 있는 뭔가,
 
◎ 손석희 / 진행  :
기회가,
 
◎ 리영희 선생  :
저술을, 뭐 주로 저술이지만 할 텐데 이제 전혀 그런 것을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에 굳이 가정을 앞세워서 ‘아, 그랬으면 됐을 걸’ 그런 생각도 안 해요. 난. 
 
◎ 손석희 / 진행  :
아까 책을 더 읽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기자시절에도 굉장히 많은 책을, 엄청난 독서량을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 리영희 선생  :
예, 꼭 공부만을 위주로 산 사람은 아닌데 술도 많이 했고 방탕도 좀 했고 남과 다름없이 그냥 살아오면서 한 가지 무지하게 독서를 한 것만은 사실이에요. 그래서 재미나는 것이 원고료가 조금 들어오면 서점에 가서 신간들 그동안에 못 본 것을 꾸려가지고 집에 들어오는데 밤에만 와, 와서 대문 밖에 책 꾸러미를 이렇게 놓고 대문 두드려서 들어가요. 집에. 일단 들어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갔다가 나와서 책 꾸러미를 다시 가지고 들어오는 거야. 왜냐하면 그거 보면 집사람이나 어머니나 식구들은 어떻게 하는데 뭐 책만 사오냐고 아주 좋아하지 않거든. 그래서 그런 수법으로 하면서까지 굉장히 독서를 많이 했죠. 
 
◎ 손석희 / 진행  :
그렇게 해서 또 나름대로 리영희 선생님이 펼칠 수 있었던 정치철학이라든가 사회철학 같은 것들이 많은 독서량을 통해서 구현될 수 있었을 테고요.
 
◎ 리영희 선생  :
그렇게 말해야겠죠.
 
◎ 손석희 / 진행  :
최근에 그러면 읽으신 책은 어떤 게 있으십니까? 요즘은 책 읽기 힘드시다고  하셔습니다만
 
◎ 리영희 선생  :
요새는 이 눈 때문에 그렇고 또 정기가 쇠약하니까 오랜 시간 못 보죠. 차츰 독서의 경향을 내 자신이 이렇게 보니까 형이상학적인대로 옮겨갈 수밖에 없더라고요. 불교법전 같은 거 좀 읽고
 
◎ 손석희 / 진행  :
얼마 전에 <레미제라블>을 다시 원서로 다 떼셨다면서요?  
 
◎ 리영희 선생  :
예, 그렇죠. 1,800페이지인데 형무소 들어가서 읽은 것을 이제 한 20년 지나서 또 한 번 읽고 싶어져서 그랬습니다.
 
◎ 손석희 / 진행  :
오늘 그 방송 듣는 많은 젊은이들이 많이 좌절할 것 같습니다.
 
◎ 리영희 선생  :
(웃음) 요새는 국가가 언어정책을 관리하고 독촉하니까 월등 낫겠죠. 우리보다. 월등 앞서가고 있겠죠. 뭐.
 
◎ 손석희 / 진행  :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지금 리영희 선생님 댁에서 인터뷰하고 있기 때문에 뻐꾸기시계가 지금, 정감 있네요. 이 소리가. 밤에도 이렇게 울리면 혹시 주무시는데 지장 없으실까 모르겠네요.
 
◎ 리영희 선생  :
저 뻐꾸기가 아주 현명해서 해만 떨어지고 어두워지면 안 울어. 잘 만들었어요.
 
◎ 손석희 / 진행  :
(웃음) 정말 잘 만들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 리영희 선생  :
어두우면 안 울어. 
 
◎ 손석희 / 진행  :
예, 아파트에 사시는데 제가 들어올 때 보니까 아파트에 문패가 걸려 있어서요. 대개 아파트에는 문패가 잘 안 걸려 있는 편인데 거신 이유가 혹시 있으십니까?
 
◎ 리영희 선생  :
난 언제나 개인의 권위, 인격, 독립적 사유, 판단, 가치, 이런 걸 중요시하기 때문에 집단으로서의, 난 사실 국가보다 개인의 인간의 중요성을 더 앞세워요. 그렇게 거창하게 나가지 않더라도 내가 7년 동안을 6.25에 군인으로서 군번으로 살아왔단 말이에요. 6.25에 남들은 3년 반 하니까 제대했는데 연락장교, liaison officer라고 하는데 흔히 통역장교라고도 하던데 후에. 잘 하니까 안 놔줘. 휴전이 됐는데도 못 나왔다고요. 그래서 7년을 했어요. 7년 동안 그 군번으로 그 지긋지긋한 군대, 동조치도 못하고 거기서 굴복한 채 7년 사는 동안에 번호로만 불렸단 말이에요. 나는 없고, 나의 가치는 없고 오로지 번호. 그 다음에는 형무소에, 이 군부독재 정권 하에서 여러 차례 형무소를 드나들면서 그때마다 소위 수번호라고 그러죠. 이 번호로 가슴에다 번호를 적어가지고 그걸로 불리었고 그 번호가 하여간 나를 대신했어. 그것이 내가 견딜 수 없는 정신적인 상처를 입은 거예요. 그래서 그것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 했다면 뭐 되지도 않는 일이지만 하여간 싫으니까 번호보다 내 이름 문패를 걸어놓은 거예요. 
 
◎ 손석희 / 진행  :
예, 오늘 여러 가지로 솔직하시고도 또한 귀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우리 청취자 분들 새해를 이제 맞으시는데요. 덕담 한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 리영희 선생  :
어려운 국가의 상황 속에서도 원기를, 의지를 잃지 말고 각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해서 인내, 좀 인내심을 발휘해서 살아가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언제나 편안한 세상이 우리 사회에는 있었던 것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하여튼 자기가 인내하지 못하면 완전히 낙오하는 것이고 어려운 조건에 처하더라도 인내를 할 기운과 능력과 의지력을 잃지 않으면 역시 또 돌파할 수 있는 기회는 오는 거니까 제발 새해에는 모두 그런 생각으로 맞아주길 바랍니다. 
 
◎ 손석희 / 진행  :
예, 고맙습니다. 리영희 선생님께서도 사모님과 함께 늘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리영희 선생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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