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방송 다큐에서 다뤄진 파리의 조선 무희 ‘리진’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주진오 상명대 교수의 주장에 대해 KBS <한국사 전(傳)> ‘리진’ 편 제작 당시 책임PD(CP)를 맡았던 장영주 <역사스페셜> CP가 본지 11월 3일자와 인터넷판에서 ‘리진’은 실재한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며 주 교수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에 대해 주 교수는 ‘리진’이 실재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리진’의 실재했다는 증거를 내놓아야 한다며 재반론을 보내왔다. 역사적 사실 검증의 중요성에 논의의 진전을 기대하며 주 교수의 글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필자의 기고에 대한 장영주 KBS CP의 반론을 잘 읽었다. 역시 KBS <역사 스페셜>의 책임 PD 답게 치밀한 자료 제시로 반박을 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필자는 그동안 20년에 걸쳐서 애정을 가지고 각종 역사 다큐멘터리에 자문과 출연을 해왔다. 따라서 필자의 문제제기는 결코 좋은 다큐를 만들기 위해 고생하고 있는 제작팀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전혀 아니었다. 19세기 말을 전공한 역사학자로서 다큐 제작에 있어서 보다 면밀한 검토와 조심스러운 접근을 바라는 마음에서 문제를 제기했을 뿐이다. 이같은 논쟁까지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장 CP의 반론에 답하지 않을 수 없다. 지면의 특성 상 긴 설명이 어렵기 때문에 관심 있는 분들은 12월에 발간될 ‘역사비평’ 겨울호를 참고해 주시기 바란다. 

리진의 존재를 입증할 증거를 제시하기 바란다

사실 리진의 실존 여부를 가리는 논쟁은 간단하게 끝날 수 있는 일이다.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 근거자료를 제시하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장 CP는 이 간단한 방식이 아니라 실존하지 않았다는 필자의 주장에서 허점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지난 다큐에서도, 이번 반론에서도 리진의 존재를 입증할 단 하나의 근거자료를 더 제시하지 못했다. 여전히 그가 전적으로 기대고 있는 것은 프랑댕이 쓴 글 일부이다.

다큐는 리진이 파리에서 프랑스 외교관의 아내로서 유명한 예술가들과 카페문화를 즐겼고 예술가로 활동했다고 하였다. 사실이라면 그녀는 매우 주목을 끌었을 것이 틀림없고 누군가 그녀에 대한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공식적인 입국기록, 주거기록, 외무부가 조사한 기록 등이 남아 있을 것이다. 프랑스 까지 취재를 다녀왔다면, 그래서 존재를 확신했다면 지금이라도 근거를 제시하면 될 것이다. 세계의 여러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했던 리진의 기록을 동시에 약속이라도 하고 없애 버렸다고 믿을 수는 없는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프랑스에서도, 국내에서도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고백하며 소설 ‘리진’이 역사소설이 아니라고 했던 신경숙 작가가 솔직했다고 생각한다.

   
  ▲ 2007년 방영된 KBS <한국사 傳>  
 
프랑댕의 책은 과연 믿을 만한가?

장 CP는 프랑댕의 기술이 ‘당연히 그의 경험에서 나온 사실’로 판단했다면서 취재 결과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며 정확한 사실로 언급된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고 하였다. 사실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일기, 여행기, 회고록, 비망록 등이 존재한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어떤 자료도 엄밀한 사료 비판 없이 사실로 단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훈련받은 사람들이다. 다큐에는 프랑댕이 자신의 대고모부(할아버지 누이의 남편)라고 하는 클로드 칼메트가 등장하여 ‘그녀는 실제인물이다. 꾸며내거나 전설이 아니며 직접 보고 쓴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우연히 프랑댕의 유산을 물려받은 건축가일 뿐 스스로 프랑댕을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다는 점을 밝힌 바 있었다. 그는 프랑댕이 사실을 바탕으로 썼다는 증언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더욱이 과연 프랑댕이 쓴 책이 정말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책의 내용은 철저하게 문명의 프랑스와 야만의 조선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가지고 쓴, 19세기 말 서구인들의 보편적 사고체계라고 할 수 있는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해 있다. 그가 보는 조선은 참으로 미개한 나라이며 조선인은 더럽고 무기력한 인간들이다. 그런데 다큐에서는 이 책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필자는 그가 리진에 대한 서술에서 그녀가 프랑스에서 육체적 열등감으로 쇠약해져 ‘장난감 삼아 여자 옷을 입혀 놓은 한 마리 작은 원숭이 같아 보였다’고 기록한 부분을 보면서 얼마나 그가 오만과 편견을 가진 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21세기의 한국에서 마치 대단한 객관적 기록자로 대접받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프랑댕은 과연 그가 보고 겪은 것만 썼는가?

그의 책에는 자신이 직접 보고 겪지 않은 것을 쓴 부분들도 분명히 있었다. 우선 태학사 번역본의 67-70쪽에는 ‘강대국 틈의 정치상황’이라는 장이 있다. 그 내용은 대부분 임오군란에서 갑신정변까지 벌어진 일들이다. 분명히 그는 1892년에 조선에 왔기 때문에 이 부분이 그가 직접 보고 겪은 것을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내용도 부정확하며 일본에 대한 찬양으로 일관하고 있어 문제가 많은 내용이다. 

더구나 그의 책이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것만을 쓴 것이 아니라는 반증은 바로 프랑댕의 리진 관련 서술에 들어가 있다. 플랑시가 결혼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을, 장 CP가 제작한 다큐에서도 분명히 프랑스 외무부 직원이 제시한 문서로 보여 주었다. 주목할 것은 다큐에서 프랑스 외무부의 직원이 ‘어쩌면 프랑댕이 잘못 알았을 지도 모른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크 오랑쥬 교수도 외무부의 허가 없이 조선 여성과 결혼했을 가능성이 없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쨌든 공사와 리진이 결혼을 했다는 프랑댕의 서술은 오류였음이 입증된 것 아닌가? 이 점을 피하기 위해 소설가들은 실제로는 결혼하지 않고 동거했던 것으로 그려내고 있지만 그것은 프랑댕의 기술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리진이 자살을 했다는 시점은 1896년 4월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그 시점에는 프랑댕이 조선에 없었음에도 마치 본 것처럼 쓴 내용인 것이다. 프랑댕이 이 책을 자신이 보고 겪은 것을 토대로 썼다는 주장도 허구인 것이다. 

프랑댕은 1892년 4월에 처음으로 조선에 왔다

이번에 장 CP가 필자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제시한 문건이 ‘客歲, 本國國家簡派法大人蘭亭, 前來貴國漢京城內, 接任辦事大臣之職, 嗣復特派總理安設北圻中國界牌事務‘라는 대목이다. 이 문서는 [구한국외교문서-法案]에 실려 있어 이미 잘 알려진 자료이다. 그런데 그는 이 내용을 ’지난 해 본국은 법란정(프랑댕)을 파견, 귀국 한성으로 왔다‘고 해석해서 플랑시가 재임하던 시절에 조선에 온 적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는 장 CP가 위의 문건을 오역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前來’를 ‘전에 왔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제대로 된 번역은 ‘오다’라는 뜻이다. 즉 ‘귀국의 한성에 와서’라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내용은 ‘작년에 우리나라(프랑스)가 프랑댕을 조선으로 파견하여 귀국의 한성으로 와서 공사의 직책을 수행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뒤이어 다시 중국과 베트남 사이의 국경을 획정하는 업무를 맡게 되어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입국할 수 없으니 업무가 끝나는 대로 부임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장 CP가 프랑댕이 플랑시 재임 시에 조선에 왔기 때문에 두 사람이 만났을 것이라고 한 추정은 인정할 수 없다.

외국 공사의  기생 하사 요구 있을 수 없다

장 CP는 당시 프랑스 공사가 광산채굴권과 철도 부설권도 달라고 하는데 장악원 소속 여자 중 하나 달라고 하는 것이 무슨 대수냐고 반문한다.

조금 위험한 말이 아닐까? 조선왕조에서 국왕이 여자를 하사하는 사례가 있었는지, 더구나 외국 공사에게 1890년 단계에서 그런 경우가 있는지 필자는 아직 듣지 못했다. 거듭 말하지만 조선왕조는 그렇게 법도가 없는  나라가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계속해서 기생들이 외국 공사를 위한 연회에서 공연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국음악사 연구자들에 의하면 세종 이후 외연에는 기생 대신 남자 무동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1901년에 있었던 진연 의궤를 보면, 분명히 다른 연회와 달리 고종이 직접 관람한 외진연에서 만은 남자 무동이 정재를 담당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 외국 공사 앞에서 그것도 1890년 단계에서 장악원 여기가 춤을 추었다는 것은 확실한 근거자료가 없는 한 함부로 이야기할 내용이 아니다. 물론 개인적 연회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나 그 경우 왜 프랑스 공사가 고종에게 그녀를 달라고 했는지를 밝힐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홍종우는 ‘앙심을 품은 고관’일 수 없다

홍종우는 1893년 7월경에 프랑스를 떠났고 플랑시는 1893년 4월에 프랑스로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4달 정도를 프랑스에 같이 있었다는 장 CP의 말은 일리가 있다. 원래 나의 문제제기는 당시 귀국을 준비하고 있던 홍종우가 리진에게 앙심을 품을 이유나 근거가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다. 다큐에서도 홍종우가 그 고관이라고 하지 않았다.

   
  ▲ 홍종우, 주한 초대 프랑스 대사 콜랭 드 프랑시, 제 2대사 이폴리트 프랑댕.(왼쪽부터)  
 
하지만 장 CP가 지적한대로 홍종우가 1898년에 가서야 다시 등장한다고 했던 필자의 설명이 부족했다는 점은 인정하고 반영하도록 하겠다. 홍종우가 김옥균을 죽인 공로로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에 진출했던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곧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정세가 완전히 뒤바뀌자 좌절을 맛보고 말았다. 그는 아관파천 이후 주로 궁내부에서 근무했다. 

그런데 궁내부 외사과장으로서 외국 공사관과의 업무를 담당했던 그가, 특히 자신의 정치적 배경이 되어 준 나라  프랑스의 공사로부터 리진을 강제로 데려가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홍종우는 분명히 프랑스 공사로부터 결코 용납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장 CP의 지적대로 홍종우는 3달 남짓 장례원(掌禮院)의 장례를 지냈다. 하지만 당시 장례원은 장 CP의 생각처럼 ‘음악과 춤 등의 예식을 담당하는 곳‘이 아니라 궁궐 제사, 왕릉, 왕족, 귀족들을 담당하던 부서였다. 물론 ‘음악과 춤’을 담당했던 장악원도 궁내부 장례원으로 편입되어 협률과로 있다가 1900년에 교방사가 된다. 하지만 홍종우가  중요한 업무보다 협률과 일에 간여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 리진의 실체를 부정하는 논문을 썼나?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3년 전 김탁환 작가와 신경숙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리진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댕의 책 번역본을 찾아 읽어 보았다. 이 시기를 전공한 역사학자로서 이 책의 내용에 신빙성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두 소설이 당시의 역사상을 대단히 잘못 그리고 있다는 점에 우려를 느꼈다.

그러던 중 KBS <한국사 傳>에서 리진을 소재로 다큐를 방송하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찾아보았다. 그런데 다큐에서도 리진이 실존인물임을 전혀 자료로 제시하지 못하면서 단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진행자가 리진을 나혜석이나 윤심덕보다 30년을 앞선 한국 최초의 신여성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걱정이 되었다. 실제로 인터넷을 통해 이미 리진은 확고하게 실존인물로 자리를 잡았다.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인물을 허구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글로 옮기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물론 역사는 결코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새로운 자료가 제시된다면 얼마든지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다. 이제 소모적인 논쟁보다는 각자의 자리에서 의미 있는 결과물을 생산해 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가 아닐까 생각하며 이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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